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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먹고 살아남기

by 남봉

지난 1월, 일본 오사카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계획형 인간들이 아닌지라 출발 며칠 전에야 겨우 정신줄 붙잡고 관광 명소를 찾아 동선을 짰다. 오사카 공항에서 교토로, 또다시 오사카로 짐을 들고 이동하는 고난도 임무 수행을 위해 교통편에 온 힘을 쏟아내자, 음식점 같은 건 찾아 놓을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들 데리고 맛집 줄 서기는 어려울뿐더러, 절대 미각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첫날 교토로 이동해 료칸에 짐을 풀고 팔팔 끓는 온천에 몸을 녹이며 여독을 풀었다. 저녁에는 동네 산책하는 기분으로 야사카 신사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신사를 한 바퀴 도는 것이 계획이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낯선 땅의 하늘도 붉게 물들었다. 노을을 신호탄 삼아 온천으로 노곤노곤 늘어진 엿가락 같은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가까운 줄 알았던 야사카 신사는 멀었다. 10분 정도 예상했지만, 어느새 고파진 배를 부여잡고 20분 넘게 걷고 있었다. 슬슬 신경이 뾰족해지기 시작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장단에 맞춰 사는지라 화가 없는 편이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바로 허기짐. 배고픔에 슬슬 화가 올라오는 나와 함께 아이들도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를 닮은 사춘기 큰 아이는 배고파서, 학다리 소유자 둘째는 다리가 아파서.


식당과 가게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거리를 만나자 우리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음식점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던 탓에 그저 감으로 레스토랑을 골라야 했다. 가장 먼저 일본 가정식집을 발견했는데, 맛집 느낌은 없었고 우리나라로 치면 김밥천국 같은 가성비 좋은 음식점 같았다. 아이들과 나는 눈이 뒤집혀 여기라도 가자며 문 손잡이를 잡았지만, 쓸데없이 신중해진 남편이 저지했다. 분명 더 맛있는 곳이 있을 거라며. 어쩐지 슬픈 예감이 들었다.


뒤에서 아이들 손을 잡고 구시렁 거리며 남편을 쫓아갔다. 간판은 보이나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기에 어쩌다 찾은 곳들은 주머니 거덜 내는 고급 레스토랑이거나, 반찬만 파는 가게였다. 홧김에 주머니 사정은 잊어버리고 고급 레스토랑 문을 열어보았지만, 이 마저도 웨이팅이 있거나 재료 소진으로 쓸쓸하게 뒤돌아야 했다. 첫째는 검은 연기를 등 뒤로 뿜어내고 있었고, 둘째는 힘들다며 가야금 같은 소리를 꾸준히 냈다.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망망대해 떠도는 표류자처럼 낯선 땅에서 방황하는 사이 식당들은 빠르게 문을 닫았다. 안 되겠다 싶어 지휘관을 갈아치우고 내가 결단을 내렸다. 아까 그 식당이라도 가자며.


먼저 뒤돌아 두 팔을 휘저으며 씩씩거리고 걷다가 그만 지나가던 20대 일본 여자분과 부딪히고 말았다.

나의 잘못인지 너의 잘못인지 모르겠으나 동방예의지국 출신으로 먼저 사과를 건넸다. 고개는 다소곳이 숙였지만 목소리는 우렁찼다. 언어는 자신감이지!

“아리가또 고자~~ 이마쓰.”

으잉? 내뱉음과 동시에 우리 모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어떻게든 수습해보려 했지만 목구멍에 무명실 한 뭉터기가 막힌 듯 소리가 나질 않았다. 급한 대로 나의 사랑 모국어가 튀어나왔다. “아.. 저.. 그게 아니라..” 허둥지둥하는 사이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부딪혀 놓고 고맙다고 하는 한국 여자가 무서웠겠지... 멀어지는 이를 차마 붙잡지 못하고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뒤에서 걷던 아이들이 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평온했던 일본 여성에게 파문을 일으킨 얘기를 해주자, 방금 전까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돋우던 아이들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낄낄거리며 웃고 난리가 났다.


이에 질세라 개그 본능이 살아난 남편이 봉인된 에피소드를 방출했다. 20대 청춘 시절 그는 미국 여행을 떠났다. 영어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은 충만하였으나 그에 걸맞은 실력은 꽤 부족한 상태로. 하루는 길을 잃어버린 남편이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Can I help you?”

부부가 쌍으로 부족하다. 내가 이 인간과 왜 결혼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접을 때다.


엄마, 아빠의 어이없는 실수담은 다행히도 아이들의 영혼을 뻥튀기처럼 부풀게 했다. 그 틈을 타 우리는 강물을 거꾸로 오르는 연어 떼처럼 길을 거슬러 올라가 첫 번째 골랐던 식당에 무사히 돌아왔다. 음식은? 당연히 맛있었다.




막상 여행을 가려고 하면 예약하고 가격 비교하고 동선 짜고 귀찮고 힘들다. 아이들은 또 어떤가. 내 맘 같지 않게 비협조적인 아이들의 반응에 속상한 순간들도 많다. 그럼에도 여행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부딪히고 넘어지며 최선을 찾는 일. 낯선 곳에서 당황하면서도 살길을 찾는 일. 서로의 모자람을 시시각각 목도하며 이해하는 일. 이 모든 일들이 퍼즐 맞추듯이 여행 내내 얼기설기 끼워지고 다녀와서 보면 퍽 아름다운 그림이 되니까. 힘들고 지친 어느 날 그림을 꺼내보면 그때 그 순간 고되었던 일은 기억너머로 증발해 버리고 내게 필요한 뜨끈한 마음들만 남으니까.


이번 여행도 그랬다. 3월 새 학기로 분주한 어느 날, 재빨리 점심을 먹기 위해 음식이 빨리 나오기로 소문난 일본 라멘집에 들어서자 지난달 여행이 떠올랐다.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 초단위로 스스로를 재촉하던 나는 희미해지고, 여행지에서의 기억에 마음이 들떠 오른다. 주둥이가 길쭉한 핸드 드립용 주전자로 물을 얇게 부으면 코 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원두향과 함께 커피빵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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