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Nov 23. 2022

아이는 언제나 동기부여

어쩌다 미국에 살게 된 한국 남자 (ep. 7)

대학원 입학 후 첫 번째 시험기간에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날아가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마무리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딱 열흘이 걸렸다. 그리고 곧바로 학교로 돌아가 못 봤던 시험을 치르고 바쁜 나날이 계속됐다. 뒤쳐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일상으로 복귀했다기보단 잠시라도 엄마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쉴 틈 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아끼던 사람을 잃은 슬픔은 조금의 틈만 보여도 비집고 들어와 나를 아프게 했다. 만약 내가 병에 걸려 아팠다면 엄마는 끝까지 내 곁을 지켰을 텐데. 효도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넘어 나를 위해서 이미 많은 걸 바쳤고 또 모든 걸 바쳤을 사람을 위해 내가 해준 게 너무 없다는 죄책감이 컸다. 그럴수록 나는 슬픔에 빠지지 않기 위해 더욱더 무언가에 열중했다. 피하면 피할수록 슬픔엔 이자가 붙어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점점 덩치를 불려 갔다.


몇 달이 지나자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울증 같은 건 나약한 사람들의 변명 정도로 여기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먼저 앞날보다 지난날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지난날도 좋았던 일보단 나빴던 일들의 비중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생각할 의욕조차 없어졌다. 무언가에 열중해서 슬픔을 돌파하겠다는 내 접근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돼버렸던 것이다. 삶의 변화가 필요했다.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이 커다란 슬픔을 녹여버릴 큰 변화.


아이를 갖는 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건 아이를 갖는 게 선택일 때의 문제고 나의 경우엔 필요의 문제에 가까웠다. 자식을 낳으면 시들어 버린 내 삶에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돌아가신 엄마에게 손주를 선물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위로가 되는 듯했다. 그때는 졸업까지 두 학기 남은 시점이었고, 취업이 어떻게 될지도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와이프의 외벌이로 방 한 칸짜리 월세집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와중에 아이를 갖는 건 누가 봐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필요했다. 내가 엄마에게 베풀지 못한 사랑을 쏟아줄 그녀의 손주를 하루빨리 만나고 싶었다.


와이프는 입덧도 없었고 임신기간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적어도 배가 불러오기까진. 임신 중반에 들어서 의사는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낮은 확률이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출산 결정을 바꾸기엔 늦은 때였기 때문에 추가 검사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을 접어둔 채 출산예정일은 빠르게 다가왔다. 4월의 어느 날, 첫째 딸이 태어난 그날을 내 삶에서 가장 절망적인 날로 기억한다. 의사는 아이의 손금을 펴 보이며 다운증후군의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일자로 연결된 처음 보는 손금이었다. 의사는 유독 벌어진 아이의 엄지발가락도 가리켰다. 유전자 검사가 필요하다며 검사 결과를 받아보기까지 최대 일주일이 걸릴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그때 나는 바로 다음 달에 예정된 졸업을 앞두고 한창 면접을 보던 중이었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던 의지가 한순간에 꺾이고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는 태어났기 때문에 와이프와 나는 다운증후군에 대해 알아보며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의논을 시작했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내 엄마를 닮았다

며칠 뒤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내 삶에서 가장 다행스러운 소식이었다. 첫째 딸은 그냥 특이한 손금과 발가락을 갖고 태어난 아이였다. 아이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벌써 내 삶에 큰 기복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게 내가 필요로 했던 변화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를 안고 집에 돌아오자 내 삶이 영원히 바뀌어 버렸음을 직감했다. 할 줄 아는 게 우는 것뿐인 갓난아기는 내가 집중해서 면접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이를 챙기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무언가에 열중해 우울감을 벗어나겠다는 접근법이 다른 의미로 옳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졸업이 불과 몇 주 앞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여전히 전화면접과 코딩테스트만 보고 있었다. 그나마도 중요한 관문에서 고배를 마시며 현장면접은 한 번도 못 간 암담한 상태였다. 와이프가 임신 소식을 전했을 당시 나는 지금쯤이면 이미 어느 한 곳 정도는 채용이 확정되어 있을 줄 알았다 — 솔직히 두 세 곳 중 어딜 갈지 고민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던 중 졸업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극적으로 현장면접 기회를 갖게 됐고, 이제는 내가 가족을 먹여 살릴 차례란 생각으로 면접에 임한 결과 취업에 성공했다.

이전 06화 나는 이십 대에 고아가 됐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