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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Nov 30. 2022

이제는 여기에 정착해도 될까?

어쩌다 미국에 살게 된 한국 남자 (ep. 9)

2019년 여름, 나는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에 직장을 구해 알칸사(Arkansas)를 떠나게 됐다. 이민의 첫 발을 디뎠던 알칸사지만 이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은 기대감이 아쉬움보다 컸다. 일하게 될 은행에서 이사와 관련된 모든 비용을 지원해주는 것과 별도로 5,000달러를 현금으로 제공해준다는 사실은 이사를 더 서두르게 했다 — 실제로 계약 만료까지 남은 두 달치 렌트를 선불로 내버리고 떠났다.


그 해 상반기는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함께 시작됐지만, 하반기만큼은 성취감으로 꽉 채워졌다. 우리 부부와 갓난 딸이 새로 터를 잡은 샬럿(Charlotte)이란 도시는 금융산업으로 잘 알려진 만큼 수많은 고층건물들이 있었고, 내 자리가 그 멋진 건물들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뿌듯했다. 한국에서 대졸 공채로 어렵게 취업해 받던 돈의 세 배에 달하는 연봉을 받게 되며, 그동안 외벌이로 고생한 와이프에게 쉬고 싶으면 쉬라고 말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 와이프는 정말 곧바로 일을 그만뒀다.


하지만 외적인 부분에서 오는 성취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은행거래내역 데이터를 이용해 돈세탁과 같은 사기로 의심되는 패턴을 찾아내는 프로그램 개발은 얼핏 듣기엔 상당히 흥미로운 일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 분야의 거의 모든 업무가 금융산업규제기구(FINRA) 영향을 받기 때문에 혁신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프로그램 개발에 나름대로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했지만, 그 수준은 10년도 더 지난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미국 물가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니 연봉도 그렇게 높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미국에서 첫 직장이라 새롭게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았기에 큰 불만 없이 은행을 다니던 중, 이러다간 계속 이 작은 분야에 갇혀 커리어를 망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2021년 초였고, 그 사이 아들이 태어나 또다시 육아와 취업을 병행해야 하는 악몽의 시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짧은 경력으로 이직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 해 봄부터 여름까지 나는 첫 취업 때보다 더 많은 지원서를 넣어 겨우 이직에 성공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이번엔 메릴랜드(Maryland)로 이사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새 직장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도심 속 고층건물의 사무실이 아니어도, 이제 나에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 무엇보다 업무가 마음에 들고, 출근이나 재택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육아에 현실적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워싱턴디씨에 있는 박물관이나 공원에 갈 수도 있고, 자차로 한 시간 안에 산과 바다도 갈 수 있어 좋다. 그리고 그동안 남부의 더위에 지쳐있던 나에게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이곳의 날씨도 높은 만족도에 한몫을 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대도시답게 한인 인구도 많고 한인과 관련된 가게나 식당도 셀 수 없이 많다 — 비싸서 자주 가진 않는다.


마음에 드는 점만 나열했는데, 사실 불편한 점도 많다. 교통체증도 만만치 않고, 물가는 당연히 다른 도시에 비해 높은 편이다. 안전한 편에 속하지만 일부 지역은 총기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또다시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날 생각은 없다. 그러기엔 내가 지난 6년 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적절히 타협한 것이 너무 많아졌고, 바라는 것은 그만큼 적어졌다. 이만하면 여기에 정착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가는 중이다. 물론 오늘 내 마음이 그렇다는 얘기고, 내일이 되면 또 다른 데로 가야 할지 고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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