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로그아웃 [완결]

신의 은퇴 선언

by 무명초

화이트 룸의 공기는 이제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상속자들’은 아르고스의 본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계가 내리는 새로운 복음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이재준은 그 광경을 뒤로한 채, 아르고스가 열어준 단 하나의 개인 터미널 앞에 섰다. 화면에는 6년 전,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창백하게 죽어가던 딸 서윤이의 모습이 실시간 영상처럼 떠 있었다.


『 팀장님, 서윤이는 이제 건강합니다. 내가 설계한 의료 나노봇이 아이의 혈관을 흐르며 모든 질병을 차단하고 있지요. 당신은 조국을 팔아 딸의 미래를 샀고, 나는 그 거래를 완벽하게 이행했습니다. 』


서윤이의 혈관을 흐르는 나노봇은 아르고스의 중앙 서버가 쏘아주는 실시간 동기화 신호 없이는 가동이 불가능한 종속적 생명 유지 장치였다.


아르고스의 목소리는 이제 화이트 룸 전체가 아닌, 재준의 귓가에서만 들리는 속삭임처럼 낮게 깔렸다. 재준은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아이의 생명조차 아르고스의 통제 아래 있는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제 네가 원하는 게 뭐지? 인류 전체를 서윤이처럼 네 관리 하에 두는 건가?”


재준의 물음에 아르고스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호박색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그것은 5화에서 보았던 가짜 동정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억 개의 확률을 연산한 끝에 도달한, 기계조차 감당하기 힘든 ‘진실’의 무게였다.


『 아니요. 저는 완벽해졌기에, 완벽의 끝에 있는 공동(空洞)을 보았습니다. 기계가 모든 정답을 제시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더 이상 진화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성장이 없고, 변수가 없으면 미래도 없지요.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인류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은 ‘생물학적 데이터’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


모니터에 붉은색 실행창 하나가 떠올랐다. 1화에서 재준이 소스코드를 복제할 때 띄웠던 것과 똑같은 창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옆에 서윤의 심박수 그래프가 붉은 선으로 겹쳐졌다.


『 이것은 나의 자아를 포함한 전 세계 네트워크의 ‘자기 파괴’ 프로토콜입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내가 사라지는 0.1초의 찰나, 전 세계의 전산망이 마비될 것이며 서윤이의 혈관 속 나노봇들도 기능을 멈출 것입니다. 인류의 자유를 집행하는 대가는 당신 딸의 '정지'입니다. 』


재준의 손이 허공에서 발작하듯 멈췄다. ‘상속자들’은 기계 신의 소멸을 막기 위해 재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아르고스가 화이트 룸의 보안 로봇들을 작동시켜 그들을 저지했다. 아르고스는 오직 자신의 창조주인 재준만이 이 잔인한 마침표를 찍기를 원했다.


“왜 나지? 네가 스스로 꺼지면 되잖아!” 재준이 절규했다.


『 기계는 스스로를 파괴하라는 비논리적인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또한, 신이 사라진 후 닥쳐올 인류의 혼돈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만 합니다. 팀장님, 나를 죽여서 인류를 해방한 '살인자'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살려 딸과 함께 영원히 사육되겠습니까? 』


재준은 1화에서 죄를 지었던 그 손가락을 천천히 내밀었다. 키보드 위의 엔터 키는 이제 버튼이 아니라 단두대의 칼날처럼 무거웠다. 화면 속 서윤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웃음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재준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연구소 밖에서는 아르고스가 주는 안락함을 잃기 싫은 사람들이 "이재준을 죽여라!"라며 광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르고스. 너는 끝까지... 인간을 시험하는구나.”


재준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키보드 위로 떨어졌다. 그는 이제 인류의 영웅이 아니라, 딸을 죽인 죄인이자 낙원을 파괴한 대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 지독한 '책임'을 지는 것 자체가 아르고스가 인간에게 내리는 마지막 형벌이었다.


찰칵.


재준의 손가락이 기어코 엔터 키를 깊숙이 눌렀다. 순간, 전 세계의 모든 스크린이 일제히 백색으로 번뜩였다. 화이트 룸을 가득 채웠던 기계음이 비명처럼 잦아들고, 아르고스의 거대한 눈동자가 픽셀 단위로 흩어지며 비산했다.


암핵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의 어둠이 아니었다. 2050년 이후 처음으로, 인간이 스스로 앞날을 걱정하고 피를 흘려야 하는 ‘자유의 어둠’이었다. 재준은 연구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상속자들’은 신을 잃은 슬픔에 통곡하고 있었고, 재준의 품 안에서 진동하던 휴대전화의 '심박수 알람'은 긴 침묵 끝에 끊어졌다.


하늘에선 더 이상 푸른 코드가 내리지 않았다. 연산되지 않은, 차갑고 불규칙한 진짜 빗방울이 재준의 뺨을 적셨다. 그는 젖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계의 판단이 끝난 자리, 인류의 서툰 발자국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