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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May 28. 2023

성공한 삶의 세 가지 방정식

<피프티피프티, 양희종, 그리고 쓰리소사이어티스 인터뷰 후기>


 지난달에는 세 차례 인터뷰 콘텐츠를 <엠빅뉴스>에 실었다. (만난 분들 모두, 인터뷰어의 사심이 완벽히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저마다 다른 취지로 인터뷰를 요청드렸지만 그들에게는 '다르지만 같은' 삶의 공통분모가 감지됐다. 성공이라면 성공, 숙성이라면 숙성일 그들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기록해둔다.




1. 도정한 쓰리소사이어티스 대표 & 앤드류 샌드 디스틸러 



 30년 넘게 끊긴 국산 위스키가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증류소 두 곳에서나. 두 곳 모두 대기업이 아니다. 위스키를 사랑하는 개인이 소규모 증류소를 차리고 양조를 시작한 거다. 그중 내가 인터뷰한 사람은 최근 한국 최초 싱글몰트 위스키 ‘기원’을 출시한 쓰리소사이어티스의 도정한 대표와 앤드류 샌드 디스틸러(위스키 제조사)였다. 위스키 러버로서 사심을 가득 안고 인터뷰를 요청드렸다.

 재미교포인 대표와 스코틀랜드 출신 디스틸러, 그리고 한국인 직원으로 구성된 팀이라서 회사 이름이 ‘쓰리소사이어티스’라고 한다. 개인보다 팀 전체의 균형을 내세운 회사 이름에서 이미 그들의 철학과 우선순위가 감지됐다. 정말이지 멋진 이름 아닌가!


 그간 한국이 위스키를 생산하지 않은 이유는 큰 연교차 탓이 컸다. 위스키를 만들어 오크통에 넣어놓으면 기후가 워낙 더웠다 추웠다 해서 증발하는 양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연식이 오래될수록 값이 비싸지는 위스키 시장을 고려할 때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달랐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가 위스키를 만들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위스키 왕국’ 스코틀랜드에 비해 숙성기간이 서너 배 짧아지기 때문이란다. 물론 오크통 밖으로 증발해 버리는 양도 더 많지만, 그만큼 짧은 기간 내에 고품격의 위스키를 만들면 된다는 게 그들의 역발상이다. 한국에서 3~4년만 숙성을 거치면 스코틀랜드의 여느 12년 산 위스키의 풍미가 나니, 굳이 연식을 오래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대만의 ‘카발란’ 위스키가 좋은 선례다. (카발란은 연식이 표시되지 않은 위스키로 신선한 충격을 줬다.)  쓰리소사이어티스에서 내놓은 국내 첫 싱글몰트 '기원'을 시음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3년 산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맛과 향이 났다.

 위스키 불모지에서의 새로운 도전. 두려울 법도 한데 도정한 대표는 성공 가능성을 '110%'라고 자신했다. 사업가의 허세로 치부하기엔 그 말을 할 때의 그의 눈빛이 나보다 나이 든 아저씨가 맞나 싶을 만큼 또롱또롱 빛났다. (아침부터 취재를 빙자해 위스키를 다섯 잔이나 마셔서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단단한 눈빛과 어조에 내가 빠져들었음을 부인하긴 어려웠다. 취재가 끝난 뒤 나는 쓰리소사이어티스의 채용공고 페이지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니.


인터뷰 영상을 보려면 클릭.




2. 농구선수 양희종



 그와 나는 같은 대학을 같은 시기에 다녔다. 나는 그를 알았지만 그는 나를 몰랐다. 당연했다. 그는 우리 대학뿐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 전체를 대표하는 간판슈터였으니까. 모두의 예상대로 그는 드래프트 1라운드로 화려하게 프로에 입성했다.

 그 후로 한참이 지나 얼마 전, 그의 은퇴 소식을 들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의 지난 기록을 찾아봤다. 프로는 보통 기록으로 남으니까. 그런데 조금 놀랐다. 열여섯 시즌 통산 평균득점이 고작 6점. 게다가 단 한 번도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을 해본 적이 없더라. 심지어 경기 내내 뛰었는데 0 득점 0 어시스트를 기록해 '기록지에 쓸 게 없다'는 의미의 '양무록'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기록만 놓고 보면 그리 주목할 것 없는 프로생활을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평생 몸 담은 팀에서는 그에게 화려한 은퇴식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스포츠 스타에겐 명예의 최정점인 등번호 영구결번까지 해주었다. 팀 창단 이래 최초였다. 왜일까? 그 궁금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양희종은 프로에서 ‘수비 전문 선수’가 되어 있었다. 상대 에이스를 막고, 허슬 플레이를 펼치고, 동료들이 화려한 역할을 도맡을 때 모두가 꺼리는 역할을 알아서 맡았다. 그래서 정작 찬스가 자신에게 와도 슛 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그는 고백했다. 한때는 대학 최고의 슈터였지만 프로에 와서는 스타로서의 욕심을 버리고 기꺼이 진흙투성이 조연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그리고 줄곧 한 팀(안양KGC)에서만 뛰었다. 무려 열다섯 시즌이나.

 그는 스타로 돋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팀은 세 번이나 우승했다. 한 경기에 몇 점 못 넣는 선수였지만 팀 첫 우승의 마지막 위닝샷은 그의 몫이었다. 국가대표로 나선 아시안게임에서도 결승에서 상대국가 에이스를 꽁꽁 묶었을뿐더러 결정적인 동점골과 역전자유투를 성공시켰다. 그 경기에서 그의 유일한 득점이었을 것이다. 말년에는 소속팀 캡틴으로 동료들을 이끌었다. 슬램덩크로 치자면 서태웅 같은 외모에, 강백호 같은 플레이를 펼치면서, 채치수처럼 팀을 이끈 셈이다.

 ‘언성(unsung) 히어로’였던 농구 인생의 마지막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 그를 인터뷰하면서, 나는 가장 멋진 삶이 뭘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래서였는지 인터뷰 말미에 인생관을 덜컥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간명했다.

"별 거 없어요.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 하자’ 예요."


인터뷰 영상을 보려면 클릭




3. 피프티피프티 & 안성일 프로듀서



 대형 연예기획사 소속이 아닌데도 데뷔 4개월 만에 미국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하며 ‘중소돌 신화’을 일궈낸 걸그룹 <피프티피프티>. 네 명의 멤버를 두 시간에 걸쳐 인터뷰했다. 왜 인터뷰하고 싶은지, 왜 우리와 인터뷰해야 하는지 구구절절 써서 메일을 보냈고 운 좋게도 국내 방송사와의 최초 인터뷰를 독점할 수 있었다. 데뷔 후 첫 방송사 인터뷰였음에도 그들은 짜이거나 정해진 생각이 아닌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술술 조리 있게 풀어냈다. 스무 살 안팎의 네 사람이 서로를 배려하고 타인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가면서 대화하는데, 대화법을 망각한 수많은 어른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었다. 아이돌에 대한 내 알량한 편견을 확 깨 주었다고 해야 할까. 더군다나 음악 얘기를 할 때는 네 사람의 눈이 하나같이 반짝반짝 빛났다. 괜히 뜬 게 아니었다는, 이 그룹 오래갈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키나, 새나, 시오, 아란 네 분 모두 내가 다신 인터뷰할 수 없을 만큼 훨훨 날아가기를.


 피프티피프티를 기획한 안성일 프로듀서도 며칠 뒤 따로 만나 인터뷰했다. ’제2의 방시혁‘으로 주목받기도 하는 그는 작은 규모의 신생 연예기획사에서 선보인 아이돌이 어떻게 빌보드에 오를 수 있었는지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또 국내의 치열한 아이돌 생태계를 벗어나 해외에서 먼저 유명세를 얻기 위해 어떻게 팀을 꾸렸는지, 그리고 멤버 선발부터 곡 선정까지 어떤 철학을 지켜왔는지 가감 없이 말해주었다. 회사와 프로듀서, 가수들까지 명확한 방향성을 공유하고 똘똘 뭉쳤기에 그런 기적이 가능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터뷰 내내 자신을 낮추고 ‘음악’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그의 몸에 밴 겸손에 감탄했다.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지금쯤 잔뜩 취해서 자신감 넘치는 확언을 쏟아붓기 바빴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벌써 20년 가까이 음악계에 몸 담은, 업계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사람이었다. 1세대 아이돌인 베이비복스와 제이워크, 은지원 등의 프로듀서였다가 이후 방향을 틀어 음악 저작권 쪽에서 오래 일해왔다고 한다. <피프티피프티> 첫 앨범은 프로듀서로서 그의 복귀 작품이었던 셈이다. 대박과 쪽박, 산전수전을 다 겪어봤을 사람만의 단단한 겸손이었으리라.

 앞으로 갈 길이 먼 그룹이기에 좋은 날도 다치는 날도 번갈아 오겠지만, 불리한 토양을 뚫고 나와 갓 움트기 시작한 싹이 그 어떤 이유로든 쉽게 짓밟히지 않고 잘 자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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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는 기자라는 직업의 가장 큰 특권이다. 돈 주고도 못 만날 사람들을 언론이라는 영향력을 입고 '나'라는 개인이 대표해서 만나는 셈이니까. 그래서인지 인터뷰 기사 혹은 콘텐츠를 완성하고 나면 다른 작업물보다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 콘텐츠를 낸 게 후회되지 않도록 내 인터뷰이들이 지속적으로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선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에 부끄럽지 않게 내가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도 동시에 인다. 어쨌거나 우쭐함과 겸손함이 동시에 쌓이는 드문 경험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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