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호와 채진원의 '공화주의' 논쟁 비판적 독해

Memo.

by 남재준

A. 정상호. (2024). 한국의 보수·중도의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서 공화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향과 전망, 120, 166-199.

- 공화주의 담론의 분출 배경) 헌법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관심. 87년 헌법의 공화주의적 해석. 개념으로서의 공화국/공화에서 원리로서의 공화주의로. 공화 개념의 동양적 연원. 최근에는 진보-보수의 극단적 정치를 넘는 대안 패러다임으로서 주목.

- 한국 공화주의 담론의 특징) 이승만, 박정희 등 당대에 자처한 바 없는 이를 후대의 해석을 통한 공화주의자화. 또 최근 공화주의를 내세운 이들은 자기 스스로 공화주의자를 자처 ; 김무성, 유승민, 박형준, 안철수 등. 이는 중도와 중산층에의 주목이라는 점에서 중요. 이를 ‘처방적 공화주의’로 규정 가능. 한국의 공화주의는 이념적 응급처방에 가까움. 박근혜 탄핵 이후 보수혁신의 내용으로서의 공화주의.

- ‘처방적 공화주의’의 문제)

1. 시민참여의 제한 ;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구분점은 시민참여. 하이에크, 슘페터, 립셋, 달. 정치과정의 일반적 작동과 다원주의. 그러나 공화주의에서의 시민적 덕성은 공동체에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자유주의), 다수의 지배(민주주의)와의 차이. 그러나 처방적 공화주의에서 시민참여는 선하고 1차적인 것에 한정.

2. 기본소득이 공화주의에 반하는가? ; 비지배 자유의 경제적 실현이라 볼 수도.

3. 우편향적 중도주의 ; 사실상 진보 진영에 대한 표적(공화주의의 적)화 – 86세대 책임론, 노조 비난 등


B. 채진원. (2025). ‘중도적 공화주의’ 비판에 대한 반론. 동향과 전망, 124, 244-252.

- 정상호가 자신의 ‘진보적 공화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다른 옹호자들을 ‘보수적 공화주의, 우편향된 공화주의’로 몰고 가는 건 타당치 못함.

- 반론 1. 적극적 시민참여는 비지배 자유와 직결되지 않음. 자유주의의 소극적 자유와 공동체주의의 적극적 자유 사이 어딘가. 대의민주제를 통해 파벌이나 계급의 편향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 비지배 자유. 적극적 자유라는 미명하에 인위적 설계를 통해 자유 파괴한다는 이사야 벌린의 지적.

- 반론 2. 기본소득보다는 사적 소유의 공화적 명분으로의 제약이 더 타당. 기본소득은 일터에서의 공화적 자유 확보에 대한 대안 부재. 예컨대 노동자의 자주 기업, 노사협력 등 경제민주주의.

- 반론 3.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나 온전히 권력을 소수가 독점하는 과두정도 아니 되므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혼합정 지향. 민주정이 귀족정, 군주정보다는 나으나 자체로 완전하지 않음. 민주공화국의 자생적 발전을 막는 86의 교조주의 극복해야(유교적 교리주의처럼 이항대립적 세계관).


C. 나의 의견

- 결론) 공화주의 담론은 별 의미 없고, 현대사회변동 경향을 반영하지 못한 채 또다시 86세대의 정의론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 공화주의라는 개념적 외피를 빌려 싸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정말 중요한 건 정의와 정무적 담론(e.g. 86세대 or 보수 세력 극복)이 아니라 ‘실존과 지속가능성’과 정책 중심 정치이다. 인식론적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고는 한국정치사회의 폐단은 청산되지 않는다.

- 공화주의의 이해 : 공화주의는 정체로서 유의미한 것이지 원리로서는 의미 없음. 다시 말해 공화주의는 공화정 즉 군주나 귀족에게 주권이 귀속되지 않고 온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의사결정하는 국체. 다만 윤리적 태도로서는 약간의 의미를 더할 수 있다. 비지배 자유가 시사하는 바는결국 덕윤리, 시민적 미덕의 강조이다. 그러나 채진원의 말대로 이것이 반드시 적극적 시민참여로 직결되진 않음. 공화주의의 원류인 고대 지중해 세계에 비추어 볼 때, 그때는 시민적 덕성을 공유하는 고대 공동체라면 현재는 고도로 복잡화되고 기능적 분화가 이루어진 현대사회. 추상적 덕윤리의 부활은 윤리적 태도의 호명으로서만 유의미.

- 자유주의에 대한 몰이해 : 정상호는 자유주의를 협소하게 이해. 하이에크, 슘페터 등만이 아니라 롤스와 같은 사람들도 존재. 진보적 자유주의(내지 사회자유주의)에서는 사회정의, 복지국가, 시민참여를 나름대로 주장. 또 앞서 언급했듯 공화주의가 적극적 시민참여로 연결되는 것은 논리필연이 아니라 현대적, 진보적 재해석에 지나지 않으므로 정상호의 전제 즉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구분점이 시민참여라는 주장은 틀림. 채진원의 경우에도, 시민참여의 강도(e.g. 투표, 사회운동 등)에 따라 적극적/소극적 자유를 구분하는 듯 하다가 또 한편으로 본래의 의미인 혁신적 기획을 통한 사회정의와 해방으로서의 적극적 자유(자유의 조건의 개입을 통한 ‘진정한’ 자유의 보장)와 국가사회로부터의 불간섭의 권리인 소극적 자유의 구분을 쓰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

- 공화주의의 경제적 시사점? : 공화주의는 정체로서 유의미. 정치와 경제가 불가분이라는 점에서 공화주의가 경제와 무관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화주의가 어떤 경제관에서의 시사점을 가지는 건 아닌 듯. 기본소득이 공화주의에 연계되지 않는다는 채진원의 주장은 맞지만, 채진원이 주장하는 협력 생산 체제 같은 것도 딱히 공화주의와 무관. 그리고 이 점이 문제 – 시민의 삶과 무관한 담론 놀음. 공화주의는 그 의미가 무엇이건 현대사회의 핵심 문제들에 대해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려움. 오늘날 우리는 사회의 파편화와 고립 및 실존적 위기, 경제의 자동화와 시장경제체제의 근본적 위기, 사회보장과 재정의 지속가능성 등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지속가능성의 위기’를 맞고 있음. 이에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구체적 해결책을 시사할 수 있는 원리 또는 이념적 지표 마련’이 중요. 이 점에서 ‘추상적 시대 읽기와 정의론’이라는 지점에서 정상호와 채진원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음. 개념적으로 새로운 외피를 둘러썼을 뿐, 공허한 역사적 정체성 대립은 계속되고 있음. 정상호는 상대를 ‘보수 진영의 회생을 위한 공화주의 이용과 민주진보 진영에의 변형된 낙인찍기’로 규정하고, 채진원은 ‘86세대의 교조주의에 대해 정상적 중도 회복을 통한 대응’을 말함. 둘 중 어디에도 실질적으로 국민 삶과 사회경제적 전환기에 대한 대응 전략과 대책은 없음. 채진원이 이 기준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냥 기존 틀에서 중도우파 정도에 서서 중도화를 제창하는 식상한 수준. 정상호는 진보 진영이 시대를 읽지 못함을 보여줌. 2000년대-2010년대와 달리 지금은 참여의 내용과 질의 심각한 저하, 다양한 의견 표출이 자발적 수렴과 통합이 아닌 물고 물리는 끝없는 투쟁으로 귀결됨과 각자가 서로에 대해 가지는 피해 의식의 충돌, 실제 삶의 문제와 유리된 정의 담론과 구체적 설계의 타당성과 현실 인식의 정도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민주당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도, 피해 의식과 다양한 의견 표출을 말하면서 특정 계파가 압도적으로 다시 그 당이 정치사회를 압도적으로 장악하는 자기모순 등이 문제이다. 이러한 점들을 단 하나도 캐치 못하고 아직도 기울어진 운동장과 피해 의식, 시민참여와 사회운동에 대한 과도한 선의 부여, 공허한 정의론 등이 계속된다.

- 사회를 보수와 진보의 이분으로 나누고 자신을 어느 한쪽에 자연스럽게 귀속시키는 경향 자체가 보수주의, 자유주의 등을 편협하게 이해하게 만든다.

- 정상호는 공화주의를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정의(定義)’로 비약하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한 경향을 전체로 비약한다. 지식인들이 자기가 지지하는 생각을 본위로 가치중립성을 훼손하면서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주장을 설명처럼 하는 문제가 드러난다. 실제로 보수의 분파는 다양하며, 한국적 맥락에서의 보수는 우리 고유의 역사적 정체성이 코어로 작용하면서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는 진보도 마찬가지로, 서구의 진보 개념은 어떤 점에서 보수보다 더 다양하게 정의(우생학과 사회진화론에서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되며 우리나라 안에서도 민주당이 진보인가부터 시작해 보수보다 복잡한 논쟁이 많았다. 현실정치에선 이러한 맥락을 건너뛰고 과도한 비약과 이분법적 대립이 판치며, 정작 실질적 내용(대표적으로 정책)은 부실하다. 이를 학계에서 바로 잡지 않고서는 되려 그 흐름에 스스로 뛰어들어 확전시키는 양상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양극화 극복을 불가능하게 한다.

- 채진원이 한 일은 이념의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묻기보다는, 공화주의를 현 정파적 갈등에 끼워맞추기 위한 ‘이념적 패키지’로 사용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덕성의 회복은 좋지만 어떻게? 얇아진 중산층을 어떻게 회복시키고 정치적으로 유의미하게 모으는가? 공화주의에서의 시민적 덕성이 양극화, 극단화된 국가사회에서 적극적 시민참여가 아닌 어떤 대안을 줄 수 있나?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보다 못하다 볼 수도 있음. 자유주의는 ‘인간이 자기의 양질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국가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고 작동하며, 개인이 시민참여를 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강요할 일은 아니다.’ 등의 명확한 논리가 선다. 하지만 지금 채진원이 말하는 공화주의가 공동체에의 기여를 중요하게 보면서도 시민참여에 큰 관심을 두는 건 아니라면, 그가 말하는 ‘시민상’이 정확히 뭔지? 단순히 ‘거칠게 말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정도는 공화주의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결국 ‘교과서적 원론 호명의 반복’, ‘86세대 몰아내기’ 이상도 이하도 없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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