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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의 그림자

by 남킹


도시는 죽음과 생존이 질척하게 뒤엉켜 숨 쉬는 거대한 심연이었다. 한때 혈관처럼 생명력을 뿜어내던 도로는 이제 괴사한 조직처럼 균열과 폐허로 얼룩져 있었다. 아스팔트의 갈라진 상처 틈새로 끈질긴 잡초들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오래전 폭격으로 뒤틀린 가로등은 앙상하게 녹슨 뼈대만을 드러낸 채, 마치 시간을 잊은 망령처럼 쓸쓸히 서 있었다. 희미하고 병적인 달빛만이 깨진 유리 조각과 부식된 금속 표면에 내려앉아, 상처 입은 도시의 속살 위에 차갑고 축축한 은빛 막을 드리웠다. 바람은 폐허가 된 건물들의 빈 창문 사이를 낮고 음산하게 속삭이며 흘러 다녔다. 그것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미련이나 살아남은 자들의 한숨처럼 느껴졌다. 한때 현란한 빛깔로 행인들을 유혹했을 상점 간판들은 글자와 색이 바래고 찢겨, 이제는 그 이름조차 알아볼 수 없는 얼룩진 기억의 잔재일 뿐이었다. 외벽 곳곳에는 총탄이 남긴 흉터와 검은 그을음이 문신처럼 새겨져, 이 도시가 겪어낸 폭력의 역사를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좁고 뒤틀린 골목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으며 숨통을 조여왔다. 미로처럼 구불거리는 길 위에는 건물의 파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쓰레기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그 어두운 그림자 속에는 언제든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벽에는 오래전에 그려졌을 법한 빛바랜 낙서와, 이제는 그 의미마저 퇴색된 선전 포스터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으나, 이마저도 전쟁이 남긴 깊은 상흔 아래 짓눌려 신음하는 듯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구석에서는 녹슨 배관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리며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의 맥박처럼, 혹은 누군가의 눈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쥐 한 마리가 재빠르게 쓰레기 더미 속으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시야의 가장자리에 잠시 스쳤다. 그 작은 생명체의 필사적인 움직임 속에서도 이 도시의 생존 법칙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도로와 골목을 가르는 공기는 숨 막히도록 무거웠다. 타는 듯한 먼지와 매캐한 연기가 뒤섞인 냄새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고,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폭발음은 거대한 침묵 속에 불길한 파문을 일으키며 도시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 소리는 이제 일상의 일부였지만, 들을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한 서늘함을 동반했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듯 빠져나오자, 저 멀리 황량한 대로변에 작은 네온사인 하나가 마치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혹은 절망의 등불처럼 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 빛은 칠흑 같은 도시의 잿빛 공기 속에서 불안정하게 퍼져 나가며,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숨을 쉬는 듯했다. 거대한 어둠이 끊임없이 그 연약한 빛을 삼키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대로는 섬뜩할 정도로 넓고 황량했다. 한때 수많은 차량과 인파로 가득 찼을 그 공간은 이제 텅 비어, 바람만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바람은 텅 빈 도로를 휩쓸며 낮고 음울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냈고, 가끔씩 날아다니는 쓰레기 조각들이 그 바람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폐건물들은 마치 거인의 부러진 이빨처럼 기괴한 실루엣으로 서 있었고, 도로변의 가로등은 몇 개만이 간신히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 빛은 차갑고 생명력이 없어 주변의 어둠을 더욱 깊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목을 잔뜩 움츠리고 차갑고 건조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칼날 같은 바람은 맨살을 에는 듯 매서웠고, 낡은 내 옷자락을 조롱하듯 휘날리며 몸 안의 온기마저 빼앗아가는 듯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요한 대로에 나의 발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금지된 영역에 발을 들인 침입자의 흔적처럼 느껴졌고, 어딘가로부터 날아올지 모를 위협에 대한 경고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광고판에 가까워지자 네온사인 글자가 점차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빛깔은 오래되어 낡아빠진 적색과 희미하게 죽어가는 청록색의 불안한 조화였다. 그것은 희망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잊혀진 시대의 잔재가 발산하는 약간의 불안감과 기묘한 호기심을 동시에 자아냈다. 낡고 바랜 글씨체로 어딘가 촌스럽고 투박한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모든 것이 부서지고 사라진 이 세상에서는 그 조악함조차 기묘한 매력, 혹은 생존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낡은 나무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자, 예상했던 대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문을 밀어 열었을 때, 경첩이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이 공간을 지배하던 적막을 날카롭게 갈라놓으며, 내 등 뒤의 깊은 어둠 속으로 메아리처럼 스며들어 갔다.

문을 밀고 들어선 순간, 실내는 바깥의 냉랭하고 황량한 폐허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혼돈과 절망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낮게 내려앉은 천장 아래로는 자욱한 담배 연기가 층층이 떠다니며 희미한 조명을 더욱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고뇌와 한숨이 응축되어 형태를 갖춘 듯했다. 오래되어 긁히고 때 묻은 가구와 빛바랜 벽지는 공간 전체에 기묘한 시간의 무게감을 더했으며, 바닥은 무엇인지 모를 끈적이는 액체로 얼룩져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불쾌한 감각을 전했다. 방 한가운데와 구석구석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불규칙하게 모여 있었고, 그들의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비틀거리는 몸짓은 혼란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단조로운 절망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문가에 멈춰 서서, 이 낯선 공간의 탁한 공기를 폐 속으로 밀어 넣으며 분위기를 가늠했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각 테이블마다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그 모든 것은 취기와 망각에 물든 흐릿한 풍경의 일부로 녹아들어, 결국 하나의 거대한 소음 덩어리로 귀결되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작은 무대 위에서는 한 남자가 낡은 기타를 힘없이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느리고 애처로운 블루스 곡조 같았지만, 그마저도 사람들의 거친 대화와 폭소, 잔 부딪치는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음악은 마치 이 절망적인 공간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희미한 감성의 조각처럼, 위태롭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나는 홀 안쪽의 카운터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는 지독하게 무뚝뚝한 표정의 바텐더가 기계적으로 술잔을 닦고 있었다. 그의 텅 빈 듯한 눈빛에는 이 공간에서 수많은 밤과 낮을 보내며 무뎌진 사람 특유의 익숙함과 깊은 피로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비극을 목격하고도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 사람처럼.

“맥주 하나.” 나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주변의 소음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만 말했다. 바텐더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잠시 내 목소리의 방향을 가늠하는 듯 멈칫하더니, 말없이 선반에서 먼지 쌓인 병 하나를 꺼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뚜껑을 땄다. 그리고는 아무런 감정 없이 내 앞에 툭, 하고 밀어 놓았다. 병목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갈색 유리 표면을 따라 천천히, 마치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차갑게 식은 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하고 미지근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동안, 주변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밀레나가 왜 하필 이런 곳을 약속 장소로 정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싸구려 네온사인과 끈적이는 공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으로 가득 찬 이곳은 은밀한 만남을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고단하고 절망적인 삶에서 잠시 도피하려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을 지목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흐릿한 얼굴들 속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이 혼탁한 풍경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내가 길을 잘못 들었거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젠장, 이런 곳에서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을 것 같은데…’

맥주병과 함께 건네받은, 손바닥에 가볍게 얹힌 작은 플라스틱 컵에 담긴 눅눅한 땅콩 몇 알을 받아 들고, 나는 주변의 불필요한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홀 안쪽으로 더 깊숙이 발걸음을 옮겼다. 더 깊고, 더 어둡고, 어쩌면 더 은밀할지도 모를 곳을 찾아가는 동안, 발밑의 낡은 나무 바닥은 내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걸음마다 희미하게 삐걱거리는 신음 소리를 냈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전구 몇 개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은 공간의 윤곽만을 간신히 비출 뿐, 대부분의 영역은 짙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바깥의 칠흑 같은 어둠에 젖어든 창문은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두껍게 쌓인 먼지와 그을음으로 뒤덮인 유리창은 바깥세상을 비추기는커녕, 오히려 내부의 절망적인 풍경을 반사하며 까만 심연만을 품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마침내 홀의 가장 구석진 곳, 비교적 소음이 덜한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은 여전히 어둠과 자욱한 연기에 젖어 있었지만, 은밀함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소음과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뒤엉켜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낮은 조명 아래 흐릿한 실루엣으로만 보였고, 그들의 정체성마저 이 어둠 속에 녹아든 듯했다. 테이블 위로는 빈 맥주병과 싸구려 카드 게임의 흔적, 그리고 거칠고 외설적인 농담들이 뒤섞여 흘러넘치고 있었다. 내가 막 맥주병을 들어 두 번째 모금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쿵’하는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공간 전체를 울렸다.

홀은 순간적으로 가벼운 진동에 휩싸였다. 테이블 위의 술병들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벽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오래된 액자들이 아슬아슬하게 떨렸다. 그 소리는 단순히 무언가가 떨어진 충격음이라기에는 너무 깊고 불길했다. 어쩌면 근처 건물이 또 하나 무너져 내렸거나, 혹은 이 도시 어딘가에서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하던 말과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 속에는 마치 무언가가 더 일어날 것만 같은, 팽팽하고 불안한 긴장감이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숨 막히는 정적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마른 헛기침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색함을 깨려는 듯 서툰 농담을 던지며 자신의 잔을 높이 들었다. 곧이어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혹은 이런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는 듯, 다시 자신들의 대화와 웃음 속으로 돌아갔다. 소음과 취기 어린 대화는 마치 방금 전의 충격 따위는 자신들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태연하게 흘러갔다. 나는 주변의 무심한 반응을 말없이 살피며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잔잔한 탄산의 씁쓸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방금 전의 그 둔탁한 소리가 불길한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맥주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문득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까맣게 그을리고 먼지로 뒤덮인 유리창 너머로, 조금 전부터 희미하게 퍼지고 있던 붉은 기운이 갑작스럽게 강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붉은 화염이 밤하늘을 향해 게걸스럽게 솟구치며, 어둠 속에서 마치 거대한 핏빛 손이 허공을 움켜쥐려는 듯 격렬하게 일렁였다. 불길은 시커먼 연기를 끊임없이 토해내며 주변 건물의 그림자를 기괴하게 춤추게 했지만, 이 끔찍하고도 장엄한 광경은 나에게 더 이상 어떤 충격이나 공포를 주지 못했다. 나는 무심하게 눈길을 다시 홀 안으로 돌리며, 깊은 피로감만을 느꼈다. 이런 화염과 파괴의 장면은 이제 이 도시의 지긋지긋한 일상의 일부일 뿐이었다. 생존은 무뎌짐을 동반하는 법이니까.

주머니에서 낡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푸르스름한 액정 빛이 내 손가락 끝과 얼굴의 일부를 희미하게 비췄다. 그녀, 밀레나에게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지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낸 지 두 시간이 훌쩍 넘도록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단 하나의 단어도, 하다못해 간단한 확인의 표시조차 없는 이 완벽한 침묵은 나를 잠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걱정이 머리 한구석을 날카롭게 스쳤지만, 나는 곧 스스로를 다독였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려 했다.

‘늘 이런 식이었잖아. 이곳에선 흔한 일일 뿐이야.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자.’

이 망가진 도시에서는 누구든 예고 없이 소식이 끊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이 생존의 방식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속 어딘가에 차갑고 딱딱한 돌덩이 하나가 얹힌 듯한 묘한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녀에게 다시 한번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이 지나치게 많네요.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손가락은 액정 화면 위에서 평소보다 느리고 무겁게 움직였다. 몇 자 되지 않는 단어들을 조합해 보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불안하게 교차했다. 하나는 그녀가 아무 일 없이 곧 나타나리라는 막연한 믿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믿음을 여지없이 깨뜨릴지도 모를 불길한 조짐에 대한 깊은 불안이었다.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야 나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손바닥 위에 느껴지는 휴대폰의 차갑고 단단한 무게가 유난히 의식되었다. 창밖의 불길은 여전히 밤하늘을 배경으로 격렬하게 춤추고 있었고, 나는 홀 안의 끊이지 않는 소음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기타 선율과 함께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과연 올까. 그리고 그녀가 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나타날까.

맥주 두 병째를 거의 비워갈 무렵이었다. 잔잔하게 퍼지던 취기가 서서히 머릿속을 부드럽게 감싸며 현실 감각을 조금씩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차가운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빈 병 하나와 반쯤 비어 있는 땅콩 컵이 외롭게 놓여 있었고, 주변의 소음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배경음처럼, 의미 없는 웅얼거림으로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무심히 빈 병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그녀가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문득 입구 쪽 어둠 속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림자 하나가 느릿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밀레나였다.

그녀는 눈에 띄게 헬쓱해 보였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이번에는 화장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위에 깊은 피로와 불안의 그림자가 역력히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고, 입가에 억지로 걸치고 있는 희미한 미소는 마치 금방이라도 산산조각 날 듯한 얇은 유리처럼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 깊은 눈동자 안에는 초점을 잃은 듯한 멍한 공허함과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테이블을 향해 다가올 때마다, 나는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존재는 이 혼란스럽고 저속한 공간의 분위기와 명백한 부조화를 이루며,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이곳으로 잘못 걸어 들어온 이방인처럼 보였다. 그녀가 마침내 내 앞에 서서, 얕고 가쁘게 숨을 들이쉬는 모습은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보였지만, 그 말들은 차마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하고 그녀 안에서만 맴도는 듯했다.

“왔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병을 옆으로 밀어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 아님을 알아차리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게 살짝 떨리는 순간, 나는 문득 그녀가 이곳에 오기까지 겪었을 그 시간들과,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삼키고 있는 무언의 고통을 어렴풋이나마 직감할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나는 그녀의 상태를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표정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어떤 종류의 고통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확인해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내 시선을 피하며, 테이블의 얼룩진 표면을 내려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는 세상의 모든 무게가 담겨 있는 듯했다.

“아뇨,”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마치 준비된 대답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힘이 없었다.

“그냥... 요즘 들어 부쩍 불안감이 더 심해져서 그래요.”

그 말은 공중에 떠다니는 담배 연기처럼 명확한 실체가 잡히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깊은 피로와 지친 울림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며, 그녀가 더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혹은 그녀 안에 갇힌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별다른 일을 겪은 것은 아니고요?”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서듯, 목소리 톤을 낮추며 재차 물었다. 그녀는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테이블의 거친 가장자리를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냥… 그랬어요. 늘 있던 일들의 반복이죠. 다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옆집에 살던 개가… 죽었다는 것만 빼고요.” 그녀의 말 자체는 지극히 단조롭고 건조했지만, 문장의 끝에 붙은 어조에는 어딘가 무겁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개 한 마리의 죽음이 그녀를 이토록 지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문득 과거 그녀의 불평이 떠올라, 나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어 보려는 의도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개 말인가요? 그 시끄러운 녀석? 그건… 오히려 잘 된 거 아닌가요? 밤낮없이 시끄럽게 짖어댄다고 늘 투덜거렸잖아요, 당신.”

나의 가벼운 농담이 그녀의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날려버리기를 기대했지만, 그녀의 반응은 나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네, 그랬죠.”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희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입가에 머물렀다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손끝으로 테이블 표면을 신경질적으로 톡톡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고 하니…”

그녀의 말끝이 불분명하게 흐려졌다. 그녀의 눈에 아주 잠시, 찰나의 순간 동안 맺혔던 그 복잡한 감정은, 슬픔인지, 연민인지, 혹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인지, 그녀 자신조차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무언가를 깊숙이 품고 있는 듯했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폭격이라도 있었나요?”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시선을 창밖의 어둠으로 돌리며 마침내 답했다. 그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애써 감추려는 슬픔과 깊은 피로가 얇게, 그러나 분명하게 깔려 있었다.

“폭탄이었어요… 대인 지뢰 같은 거였겠죠.”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개들이 뭘 알겠어요. 그저 거리에 반짝이는 이상한 물체가 있으니 신기해서 입에 물고, 주인에게 칭찬받으려고 자랑스럽게 달려오다가 그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 테이블 주위로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나는 차마 다음 질문을 던질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겨우 입을 뗐다.

“그럼… 주인도 다쳤어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동작에는 어떤 분노나 체념 같은 것이 섞여 있는 듯했다.

“아뇨, 멀쩡해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안타까운 거예요.” 그녀는 입술을 비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 공허해서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뚱보년이… 얼굴이 절반쯤 날아가고 내장이 흘러내리는 개를 질질 끌고 와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군침을 흘리며 게걸스럽게 구워 먹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말문이 막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되물었다.

“자신이… 자신이 기르던 개를… 먹었다고요?”

“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 그리고 깊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뭐, 어느 정도 이해는 해요. 요즘 같은 세상에 신선한 고기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우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고, 마치 자신이 내뱉는 말의 잔혹함에 스스로 불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자기 개를… 그것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망설임 없이… 그렇게 즐겁게…”

그녀는 말을 끝맺으며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나는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더 이상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참혹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주인과 개 사이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희미한 온기나 애정의 마지막 흔적마저, 굶주림과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뒤틀린 기괴한 탐욕 속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이 도시의 잔혹함은 이미 익숙하다고 자조했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연민이나 금기의 선조차 아무렇지 않게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그리고 뼈아프게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앞에 놓여 있던, 내가 미처 다 마시지 못한 맥주병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들었다. 마치 끔찍한 기억이나 감정을 단숨에 씻어내려는 사람처럼,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병 주둥이를 입에 대고 망설임 없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맥주가 병목을 따라 거칠게 그녀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테이블 위로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녀의 가녀린 목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희미한 조명 아래 드러났다. 거의 비어버린 병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 그녀의 손길은 단호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필사적으로 무언가에 매달리려는 듯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어이쿠, 살살 마셔요!”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그녀를 말리듯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급하게 체하겠어요! 속 버릴라.”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힘없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의 끝자락에는 지독한 씁쓸함과 함께,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약간의 자포자기가 묻어 있었다.

“그냥… 그냥 좀 취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녀는 짧게 내뱉으며,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방금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참았던 눈물 때문인지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하게 반짝였고, 그 깊은 눈동자 속에는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과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시잖아요, 제 마음… 이런 날은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가늘게 떨렸지만, 그 안에 담긴 울림은 홀 안의 소음을 뚫고 공기 중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갈망하는 것은 단순한 술의 취기가 아니라, 이 도시가 가하는 끊임없는 잔혹함과 내면의 고통 속에서 찾아낸 가장 빠르고 확실한, 그러나 일시적일 뿐인 피난처처럼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마지막 남은 한계점에 다다른 사람이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붙잡으려 몸부림치는 위태로운 짐승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찾아든 호텔 방은 예상대로 좁고 누추했다. 벽지는 습기에 얼룩지고 곳곳이 찢겨 너덜거렸으며, 바닥 타일은 군데군데 깨지고 균열이 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깨진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든 밤의 찬 공기가 방 안을 감돌았다. 창문 너머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크고 둥근 달이, 마치 감시자의 눈처럼 창백하게 박혀 있었다. 그 서늘한 달빛은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었고, 낡은 침대와 작은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우리의 소지품들은 모두 깊은 그림자 속에 잠겨 형체만을 간신히 드러내고 있었다.

밀레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어딘가 불안한 듯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끼워진 담배 끝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불빛과, 그녀가 내뱉는 희뿌연 연기는 희미한 달빛 아래서 몽환적인 궤적을 그리며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 연기는 그녀의 가쁜 숨결과 뒤섞여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방 안을 채워갔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담배를, 다른 한 손으로는 낡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끊임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텅 빈 방 안을 메아리처럼 채우며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다. 때로는 다급하고 불안하게, 때로는 애써 차분함을 가장하며 지친 듯 들렸다. 아마도 멀리 있는 아들과의 통화일 것이다. 그 힘겨운 대화 사이사이,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 짧고 어색한 눈 맞춤 속에는 미안함과 어쩔 수 없다는 체념, 그리고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미안해요!” 그녀는 다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내뱉으며, 휴대폰을 쥔 손끝에 힘을 더 주었다. 마치 그 통화가 끝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는 듯이.

"아주 잠시만… 조금만 더 통화할게요. 금방 끝낼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 있었고, 그 말은 마치 이곳이 아닌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방 안의 무거운 고요함 속으로 힘없이 스며들었다.

그 순간, 이미 답답했던 작은 방 안의 공기는 더욱 숨 막히게 가라앉는 듯했고,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지친 표정과 나체의 연약함은, 역설적이게도 나와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을 세우며, 메울 수 없는 어떤 종류의 거리를 만들어 놓는 듯했다.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관용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아량을 베푸는 시늉을 했다. 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 누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그녀의 벌거벗은 등과, 작게 떨리는 어깨, 그리고 고개를 숙일 때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그녀의 작은 젖꼭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방 안은 그녀가 피우는 담배의 구수하면서도 씁쓸한 연기 냄새로 가득했고, 그 연기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연약하고 지친 모습은 내 안의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연민과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그녀의 최우선 순위는 늘 아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와이파이나 통신 신호가 간신히 잡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전화기를 귀에 붙들고 살았다. 나와의 육체적인 관계,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격렬한 정사는 늘 그 다음, 후순위였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 절망적인 도시에서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서로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온전히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녀의 통화가 끝나기를, 그녀의 마음이 잠시나마 아들의 안위에서 벗어나 이곳,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로 향하기를, 나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달빛 아래, 담배 연기 자욱한 이 누추한 방 안에서, 나는 그녀를 향한 강렬한 욕정과 함께,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에 대한 깊은 연민을 동시에 느끼며, 침묵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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