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여라,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 붓다의 유언 -
I. 진흙 속의 시간
제인은 긴 잠에서 깨어났다. 잠이라기보다는 의식의 표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무거운 혼미함이었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새벽빛은 희뿌연 먼지 입자들을 부유시키며 방 안에 차가운 푸른 기운을 드리웠다. 그 푸른색은 현실의 윤곽을 흐릿하게 지우고, 꿈과 생시의 경계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림자와 빛이 뒤엉킨 푸른 안개 속에서 그녀는 잠시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기억은 조각난 유리처럼 흩어져 발밑에 깔린 듯했고, 그 파편 위를 위태롭게 딛고 선 기분이었다.
창밖에서는 밤새도록 잠들지 않은 도시, 삼가타의 소음이 둔탁한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환락과 망각의 도시, 잠들지 않는 이들의 천국이자 지옥. 삼가타는 밤과 낮의 경계를 녹여버린 용광로처럼 뜨거운 욕망의 숨결을 내뿜었다. 새벽녘, 동이 트기 직전의 어스름 속에서도 클럽에서 터져 나오는 저음의 비트가 낡은 건물의 벽을 진동시키며 그녀의 방까지 침투했다. 눈을 감으면 밤새 약에 취한 이들의 공허한 웃음소리, 신경질적으로 부딪쳐 깨지는 유리잔 소리, 의미 없는 분노가 담긴 고함 소리가 뒤섞여 이명처럼 귓가를 어지럽혔다. 바깥의 요란한 광기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방 안에는 깊고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제인은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관절 마디마디가 녹슨 기계처럼 뻑뻑했다. 그녀는 허름한 방의 작은 창가로 다가갔다. 창틀에 쌓인 먼지가 새벽빛에 허옇게 드러났다. 창문을 통해 삼가타의 맨얼굴이 펼쳐졌다.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들이 새벽의 푸른빛 속에서 기괴하게 번쩍였고, 그 빛 아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림자들, 거리의 어두운 구석에서 은밀하게 무언가를 주고받는 인영들이 보였다. 새벽을 밝히는 인공의 빛들은 도시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듯 필사적으로 발광했지만, 오히려 그 빛 아래 모든 것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약과 춤과 섹스와 폭력. 그것이 삼가타를 구성하는 원소들이었다. 도시의 공기에는 늘 알코올과 싸구려 향수, 그리고 절망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만들어내는 현란한 빛의 장막 뒤에는 곪아 터진 상처 같은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겉은 아름다운 빛깔로 유혹하지만 속은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진 과일처럼, 삼가타는 껍질만 번지르르한 거대한 기만이었다. 제인은 아주 오래전에 이 도시의 민낯을 보았다. 화려함과 쾌락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깊은 절망과 영혼을 잠식하는 공허를. 그 공허는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自燈明 法燈明)
문득, 먼지 쌓인 기억의 서랍 속에서 그 문장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시간을 죽이기 위해 들렀던 낡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펼쳐 들었던 경전의 한 구절. 그 순간, 그녀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 같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 욕망의 아수라장인 삼가타의 한복판에서 그 빛은 너무나 희미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제인은 불행했다. 아니, 불행이라는 단어로는 그녀의 삶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다. 행복이란 감정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 같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장면은 아버지가 거실 소파에 누워 자신의 팔뚝에 주사 바늘을 꽂는 모습이었다. 고무줄로 팔뚝을 묶고, 핏줄을 찾아 바늘을 찌르던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 어머니는 늘 초점 없는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집의 사전에는 없었다. 오직 약물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환각과 그 뒤에 찾아오는 깊고 차가운 공허만이 집 안을 채웠다.
오빠 마이클은 살아있는 폭력 그 자체였다. 열세 살,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했을 때부터 그는 지역 갱단에 발을 들였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그는 세상에서 받은 모든 모멸과 분노를 가장 약한 존재인 그녀에게 쏟아냈다. 때로는 거친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고, 때로는 가죽 벨트가 채찍처럼 날아들었으며, 때로는 분노에 찬 주먹이 무자비하게 몸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작은 몸은 오빠의 분노가 새겨진 고통의 지도가 되어갔다.
열다섯, 그녀는 처음으로 세상의 잔인한 민낯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마이클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술과 약에 취해 있었고, 그녀를 장난감처럼 다뤘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돌아갔고, 마이클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담배를 피우며 문을 닫고 나갔다. 그날 밤, 제인은 처음으로 죽음을 갈망했다. 욕실에서 찾아낸 낡은 면도칼로 손목을 그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보며, 그녀는 텅 빈 욕조에 누워 얼룩진 푸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지옥이라면, 죽음의 두려움은 오히려 위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남았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이웃의 다급한 목소리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차가운 쇠 침대에 묶여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정신과 의사들이 오가며 질문을 던졌지만, 그들의 눈에는 진정한 관심이나 연민이 없었다.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녀는 그저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발생한 자살 시도 청소년’이라는 통계 수치 중 하나일 뿐이었다. 분석과 진단의 대상일 뿐, 고통받는 한 인간이 아니었다.
닥쳐오는 재앙은 요행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피할 수 없는 파도처럼, 그녀의 삶을 덮쳐왔다. 절대로.
열여섯, 그녀는 다시 한번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임신이었다. 마이클의 또 다른 친구, 그녀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의 아이였다. 그는 어설픈 미소와 함께 결혼을 약속했다. 이미 가출한 상태였던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돌아갈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아이는 태어났고, 딸이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리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희미하게나마 삶의 의미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번뇌 가운데서 증오가 가장 파괴적이다.’ 붓다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증오하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열일곱,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리사의 아버지는 이미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그의 약속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어머니에게 돌아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약물 과다복용으로 병원에 실려가 의식불명 상태였다. 한때 집이었던 곳은 낯선 사람들로 들끓었다. 약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사람들, 짙은 화장을 한 매춘부들, 은밀한 거래를 하는 상인들.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그 혼돈 속에서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기름진 머리카락과 탐욕스러운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딱해 보이는군. 내가 필요한 거 다 줄게. 잠잘 곳, 먹을 것."
그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는 그녀에게 작은 방과 최소한의 음식을 제공했다. 그 대가는 명확했다. 그의 집에서 매춘을 하는 것. 처음에는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갓난아기와 어린 딸의 굶주린 울음소리 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과 의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두 번째 딸, 에이미가 태어났고, 제인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의 한가운데로 완벽하게 추락했다.
"여기서 일하지 않으면, 너랑 네 새끼들은 당장 길바닥으로 나앉는 거야. 알아들어?"
그의 말은 더 이상 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고, 족쇄였다. 하루에 열두 시간, 때로는 그 이상, 그녀는 이름도 모르는 낯선 남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그저 껍데기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버텼다. 남자는 그녀에게 약을 권했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유혹은 너무나 강렬했다.
"이거 한 모금만 해봐. 잠깐이면 돼.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정말로, 아주 잠시나마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육체의 고통도, 영혼의 수치심도, 끝없는 절망도 희미해졌다. 그 자리에는 오직 텅 빈 공허만이 남았다. 약효가 떨어지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그 순간의 망각을 위해 그녀는 기꺼이 다시 약에 손을 댔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약, 더 강한 약이 필요했다. 몸은 망가져갔지만, 그녀가 벌어들인 돈은 모두 그 남자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녀는 완벽한 노예였다. 도망칠 곳도, 도망칠 힘도 없었다. 쇠사슬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영혼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열아홉 생일날,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그는 그녀의 어린 딸들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리사는 세 살, 에이미는 겨우 두 살이었다. 제인은 일을 마치고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순간,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굉음을 내며 부서져 내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부서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무언가가 마침내 깨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모성애가 뒤섞인 원초적인 힘이었다.
주사기와 약병이 어지럽게 널린 2층 침실에서, 그녀는 남자가 숨겨두었던 묵직한 매그넘 리볼버를 찾아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녀의 손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번, 두 번, 쉴 새 없이. 붓다가 열반에 든 지 수천 년이 흐른 어느 날, 탐욕과 폭력으로 얼룩진 한 남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지고 부서져 내렸다. 총성에 놀라 달려온 이웃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경찰들, 흰 옷을 입은 구급대원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제인은 피로 흥건한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 두 딸을 품에 꼭 안았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오직 지독한 공허함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예감이 교차했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전쟁과 그보다 더 참혹한 인간의 민낯을 목도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눈에는 종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조차.’
법정에서 그녀는 침묵했다. 국선 변호사가 선임되었지만, 그녀는 어떤 변명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겪어온 시간들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죄 평결은 이미 정해진 수순처럼 느껴졌다. 딸들은 낯선 위탁 가정으로 보내졌고, 그녀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차가운 쇠창살이 그녀의 세상을 다시 한번 가두었다.
저쪽 기슭, 피안(彼岸)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길은 이토록 멀고도 험난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해(苦海)의 바다였다.
II. 감옥, 빛을 향한 문
교도소에서의 첫해는 또 다른 형태의 지옥이었다.
감방은 좁고, 차갑고, 어두웠다. 쇠 냄새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절망의 냄새가 공기 중에 뒤섞여 있었다. 다른 재소자들은 그녀를 경계하거나 경멸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냉담함과 적의가 서려 있었다. 갑작스럽게 끊긴 약물은 혹독한 금단 증상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밤마다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과 함께 식은땀에 흠뻑 젖어 깨어났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끔찍한 환각과 망상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수감자들 중 다수는 폭력에 익숙했고, 약한 자를 먹잇감으로 삼았다. 제인은 몇 번이나 이유 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지옥 같은 어린 시절과 삼가타에서의 경험은 그녀 안에 생존 본능을 각인시켜 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더 이상 침묵하는 희생양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움츠러들었던 내면의 힘을 끌어모아 스스로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에 독기가 서리자, 함부로 건드리는 이들이 줄어들었다.
수감된 지 세 번째 해, 그녀는 교도소 도서관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낡고 빛바랜 책들이 가득한 그곳은 회색빛 교도소 안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깔을 가진 공간이었다. 책들은 처음에는 단지 지독한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비상구였다.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다른 삶을 살거나, 역사 속 인물들의 격정적인 삶을 엿보며 잠시나마 자신의 처지를 잊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책들은 단순한 도피처 이상의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특히 철학서와 종교 서적들이 그녀의 메마른 영혼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세상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 날, 무표정하지만 눈빛만은 따뜻했던 나이 든 도서관 사서가 그녀에게 얇고 낡은 책 한 권을 건넸다. 표지에는 한자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에 관한 책이에요?" 제인이 표지의 낯선 글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도 있겠지." 사서는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읽어보면 알게 될 게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공(空)’이라는 개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알 수 없는 말들의 향연. 형태가 공허이고 공허가 형태라니, 그것은 그녀가 경험해온 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끌림에 그녀는 밤마다 좁고 차가운 감방의 시멘트 바닥에 앉아,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 그 짧은 경전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눈으로 따라 읽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마치 마른 땅에 스며드는 물처럼, 그 불가사의한 말들이 조금씩 그녀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없음이요, 없음은 곧 모든 것이었다. 그 깨달음의 섬광이 처음 그녀의 내면을 비추었을 때, 그녀는 전율했다. 그녀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붙잡고 있던 모든 것 – 끔찍했던 기억, 증오, 수치심, 절망 – 이 사실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
수감 여섯 번째 해, 그녀는 교도소 내에서 열리는 불교 명상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회색 죄수복을 입은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낡은 강당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조용히 호흡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좀처럼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온갖 생각들이 들끓었다.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들, 끓어오르는 분노, 뼈아픈 후회, 딸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번갈아 그녀를 괴롭혔다. 마음은 마치 성난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러나 명상을 이끄는 자원봉사 스님의 차분한 안내에 따라 호흡에 집중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서, 아주 조금씩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들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스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은 강물 위를 떠내려가는 나뭇잎이나 티끌과 같은 것이지요. 그것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거나 밀어내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것들이 존재함을 알아차리고, 강물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놓아두세요."
제인은 배웠다. 생각을 붙잡지 않는 법을.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지 않는 법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현재의 호흡, 이 순간의 존재에 집중하는 법을. 명상은 그녀에게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찾는 길을 열어주었다.
열 번째 해가 되던 어느 날,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젊고 열정적인 눈빛을 가진 여성 변호사였다. 그녀는 제인의 사건 파일을 먼지 속에서 다시 꺼내 재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당신이 처했던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봤어요, 제인 씨." 변호사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년간 지속된 끔찍한 학대와 착취, 그리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 이것은 명백한 정당방위의 요건을 갖추고 있어요. 그동안 묻혀 있던 진실을 밝혀내야 합니다. 당신이 겪은 모든 학대와 착취는 제대로 기록되고 증명되어야 해요."
제인은 처음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녀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감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찾은 작은 평화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젊은 변호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매주 제인을 찾아와 사건의 진전 상황을 알리고, 그녀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당신의 두 딸이 증언하기로 했어요." 어느 날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사는 이제 열네 살, 에이미는 열세 살이에요. 놀랍게도, 그들은 그날 밤의 일을, 그리고 그 이전의 학대에 대해서도 상당히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인의 마음에 굳게 닫혀 있던 댐이 무너져 내렸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딸들이 살아있다는 것,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주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얼어붙었던 심장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그것은 고통의 눈물인 동시에 감사의 눈물이었다.
변호사는 제인의 기구한 삶과 그녀가 겪어야 했던 참혹한 현실을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언어로 엮어냈다. 법정에서, 감형 청문회에서, 그리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제인의 삶을 변호했다.
"재판장님, 그리고 주지사님. 제인이라는 이 여성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절망과 아픔, 슬픔과 고통을 한데 모아놓은 종합세트와 같았습니다. 그녀는 피해자였으며, 생존자였고, 필사적으로 아이들을 지키려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녀의 호소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감형이 승인되었고, 언론은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여론은 들끓었고, 여러 방송사에서 앞다투어 그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현대의 비극’, ‘뒤늦게 실현된 정의’, ‘지옥에서 피어난 생존자의 이야기’. 그녀는 하루아침에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담담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그녀는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머지않아 제인은 보다 개방적인 교정 시설인 토렌질 하바드로 이감되었다. 그곳은 일반 교도소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다양한 교육 및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학업에 매진하여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을 취득했다. 딸들과의 자유로운 면회가 허락되었고, 종교 활동과 도서관 출입에도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두 딸은 이제 십대 중반의 아름다운 소녀들로 성장해 있었다. 처음 다시 만났을 때는 오랜 시간의 벽 때문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하지만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들 사이의 얼음은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들은 매주 제인을 찾아왔고, 자신들의 학교생활, 친구들,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인은 딸들의 삶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기쁨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다. 리사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 기질이 있었고, 에이미는 논리적이고 탐구심 강한 과학도의 면모를 보였다. 다행히도 두 딸 모두 따뜻하고 안정적인 위탁 가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사실에 그녀는 깊이 감사했다.
"엄마가 우릴 구한 거예요." 어느 날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리사가 문득 뒤돌아서서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날 밤, 엄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제인은 말없이 다가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눈빛 속에서 깊은 이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 오고 갔다.
토렌질 하바드에서의 시간은 그녀에게 진정한 치유와 성장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전문적인 심리 상담을 받으며 과거의 깊은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극복해 나갔다. 약물 중독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명상은 그녀의 삶의 중심 기둥이 되었다. 매일 아침 동트기 전, 그녀는 시설 내 작은 정원에 마련된 조용한 공간에 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호흡에 집중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그녀는 진정한 자신과 만났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책은 여전히 낡고 손때 묻은 얄팍한 반야심경이었다. 도서관 책상에 앉아 그 책을 펼칠 때면, 그녀는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형태는 공허와 다르지 않고, 공허는 형태와 다르지 않다. 형태가 곧 공허요, 공허가 곧 형태다.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의식 또한 그러하다.
그 구절들을 낮은 소리로 암송할 때마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푸른 새벽빛처럼 스며드는 희망의 실오라기 속에서도, 과거의 온갖 고통과 상처가 굶주린 아귀처럼 달라붙어 그녀를 괴롭히려 할 때도, 그녀는 이 암송의 구절들 속에서 위안과 힘을 얻었다. 때로는 복받쳐 오르는 울음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정화와 해방의 눈물이었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없음(空)이요, 그 없음 속에서 모든 것은 연기(緣起)하여 존재한다.
괴로움(苦)이 곧 깨달음의 기쁨(樂)으로 이어지는 길이 될 수 있으며, 번뇌(煩惱)가 곧 열반(涅槃)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진리.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가 겪었던 그 모든 지옥 같은 고통과 슬픔은 그저 변화하고 흘러가는 구름과 같았다는 것을. 실체가 없기에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깊은 깨달음은 그녀에게 진정한 내면의 자유를 선사했다.
시간은 앎의 기쁨과 수행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밀고, 교도관의 허락 하에 작은 의식을 치르며 불교에 귀의했다. 교정 시설 내에서 자발적으로 불교 명상 모임을 이끌게 되었고, 그녀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거나 여전히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평화와 위안의 가르침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상의 지식을 탐구하는 동시에,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연민을 실천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변호사의 끊임없는 노력과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그녀의 형량은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무 해가 넘는 수감 생활 끝에, 그녀 나이 마흔하나에, 사회는 그녀에게 온전한 자유를 허락했다. 어디든지 자신의 의지로 갈 수 있는 자유. 그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III. 연꽃을 피우다
자유. 그 두 글자는 제인에게 설렘과 동시에 깊은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닫힌 공간에 익숙해져 버린 그녀에게, 갑자기 주어진 광활한 세상은 낯설고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출소하는 날, 교정 시설 정문 앞에는 훌쩍 자란 두 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사는 스물다섯의 재능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고, 에이미는 스물넷의 총명한 생물학 연구원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삶에서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엄마를 닮은 듯, 혹은 엄마의 고통을 자양분 삼은 듯 강인하게.
"이제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엄마?" 차에 오르자 에이미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염려와 기대가 섞여 있었다.
제인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세상은 너무나 제한적이었다. 폭력과 약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의 집, 착취와 굴욕으로 가득했던 남자의 집, 그리고 차갑고 단절된 교도소. 그 외의 세상은 그녀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지도 없이 들어선 광활한 사막과도 같았다.
"나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딸들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삼가타에 가보고 싶어."
딸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삼가타. 그 이름은 여전히 환락과 타락의 대명사였다. 약물, 매춘, 범죄가 들끓는 위험한 도시. 엄마가 가장 끔찍한 시간을 보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니.
"왜 하필… 그곳이에요, 엄마?" 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제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오랜 고통 끝에 얻은 평온함과 어떤 결의가 담겨 있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니까."
딸들은 그 말의 깊은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엄마의 결정에는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들은 엄마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제인은 출소 후 몇 주 동안 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다.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공원을 산책하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잃어버렸던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메워가는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혼자서 삼가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손에는 교도소에서 일하며 조금씩 모은 돈과 딸들이 건네준 용돈이 전부였다.
다시 찾은 삼가타는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그리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웠다. 도시는 마치 거대한 기계처럼 밤낮없이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네온사인이 요란하게 번쩍이는 거리마다 술집과 카지노, 정체를 알 수 없는 유흥업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리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약을 파는 자들의 은밀한 눈빛이 번뜩였고, 술과 약에 취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비틀거리며 밤거리를 헤맸다. 공기 중에는 여전히 싸구려 향수와 알코올, 그리고 깊은 절망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도시의 변두리, 낡고 허름한 아파트 단지의 꼭대기 층에 작은 방 하나를 얻었다. 방은 비좁고 낡았으며, 벽에는 얼룩이 가득했지만, 작은 창문 너머로 도시의 어지러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이면 그녀는 그 창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도시의 소음은 여전히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그녀의 내면을 흔들지 못했다. 소음은 그저 소음일 뿐, 그녀 안의 고요는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 몇 주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신경을 긁는 소음, 모든 것이 낯선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약물의 유혹. 그녀의 몸은 여전히 약물이 주었던 순간적인 망각과 쾌락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깊은 갈망이 때때로 스멀스멀 피어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길거리에서 약에 취한 사람들을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뛰고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제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 일어나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틈틈이 반야심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도시에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교 센터나 명상 모임을 찾아보았지만, 환락의 도시 삼가타에는 그런 영적인 안식처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작은 방 한구석에 조촐한 제단을 마련했다. 작은 붓다 상과 촛불 하나, 그리고 낡은 반야심경. 그것이 그녀만의 사원이었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전과 기록이 있는 중년 여성에게 세상은 여전히 차가웠다.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그녀의 이력서를 보자마자 싸늘하게 거절했다. 몇몇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의 과거에 대해 캐묻기도 했지만, 그것은 동정이나 이해가 아닌, 그저 자극적인 이야깃거리에 대한 관심일 뿐이었다.
몇 주간의 좌절 끝에, 그녀는 도시 외곽의 강변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서 겨우 일자리를 얻었다. 카페 주인은 말수가 적고 인자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일할 의지가 있는지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향긋한 커피를 내리고, 테이블을 닦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잔잔한 미소로 인사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는 도시의 또 다른 이면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시끄러운 음악 소리 뒤편에 가려진 그림자들. 거리 모퉁이에서 박스를 덮고 잠든 노숙자들, 약물 중독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젊은 영혼들, 삶의 벼랑 끝에서 매춘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여성들. 그들의 눈빛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보았다. 그들 모두 그녀처럼 삶의 깊은 어둠과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들을 향한 깊은 연민이 피어올랐다.
몇 달이 흐른 어느 비 오는 날 오후였다. 장마철의 시작을 알리는 듯 무거운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카페 일을 마치고 우산도 없이 운하를 따라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세찬 빗줄기가 그녀의 얇은 옷깃을 파고들었고, 바람이 휘몰아쳤다. 운하에는 물건을 싣고 다니는 낡은 상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배 안으로 사람들이 황급히 몸을 피했고, 잠시 거리는 텅 빈 듯 한산해졌다.
바로 그때, 그녀는 그것을 보았다. 흙탕물이 흐르는 시커먼 운하의 수면 위, 어지럽게 정박한 배들 사이의 비좁은 틈새에서, 기적처럼 피어난 한 송이 연꽃. 진흙탕 속에서 솟아올라 더럽혀지지 않고 고결하게 피어난 그 연꽃은 마치 환상처럼 보였다. 세찬 비에 젖은 연꽃잎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강렬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그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 앞에서 그녀는 숨을 멈췄다.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은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을 강하게 울렸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사랑과 연민이 그녀의 속에서 넘쳐흘렀다. 비로소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영혼 깊숙이 각인된 경전의 구절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허무와 고통조차도 그 무아(無我)의 빛 속에서 본래의 공(空)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 순간, 제인은 자신이 왜 이곳, 삼가타로 돌아왔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이 혼란스럽고 타락한 도시는 그녀의 진흙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이곳에서, 이 진흙 속에서 연꽃처럼 피어나야 했다. 자신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다른 이들의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 피어나야 했다.
그날 이후, 제인의 삶에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생겼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얽매이지 않았다. 카페에서 일하는 틈틈이 그녀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진심을 담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그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다. 때로는 자신이 명상을 통해 얻은 작은 평화와 위안의 가르침을 조심스럽게 나누기도 했다. 그녀의 따뜻한 눈빛과 차분한 목소리는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그녀 안에 넘쳐흐르는 사랑과 연민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강물과 같았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경전의 지혜는 세상의 허무함마저 끌어안는 무아의 빛으로 발현되었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붓다의 마지막 유언을 가슴 깊이 새기며, 질퍽거리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삼가타의 거리 곳곳에 연꽃 씨앗을 뿌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은 희망의 씨앗이었고, 자비의 씨앗이었다.
마흔세 살, 그녀는 카페에서 번 돈과 약간의 도움을 받아 똥오줌과 쓰레기로 가득한 도시의 가장 후미진 길모퉁이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했다. 그곳은 버려진 아이들의 임시 안식처가 되었고, 갈 곳 없는 미혼모들의 따뜻한 고향이 되었으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이 잠시나마 기댈 수 있는 위로의 공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작고 초라했지만, 그곳에는 조건 없는 사랑과 연민이 가득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어느 날,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은 익명의 선한 부자가 아무 조건 없이 큰 금액을 후원해왔다. 그 돈으로 그녀는 더 많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작은 공동체들이 삼가타의 어두운 구석구석에 연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소식은 바람을 타고 흘러 어느 양심적인 기자의 귀에 들어갔고,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삶과 활동에 대한 깊이 있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전국에 방영되었고, 큰 감동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제인은 이제 두 딸과 함께 전국을 돌며 강연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연꽃처럼 아름다운 쉼터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헌신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평화와 자비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어둠은 끈질겼다. 마흔다섯 되던 해, 다른 도시의 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해 시외버스에 올라탄 그녀는, 탐욕에 눈이 먼 강도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그녀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노리고 약을 탄 음료를 건넸다. 아무런 의심 없이 음료를 마신 그녀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강도들은 그녀의 가방에 든 적은 액수의 여행자 수표와 약간의 현금을 빼앗아 달아났고, 의식 없는 그녀를 인적이 드문 해안가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그녀의 몸은 차가운 밤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이 있은 지 2,5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여전히 세상은 고통과 무지로 가득했다.
하지만 슬퍼하지 말라, 아난다여. 탄식하지 말라.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 연꽃 또한 피고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제인이 뿌린 연꽃 씨앗들은 이미 세상 곳곳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비록 짧았지만, 그녀가 남긴 자비와 연민의 향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피안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 길 위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등불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