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영어유치원에 가고 싶다

언어는 문이 아니라 다리였다

by 남나아

네 살 아이와 마흔 살 아빠의 첫 번째 모험


아내가 건넨 '영어유치원 한번 알아볼까?'라는 말이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평화롭고 평범한 오후, 아이가 레고 블록을 쌓는 소리만 가득한 그 순간, 그 질문은 나의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 순간 아이의 교육에 대한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의 교육을 고민하는 부모의 대화치고는 너무나 무심한 반응이었다.


영어유치원이라니. 그저 집 앞 작은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뛰어노는 소박한 모습만 떠올렸던 나에게, 그것은 마치 다른 행성의 이야기처럼 낯설게만 들렸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아내의 질문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 걸어갈 길을 향한 조용하지만 단호한 결정선언이었다. 그제야 그 질문의 무게를 느꼈고, 그렇게 나는 네 살 아이의 조그만 손을 잡고, 마흔 살 아빠의 새로운 호기심을 품고, 낯선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문을 여는 순간, 무너지는 편견들


유치원의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내 예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곳은 내가 기억하는 좁고 답답한 교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두세 개 층을 쓰는 현대식 건물, 햇살 가득한 넓은 교실, 형형색색의 학습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교실마다 생동감 넘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유치원'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 아이들과 외국 국적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며, 서툴지만 자연스러운 영어로 친구를 부르고 있었다.


"Teacher, look at this!"


아이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달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없었다. 마치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영어가 아이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그 순간 문득 어릴 적 처음 광활한 바다를 본 날의 충격이 떠올랐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물결을 보며 느꼈던 전율이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풍경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그리고 내 아이가 그 풍경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어, 학습이 아닌 체화의 영역


아이들의 하루를 지켜보니, 그들에게 영어는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교실에서, 놀이터에서, 심지어 급식 시간에까지 영어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마치 공기처럼 말이다. 그들은 영어를 놀이처럼 즐겼고, 영어를 통해 세상을 경험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 아이가 밥투정을 하며 젓가락으로 밥알을 굴렸다. '아빠, 밥이 춤을 춰요!'라고 말하려던 아이가 갑자기 'Daddy, the rice is dancing!'이라고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영어가 아이에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체화된 또 다른 본능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한 아이가 친구와 다투었다. 장난감을 뺏었다 뺏겼다 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평범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이 모두 영어였다. "It's mine!", "No, I had it first!" 감정이 격해질수록 더욱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영어.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언어란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화되는 것임을. 화가 나고, 기쁘고, 슬플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언어구나. 이 아이들은 단순히 언어를 외운 것이 아니라, 감정과 경험을 통해 언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순간 나는 조금 질투가 났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영어를 배웠지만, 그것은 늘 '외국어'였다. 교실에 앉아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문법 규칙을 외우고, 시험을 위해 단어를 암기하는 것. 영어는 나에게 극복해야 할 가파른 산이었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강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영어는 그저 일상이었고, 놀이였고, 삶 그 자체였다. 마치 새들이 당연히 하늘을 나는 것처럼, 물고기들이 당연히 물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아빠도 영어유치원에 가고 싶다.' 농담 같지만 진심이었던 그 동경. 마흔 살이 되어서야 깨닫는 어린 시절의 아쉬움이었다. 단순히 영어 점수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자유로운 모습이 부러웠다.


언어 너머의 세계와 다중적 사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부러워했던 것은 단순히 영어 실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창(窓)이었다. 아이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며, 나는 그들이 단순히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를 호흡하고 있음을 느꼈다. 한국어로 생각할 때와 영어로 생각할 때, 같은 아이라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국어로는 수줍어하던 아이가 영어로는 더 적극적이 되고, 한국어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표현을 영어로 구사하기도 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고의 틀이었고,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이중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곧 이중적 사고의 가능성이 열리는 무한한 세계였다.


처음에 나는 영어를 하나의 관문처럼 생각했다. 그것을 통과해야만 더 넓은 세상에 갈 수 있는 문 같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언어는 문이 아니라 다리다.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 한국어라는 세계와 영어라는 세계, 그 두 세계를 오가며 아이들은 더 풍부한 사고를 하게 된다. 하나의 현상을 두 가지 언어로, 두 가지 문화적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중언어 교육의 가치다. 단순히 영어를 잘하는 것을 넘어, 세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유연한 사고력을 길러주는 것.


부모라는 이름의 협력자


아이의 성장을 보며 문득 부모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지식을 주입하는 교사일까, 아니면 길을 밝혀주는 등대일까. 그때 문득 장자(莊子)의 말이 떠올랐다. "자식이 똑똑해도 가르치지 않으면 현명하지 못하다."


얼마 전 아이가 공룡에 빠져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처음엔 단순히 장난감 공룡 몇 개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달랐다. 도서관에서 공룡 책을 빌려오고, 자연사박물관에 데려가서 실제 화석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아이의 눈이 달라졌다. 단순한 호기심이 진짜 배움으로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장난감 공룡은 그저 놀잇감이었지만, 박물관의 화석은 아이에게 시간여행의 문을 열어주었다. 부모란, 아이의 작은 불꽃같은 관심에 바람을 불어넣어 큰 불길로 키워주는 존재구나. 그런 깨달음이 왔다.


우리 집에서는 주로 아내가 교육의 방향을 정한다. 세심하고 치밀한 그녀는 늘 한 걸음 앞서 아이의 필요를 파악하고 준비한다. 나는 그 곁에서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아내의 열정이 때로 너무 빨라 아이가 따라오기 힘들어할 때, 나는 브레이크를 밟는다. 반대로 아이가 게으름을 피울 때는 살짝 등을 밀어준다.


아내가 준비한 영어 그림책을 읽다 아이가 지루해할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일부러 엉뚱한 동물 소리를 내거나,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며 아이의 웃음을 되찾아주었다. 아내가 계획한 '학습'은 잠시 멈췄지만, 그 순간 아이는 영어가 즐거운 '놀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학습과 놀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그것이 내가 맡은 첼로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양육 방식에 대한 사소하지만 갈등도 있었다. 아내는 내가 아이 교육에 너무 소극적이라고, 나는 아내가 아이의 성장에 지나치게 조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가 섬세한 멜로디를 이끄는 바이올린이라면, 나는 전체의 안정감을 잡아주는 첼로다. 아내의 열정과 아빠의 균형 감각, 이 둘이 만나 아이만의 고유한 성장 리듬이 만들어진다.


교육이라는 이름의 여행


지금 돌이켜보면, 영어유치원 선택은 단순히 언어교육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이 함께 떠난 하나의 여행이었다. 아이는 새로운 언어라는 여행지를 탐험했고, 아내는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철학을 실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빠로서의 역할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 역시 성장했다는 것을 깨닫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여행의 목적지보다 동행자와 함께하는 여정이 더 소중하듯, 교육의 진정한 가치 또한 그 과정에 있었다. 아이 교육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들로 이루어진다. 오늘 아이와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어떤 책을 함께 읽을 것인가, 어떤 경험을 선사할 것인가. 이런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아이의 내일을 일궈낸다. 부모의 따뜻한 시선과 긍정적인 태도가 어떤 교육 환경보다 아이에게 진정한 성장 에너지를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배우는 아빠


아이가 영어유치원을 졸업한 지 몇 년이 흘렀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 그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놀라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감동, 그리고 '아빠도 영어유치원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순간들.


지금의 나는 안다. 진짜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것을. 마흔 살 아빠도 네 살 아이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교육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성장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는 것을. 언어는 문이 아니라 다리였다. 그리고 교육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행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때로는 아이가 앞서가고, 때로는 부모가 길을 인도하며. 그렇게 함께 걸어가는 길 위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아빠도 영어유치원에 가고 싶었던 그 마음은 결국 아이와 함께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함께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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