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성격은 없다
지난 봄에 있었던 일이다.
같은 연령 어린이집 엄마들끼리 아이와 함께 짧은 여행을 가기로 했다. 1박 2일. 하원하고 출발하는 거니 일정은 더 짧다. 거의 잠만 자고 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내가 가기로 한 그 주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단순 감기라면 마스크를 쓰고 갔을 텐데 열이 났다. 비염 때문에 환절기에 종종 아프기는 하지만 그때는 열이 좀 오래 갔다. 여행 당일, 무릎과 허리까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내 몸을 짚어보고는 걱정을 하셨다. 열이 나는 것 같다고. 그때까지는 치료를 받고 무리해서라도 여행을 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릎도 허리도 아픈 데다 열까지 나는 상태에서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갔다가는 민폐만 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무리 중에서 혼자 여행을 가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친구에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들은 후였다. 나는 혹시 이런 일이 생길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 한 엄마가 아이에게 미리 말했고 그 아이가 우리 아이에게 전했던 것이었다. 친구와 함께 여행갈 생각에 행복해 했던 아이는 '자기만'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성통곡을 했다. 남편은 아이가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화를 자신에게 푸는 것도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나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함께 여행을 간 엄마들이 하필 내가 포함되어 있는 단체 엄마 카톡방에 함께 여행을 가서 술마시고 노는 사진과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사진을 올렸다. 이걸 올렸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일지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걸까 싶었다. 나는 더 기분이 나빠졌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남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남편은 기분을 잘 풀어주는 편은 아니라서, 나는 남편과 대화하고 기분이 좋아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대화 중에 그런 말을 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너 때문에 00이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생각하면 웃고 말 일이었다. 무슨 1박 2일 여행 하나에 일생일대의 기회까지. 그 전에도 종종 여행을 갔었고 앞으로도 갈 건데,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니냐고 면박을 주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미 나는 나 때문에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추억을 놓치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푹 젖어 있었다. 그런 나에게 그 말은, 상처가 난 곳에 소금을 쏟아 붓고 잡아 벌린 것이나 다름 없이 느껴졌다.
나는 울고불고 소리를 쳤고 너랑 더는 살고 싶지 않다며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결국 집을 나간 건 남편이었고, 나는 이 지긋지긋한 생을 그만 끝내고 싶다는 절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남편과 다툴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실행에 옮긴 적은 없지만 베란다에서 저 밑을 내려다 보았던 적은 종종 있었다. 그래도 애써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 있었는데, 남편에게 그런 말까지 듣고 보니 당장 생을 끝내고만 싶었다.
후에 남편은, 그 말을 한 것은 나 대신 자신이라도 참여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를 주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나도 쓰면서 이해가 안 가니까. 내 요구에 억지 사과를 하긴 했으나 그는 아직도 이것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내 죄책감을 모르고 그랬다면 그만큼 공감력이 없는 사람이니 나쁜놈이요, 내 죄책감을 알면 더 나쁜놈이다. 그런 놈과 나는 오늘도 살고 있다.
오늘의 일상은 어떠했던가. 금방이라도 가정이 깨어질 것 같은 그날에 비하면, 오늘은 참으로 평화로운 하루였다. 아이의 언어 발음 치료 때문에 센터를 가는 날. 남편은 퇴근 후에 아이를 하원시켜 직접 센터까지 데리고 갔다. 집에 돌아온 아이를 내가 씻기는 동안 남편은 내가 미리 만들어 둔 닭고기 덮밥 소스에 밥을 비볐다. 아이가 먹기 좋게 닭고기를 자른 후에, 다 씻고 내복으로 갈아입은 아이를 데리고 밥을 먹였다.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책을 읽어주면서 한 입 한 입 먹여 주었다. 그동안 나는 밥을 먹었고 내가 다 먹은 후 남편이 밥을 먹고 내가 아이를 봐주었다.
밥을 먹은 후에는 둘러 앉아서 보드게임을 했다. 일종의 기억력테스트 같은 보드게임인데 아이보다 내가 훨씬 못하는 게임이라서 재미있었다. 일곱 살 아이와 마흔 두 살의 기억력의 차이를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남편이 먼저 죽고,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내가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하자 남편이 나를 발로 툭툭 차면서 눈치도 없다고 했다. 결국 그 다음은 내가 거의 자진해서 죽고 끝까지 살아남은 아이가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아이는 휴대폰으로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잤고 남편은 내일 친구네 집에 아이와 함께 놀러갈 것이니 나는 쉬라는 카톡을 보냈다.
아이의 밥을 먹이고 책을 읽어주며 같이 보드게임을 하고 게임을 하는 중간중간 계속 추임새를 넣으면서 '주접'을 떨어댄 남편, 한없이 가정적이고 아이를 사랑하는 남편은 놀랍게도 나에게 '너 때문에 00이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거야'라는 폭력적인 말을 한 이와 동일 인물이다. 드라마나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성격이 고정화되어 있어서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지만, 남편은 카메라 하나를 들고 찍은 후에 어떻게 편집을 하느냐에 따라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람은 그 어느 중간에 있다. 늘 좋을 수도 없고, 나쁠 수도 없다. 오늘의 남편이 대부분 좋았지만 또 나빴던 것만 찾아내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의 남편은 최악이었지만 또 좋았던 것들을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삶이라는 것은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 인물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저 사람이 내게 어떤 인물이냐가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관계라는 것의 주도권은 내게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