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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Jan 24. 2019

우리를 우리가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에 대한 반론

영화 "그린북( Green Book, 2018)"

 


 막연히 음악 영화일 것으로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를 ‘우리’가 될 수 없게 만드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 관한 영화였다. 백인과 흑인에 관한, 고용주와 피고용인에 관한, 부(富)를 축적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관한, 그리고 짧은 순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에 관한. 다수가 선택한 환상 속에서 권력을 획득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관한 이야기.


 돈 셜리는 짐 크로우법이 아직 유효했던 1960년대 언저리를 살아가는 흑인 피아니스트이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흑인이며, 엄청난 부를 축적한 흑인이고, 심리학 박사인 흑인이며, 백인 노동자의 고용주인 흑인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흑인성’이라는 이데올로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흑인은 게으르고, 더럽고, 폭력적이라는 환상이 만들어내는 편견은 노예제도가 없어진 후로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돈 셜리는 화려한 재능과 지식과 부에도 불구하고 백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도, 같은 화장실을 쓸 수도 없는 존재였다. 오직 피아노 앞에서 ‘백인들의 음악’을 연주할 때만이 그가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그가 클래식 연주를 더욱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흑인의 음악, 피아노 위에 위스키를 올려두고 신나게 블루스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음악에는 정통 클래식과는 조금 다른 것이 숨어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토니조차도 셜리의 음악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토니는 반복되는 편견과 차별로 인해 낙심한 셜리에게 말한다. “당신 연주는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이와 관련해 연출적인 부분에서 재미있었던 점은-영화관에서 관람하자마자 글을 쓰고 있기에, 다시 한번 확인이 필요하나-돈 셜리가 차별로 인해 상처를 받으면 받을수록 음악은 더욱 클래식에 가까워졌고, 토니와의 관계 속에서 치유를 경험하면 음악에서는 블루스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돈 셜리에게 클래식은 자기방어의 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나는 실제 돈 셜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그의 음악들을 찾아서 들어보니 스트라빈스키가 클래식에 재즈의 어법을 차용한 음악가라면, 반대로 돈 셜리는 재즈에 클래식 어법을 차용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클래식 음악가로서의 그의 연주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셜리가 평소에 입는 옷이나 사용하는 말투, 행동, 이 모든 것은 그의 억압당한 자아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실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습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 오랫동안, 마치 공기처럼 존재해서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 졌던 것들, 당연히 사실인 양 믿어왔던 것들, 그중에서도 특히 흑인이나 유대인, 동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들은 잘 알다시피 역사적으로 끔찍한 상처들을 남겼고,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는 편견에 사로잡혀 그 상처 내기가 여전히 진행 중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우주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모든 인간은 개별 자로서 독특한 정체성을 갖는다. 피부의 색, 혹은 종교에 따라 본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야말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밖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존재를 일반화함으로써 이 세계에 대한 안정감을 얻는다. 눈에 보이는 몇 가지 특징에 따라 인종을 분류하고, 젠더를 분류한다. 그리고 각 무리의 보편적 정체성을 확립한 후, 그것을 사실인 양 믿는 것, 그것이 오랜 세월 인간이 세계를 소유하는 방식이었다.       


 셜리는 이러한 편견에 대해 수동적 공격성을 나타낸다. 최대한 그들의 법대로 살아가는 척하는 것, ‘쿨’한 척 웃으며 그 안에서 분노와 증오를 키워가는 것, 이것이 셜리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셜리의 모습에 분노하는 것은 백인인 토니였다. 흑인이 한 번 쓴 컵은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의 혐오를 가졌던 토니는 이제 셜리가 흑인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모든 것들의 바탕에 타당한 논리란 전혀 없음을 깨닫는다. 셜리는 자신과 다르지 않은 한 인간임을, 자신이 갖는 모든 욕망을 그 또한 욕망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아간다. 실은 환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직접 몸을 부딪쳐 경험하는 과정을 생략하고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토니의 세계 속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가는 셜리와 그런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토니와 가족들, 이 영화는 그렇게 그들이 환상을 횡단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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