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아름다움이 넘실대는 곳
일 년 365일 어느 하루 기대되지 않는 날이 없던 엘레였지만 5월을 기다리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가 엘레이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그것도 하필 5월이라면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한국에서 30년, 미국 동부 보스턴에서 1년 그리고 중부 시카고에서 6년을 살았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세 곳 모두 사계절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식생도 비슷하다. 봄가을이 제법 짧고 여름과 겨울이 긴 것. 봄에는 벚꽃이 피고 가을이면 낙엽이 물들었다. 여름은 지독한 습기가 겨울은 칼바람에 온몸이 시린다. 때때로 처음 보는 들꽃이나 나무들을 발견하곤 했지만 크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2020년의 한 겨울에 중부 일리노이주에서 서부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를 했다. 차를 계속 사용해야 했고 경제적 사정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2주 전에 큰 짐을 먼저 보내 창고에 보관시키고 우리는 차로 이동하는 계획을 세웠다. 4박 5일의 로드트립 일정이었다. 12월의 겨울에 시카고를 출발해 달리고 달려 늦여름 혹은 초가을의 날씨인 엘레이에 도착하게 되었다. 거쳐온 주만 해도 5개. 처음에는 지루하고 지루한 평야를 달리다가 점점 나무의 종류가 바뀌고 울창한 숲의 정점을 찍은 다음, 마침내 사막 지역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헐벗은 산과 붉은 모래산들이 보이고 듬성듬성한 나무들이 점점 많이 보일 때쯤 내가 이전과는 정말 다른 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때는 5월이었다. 고속도로 출구를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평소에 자주 다니던 길이라 별생각 없이 지나가는 도중에 순식간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색깔이었다. 분명 며칠전만 해도 눈에 띄지 않았는데 지금껏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보라색 꽃나무가 있었다. 순식간에 빠져나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헛걸 봤나 싶었다. 내가 본 게 정말 꽃나무였는지 그렇다면 무슨 꽃이었는지 너무 궁금했다. 머릿속엔 온통 그 꽃생각뿐이었다.
세상에는 많은 색이 있고 그중에 보라색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 아니다. 파랑과 빨강이 만들어내는 보라색. 빨강이 더 많으면 자주색이라고 해야 하나. 파랑이 더 많으면 바이올렛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 보라색이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떤 보라색 꽃은 심지어 촌스럽게 느껴졌다. 너무 선명했거나 원초적인 느낌이었다. 남편학교 상징 색깔이 보라색이었기 때문에 에반스톤에 사는 내내 보라색에 둘러싸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끔 질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보라색은 내가 알던 그런 보라색이 아니었다. 신비로운 보라색이었다. 해가 화창한 날엔 따듯한 느낌이, 구름 낀 날씨엔 차가운 느낌이 감돈다고 해야 하나. 이 꽃을 보자마자 엘레이에 산지 20년이 넘은 사촌언니에게 당장 전화를 했다.
"언니, 내가 무슨 꽃을 본 것 같은데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이었어. 보라색인데 그냥 보라색이 아니야."
"아 그 꽃. 맞다. 이맘때쯤 폈던 거 같아. 그런데 나도 이름은 모르겠네."
어찌 보면 언니에겐 그냥 보라색꽃이었을 수도 있다. 예쁘긴 하지만 나만큼 감동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루는 일상을 나누는 단톡방에 꽃사진을 올렸다. 나만 알고 싶은 신비한 꽃인데 여러분에게도 보여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호주에 살고 있는 지인이 꽃이름을 알려주면서 내 궁금증이 해소됐다. 호주의 봄에도 이 꽃나무가 핀다고 했다. 알고 보니 따듯한 지역에 피는 꽃이라고. 자카란다. 이름도 예쁘다. 흔치 않다. 자카란다 자카란다. 그게 네 이름이구나. 여러 번 중얼거려 본다.
운전 중에 처음 맞이한 자카란다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이곳저곳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엘레이에서 처음 맞이하는 5월의 기쁨이었다. 자주 걸어 다니는 길목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오래된 자카란다가 있었다. 한 번도 궁금해 한 적 없는 나무가 특별한 나무가 되었다. 장 보러 걸어가는 길에는 굳이 주유소를 지나쳐 가곤 했다. 그곳을 지날 때면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눈은 바빠진다.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이내 꽃들이 곧 져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렸다. 왜 예쁜 걸 보면서 행복한데 한편으론 짠해지는지.
남편의 학교 캠퍼스에도 자카란다들이 만개했다. 남편도 예쁘다고 했다. 대문자 T에 찐 이과생 남편의 무미건조한 말 한마디에도 괜히 내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가 만든 꽃도 아닌데 내가 칭찬받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꽃 하나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니. 인스타 피드에도 자카란다 사진을 잔뜩 올렸다. 무슨 꽃이냐며 궁금해하는 친구들의 댓글에 자카란다는 꽃이라며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
사진으로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 눈이 제일 좋은 카메라니까.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고, 언니에게,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언젠가 엘레이에 간다면 5월에 가서 자카란다를 보고 싶다. 그때 내가 본 그 예쁜 보랏빛을 다시 내 두 눈에 담고 싶다. 그렇게 많이 눈에 담았는데도 그립고 또 그립다. 5월에 라라랜드로 여행계획이 있다면 이 신비한 보랏빛을 눈에 넘치게 담고 오시길. 이 아름다운 보랏빛의 유혹에 잔뜩 빠져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