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도 없는 구름 중독
한 번간 여행지는 웬만해서 다시 안 가고
한 번 묵은 호텔은 다시 안 가고
한 번 들른 식당도 안 가는 편이다.
무슨 대단한 철칙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해보고 맛본 것 말고
세상에 많고 많은 ‘새로움’을 만나보고 싶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새로움’을 모두 테이스팅 하기엔 너무 짧고도 제한된 인생이기에…
그런 내가 굳이 다섯 번째 방문을
자처하는 곳이 있다.
베트남의 스위스, 사파“SAPA
베트남의 핫플레스이기에 친구나 지인이 여행 올 때 따라온 이유도 있었지만, 새로 온 손님이 또 사파가 가고 싶다 하면 내가 가보고 싶은 뉴플레이스로 꼬실 요량도 충분했다.
그런데 왠지 사파는 좀 달랐다.
베트남에 처음 정착했던 2006년도의 첫 가족 여행지였기에 애틋한 듯싶다. 4인용 침대칸의 밤기차를 타고 너무 새롭고 설레어 잠들 수도 없이 덜컹거리던 그 밤은 아직도 생생하다. 침대칸에서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 컵라면을 호호 불며 먹던 그 기억을. 이른 새벽 창문을 열었더니 구름 속에 갇혀버렸던 신비한 그 기억을. 호텔 앞 초목에서 우연히 만난 토끼와 염소에게 풀을 먹이던 그 평화로운 기억을.. 소수민족 마을 트래킹에서 아이들이 새끼 돼지를 쫒으며 놀던 그 기억을… 잊지 못할 기억의 조각들과 사파의 그 유니크한 매력에 행복했던 우리의 첫 가족여행의 추억이 특별하게 담겨서 일 것이다.
이번에도 동생이 살고 있는 베트남에 오는 언니 가족을 위해 셀렉 된
아니, 내가 정하고 모두 따르라 하는 플레이스는 사파다!
한 시간가량 굽이굽이 산 허리를
돌고 도는 동안 계단식 테라스 논은 계속된다.
옛 조상 때로부터 얼마나 열심히 산을 깎아왔으면 한 시간을 차로 올라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산마다 계단식 논이 정갈하게 각 잡혀있다. 논 위에 파란 벼들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바짝 들고 있다. 가을날의 황금빛 벼 계단도 장관이리라. 산을 타고 논을 타며 집이 뚝뚝 지어져 있는데 아무래도 사파의 민족들은 축지법을 써서 이웃집을 오가는 것만 같다.
사진으로 담고 담아도 다 담아지지 않는
끝없는 산 경사를 타고 이어지는 테라스 논과
아기자기한 마을들
산속 뚝뚝 솟아난 빨간 지붕 사이로 학교도 보이고 의원도 보이는
그야말로 자급자족의 정겨운 부족마을들이다.
54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베트남은 그중 사파지역에만 12개의 소수 부족이 모여 산다고 한다. 각 부족을 구분하는 것은 그들의 화려한 색감과 손 자수가 놓인 그들의 의상디자인인데 푸르른 테라스 논에서 화려한 소수 부족 의상을 입고 논을 매는 부족의 여성을 만나다면 초록 논에 뚝뚝 놓인 컬러풀 오브제 같은 그 예술적 광경에 압도될 것이 분명하다.
좀 더 압도되려면 이쯤에서 드론 앵글 필요하니까 딱 세 장만 전문가의 샷으로~ (아래 세장의 사진 빼곤 모두 직찍 ㅎㅎ)
(위의 사진이 사파의 경관인줄 착각하고 올렸었는데 머슴농부 작가님의 조언으로 지역 정정합니다^^;
위의 사진은 사파에서 한시간 반 가량 떨어진 이웃동네 옌바이 성 무캉차이의 경관입니다. 이렇게 장엄한 테라스 논의 장관은 베트남 북부 소수 민족 마을을 타고 끝없이 펼쳐집니다.)
금강산도 당연한데 그 배는 되는 해발 3,147m의 판시팡(Fansipan) 정상 정복을 앞두고 식후경은 필수인걸!
하노이에서 다섯 시간 동안 차를 타고 달려온 우리의 배를 채워 줄 썸띵 야미가 필요하다.
코코넛 커리를 추천해서 왔건만 해산물 볶음밥 맛집일 줄이야. 한식러버 남편을 위해 튜브 고추장을 가방에 챙겨 왔더니 한국서 온 식구들도 나도 나도 하기 바쁘다. 고추장 한 방울에 만원씩은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자자 줄을 서시오~! 내일은 김도 한 팩 꺼낼 예정이니 장당 푸르른 거 한 장씩 준비해 오면 되고! 투어 시작도 안 했는데 지갑 두둑해지기 아주 쉽드아~ 이 싸람들 쇼핑 옵션까지 시켜버릴까~
판시팡산 정상까지 일단 안 찍더라도 사파는 한 시간가량 산등성이 굽이굽이 돌아 올라온 해발 고도
1641m의 청량한 산속 마을이다. 식당 앞 펼쳐지는 전경이 아주 그냥... 끝내준다. 먹기 전부터 밥이 맛있고~
이제 배가 든든하니 레츠고~
평생에 눈이라는 걸 본 적 없는 베트남 사람들이 몇 년 전부터 사파에서 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기상이변이 속 쓰리지만 사파민에게는 대단한 경험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판시팡 정상으로 향해 가는 데 난데없는 고소공포증이 갑자기 몰려와 혼이 났다. 짓궂은 아들은 요 때를 놓칠세라 엄마 괴롭히기 작전에 들어간다. 요놈의 아들 녀석들은 무섭다고 하면 꼭 더한다니까. 무섭다 말한 내가 바보지.
구름에 폭 담긴 마을
새벽녘 호텔 테라스를 열면
구름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곳!
이미 몇 달 전부터 난 복작이는 하노이를 떠나 어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사파의 호텔에서 새벽녘 테라스 문을 열면 나는 구름빵의 홍시 홍비가 되어 구름 위를 나르고 있다.
산 마루턱 굽이굽이 구름이 걸려있다.
멋진 장관에 그대로 멈춰 서 있으니
갑자기 산 발꿈치에서도 구름이 퐁퐁 솟아오른다.
눈이 안 좋으면 볼 수 없는 아니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반짝 무지개가 금세 떴다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름과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구름이 산 허리에서 만나…둘은 사이좋게 손잡고 앞으로 방향을 휙 틀어서는 나의 창문 속으로 마구마구 달려 들어온다. 호텔 방안에 하얀 구름이 꽈악 차고 나는 구름빵이 되어 환상의 나라를 나를 즈음 쨍한 햇살이 나타나 구름을 데려간다.
‘푹’ 하고 산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구름 속에 갇히는 경험
구름 위를 걷는 신비한 경험
사파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함이다.
이번 여행은 날씨마저도 완벽했다.
지난번 친구와 만난 사파는 이틀 내내 자욱한 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차의 헤드 라이터가 들어와도 불과 1-2m 전방 밖에 시야가 허락되지 않는다. 차량의 라이트가 도와주지 않는 순간엔 핸드폰 라이트에 의지해 보아도 1m 앞도 보이질 않아 도보 5분 거리의 마켓에 도착하는데 30분이 걸렸고 뷰가 끝내준다는 호텔의 테라스에서 이 아래 어떤 뷰가 있긴 있는 거겠지 하며 이틀을 지냈다. 지난 이야길 해주니 "이모 요즘 sns에선 그걸 곰탕뷰라 불러요. 사파 왔다가 곰탕뷰 속에서만 있다 왔다고들 해요"라고 알려준 조카덕에 배꼽을 잡고 웃고, 신조어노트에 '곰탕뷰'도 플러스 원 되었다. 그땐 사파의 테라스 논을 즐감하지 못한 호텔 테라스가 그리도 야속하더니 오히려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는 구름 중독 병에 걸려버렸다. 스르르 걷히는 뿌연 안개가 아니라 농짙은 구름 속을 걸어 보는 경험. 그걸 어디서 하랴. 비행기에서 창문 열고 나르지 않는 이상 나를 구름 중독에 걸리게 한 그것은 정녕 사파의 잘못이었다고. 나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요상하다 이 사파는.
밤에 시내 거리에서 인파를 타고 걷다가 미처 아래를 못 보면 아기 다리를 밟고 지날지도 모르는 아찔한 상황이 생긴다. 이 어린 아기를 길바닥에... 이 사진 속 여자 아기보다 더 어린 돌이나 지났을까 싶은 아기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근처에 엄마가 지키고 앉아서 이제 겨우 앉기 시작했을까 싶은 아기를 바라보고는 있다. 하지만 이 어린 소중한 아기를 구걸의 목적에 내 던져 놓는 그들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잠시 서서 엄마를 째려보았다. 관광객은 미처 못 알아볼 엄마였지만 난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눈을 슬며시 피하는 양심은 있어 다행이라 여기며 탐탁잖게 어쩔 수 없는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첫 밤이 가고
다음날은 경복궁에서 한복 빌려 입고 투어 하듯 소수부족 의상을 빌려 입고 깟깟마을을 트래킹 한다.
사파를 처음 방문한 언니 가족을 위한 기본 코스다. 와... 몇 년 전보다 상점 줄이 세 배는 길어졌나 보다. 상점이 늘어선 계단길만 삼십 분을 넘게 내려갔나 보다. 이 싸람들이 물건 파는 데만 미쳤나. 자연스러운 시골 마을 길을 다 망쳐 놓았다. 입장권을 사고 들어갔는데도 좀 더 예쁜 스팟을 발견해서 사진 찍으려 하면 추가 페이를 요구한다. 관광지로 사랑받는 곳의 미운 단면이다.
나는 자연과 구름이 그리워서 온 거라고!
그래도 요요 깟깟마을
쫌 이쁘니까 봐주자.
사람에 치이고 상술에 치이다가
이렇게 나의 사파를 떠날 수는 없었다.
마지막날 호텔 프런트에서 매니저를 붙들고 물었다.
사파에서 제일 발전 안된 마을이 어디냐고. 한 사십 분만 더 들어가도 가 볼 만한 마을이 있으니 두 군데를 추천했지만 그중 입장료 페이가 없는 마을을 선택했다. 입장료가 없다는 건 관광객에겐 볼 것이 없다는 이야기. 하지만 자연이 더 많이 보존되고 있을 거란 이야기니까.
마을 초입에서 우선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는 차로 올라갔다. 점점 길이 좁아지고 16인승 포드가 과연 차를 돌려 나오긴 할 수 있을까 염려되는 중에 다행히도 작은 주차장 하나가 들어온다.
여기야! 여기서 차도 돌리고 우리는 내려서 걸어 올라가자
그런데 바로 옆 '벼 카페 (Lúa Cafe)'라는 곳의 직원이 우리를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오... 이름도 맘에 드니 일단 목을 축이고 가자고.
우연히 찾은 멋진 카페에서 치킨을 한 마리
주문했더니 한 시간을 기다리란다.
그동안 마을을 구경하고 오면 어떻겠냐고.
그럼 또 말을 잘 들어야지~
마을길 걸어 오르다 이런 귀염둥 장난꾸러기들을 안 만나면 섭하지
올라갔다 내려올 때까지 우리를 기다리면서 재롱을 부린다.
주머니에 사탕 한 알 없어 아쉬웠지만 그저 반갑게 손 흔들어 주는 것에 사탕 열 알은 받은 듯 기뻐하는 꼬마 녀석들 그 천진한 웃음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마을을 걷고 돌아오니
토종닭 한 마리가 줄었다.
닭 머리는 집 강아지들 몫이 되어 개들은 신이 나고
갓 잡은 닭의 쫄깃한 근육 맛에 간만에 고기 씹는 재미를 느껴본다.
땅콩 소금에 찍어먹는 대나무 타로 찰밥에 갓 따서 볶은 수수 야채 볶음까지 기대보다 너무 훌륭했다.
치킨 한 입 뜯고 보랏빛 찰밥에 수수야채 돌돌 말아먹으니 그저 완벽!
이 맛을
어찌
잊으랴~
우리 언니도 나처럼
사파의
매력에 흠뻑 빠져
꼭 다시
오겠노라고…
구름 중독병 약도 없는데 큰일이다!
사파는
어디에
있어도
빨려 들어간다
구름 속으로….
SAPA see you again!
몇 번 더 오게 될까?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