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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크 루이스의 조난자 둘

by 낭만찬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곡인

‘lake louise’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영롱한 건반의 소리가 귀에서 기분 좋게 고막을 노크한다. 고막은 기꺼이 그 문을 열어주어 머릿속으로 들어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는 온갖 근심 걱정들을 잠시 휴식하게 도와준다. 건반 하나에 고민 하나씩 내려놓는 느낌이랄까. 이윽고 머리를 통과해 가슴속으로 진입하면 두근거리는 불안들은 일제히 아름다운 선율 앞에 항복하고 만다. 그렇게 2분 26초의 시간은 나에게 완전한 평화를 선물해 준다.

뉴에이지 장르의 ‘레이크 루이스’라는 곡은 고3 수험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피로회복제 같은 곡이다. 그렇기에 이 곡의 제목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했다. ‘레이크 루이스’ 나에겐 그만큼 상상 속에서 나오는 미화된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다. 가장 고단하고 힘들 때 편안함을 주는 음악이었으니 그만큼 더 소중하고 따뜻하게 상상하고 싶었다.


세계여행을 떠나온 지 9개월 차에 접어들 무렵 우린 미국에서 캠퍼밴들 빌려 캐나다 로키산맥에 이르렀다. 열흘 가까이 차에서 숙박을 하며 달려온 탓에 우리의 모습은 추레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캐나다를 넘어가는 입국 심사 과정에서는 우리의 행색을 보고는 따로 불러 통장 잔고와 직업 등 우리의 신원을 추가로 물어보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불법체류나 밀입국 등의 우려가 있었던 듯하다.) 그럴 만했다. 7일째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가 도착한 캐나다 로키산맥은 미국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곳은 바로 ‘레이크 루이스’였다. 나에겐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 일부러 조금 더 아껴두고 싶었다. 환상이 사라질까 봐.


실제로 유키 구라모토가 이 호수를 보며 그 곡을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레이크 루이스는 나의 상상보다는 고요하지 않았다. 관광객들도 많았고 하필이면 그날 날씨가 다소 흐린 탓에 조금 산만했다. 그럼에도 내가 최고로 기대했던 곳이기에 난 정인이와 카약을 빌려 호수를 조금 더 가까이 느끼고 싶었다.


빙하가 녹아 형성된 호수라 색깔은 에메랄드빛이고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자태의 훌륭함은 감탄을 자아냈다. 여유롭게 카약을 타고 둥둥 떠서 그 멋진 풍경을 한껏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정말 그렇게만 하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그 호수를 즐겼다. 우리만 제외하면...


정인이가 뱃머리에서 나는 뒤에서 서로 영차영차 하며 노를 저어 호수를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장난도 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대여시간 1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카약을 빌렸던 대여 장소에서 꽤나 멀리까지 오게 되었고 그런 탓에 주변에는 그 많던 사람들도 찾기 힘든 한적한 공기가 흘렀다. 우리에겐 설산과 빙하가 더 가까이 있었고 평온함을 주던 공기는 이내 곧 적막함으로 변해갔다.


“정인아? 우리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그렇지? 돌아가자! 그래야 시간 내에 반납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린 뱃머리를 반납 장소로 돌려 힘차게 노를 저었다. 2인용 카약은 매우 좁고 길쭉하게 생긴 탓에 노를 젓는 두 명의 호흡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배가 너무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좌, 우 균형을 맞추어가며 저어야 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진 우리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에 무작정 노를 젓기 바빴다. 설상가상으로 흐렸던 날씨가 먹구름으로 바뀌어 비를 뿌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잔물결 고요했던 호수에 파도가 일렁였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일순간 정인이와 나의 노 젓는 방향이 같아지며 배가 왼쪽으로 쏠리던 차에 파도가 더해지며 우리의 카약은 사정없이 전복되었고 우린 차디찬 빙하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고운 빛깔과 따뜻한 선율로 나에게 평안을 선물했던 호수의 속내는 차가웠다. 그 냉혹한 배신감은 2배의 충격으로 다가와 말문을 막히게 하였다. 갑작스러운 입수에 쇼크가 와서 호흡이 잘되지 않았다. 살을 에는 호수의 온도는 곧 저체온증이 올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직감하게 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평소 수족냉증이 있어 손과 발이 차고 유독 추위를 힘들어하는 정인이가 걱정되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던 탓에 물 위에 둥둥 떠 있기는 했지만 아무 말 없이 마치 자유의 여신상처럼 한 손에는 카메라를 쥐고 팔을 들고 있었던 그녀였다. 혹시 저대로 얼어버렸나? 하는 마음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에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저... 정인아...(허헉 허헉) 너... 너라도 일단 배 위로 올라가”

“......”

나의 숨은 불안한 마음에 점점 더 가빠 왔다.

“저...(헉헉) 정인아 내... 내가 너를 받쳐 줄 테니까 (헉헉) 너라도 올라가 있어”

숨은 더 차오르고 과호흡이 왔다고 생각하는 찰나,

“(해맑게) 뭔 소리야. 어차피 배 뒤집어져서 올라가지도 못해. 호루라기 불어서 구조요청하면 돼”

“그... 그래도 너 오... 올라가야 해”

“아 그럴 시간에 너도 호루라기 불어! 구명조끼 어깨 쪽에 있잖아”


평상시 약한 바람에도 춥다며 호들갑을 떨던 그녀지만 정작 빙하 호수에 빠져버린 이 상황에서는 전혀 동요치 않았다. 그 와중에 카메라 하나는 살려 볼 거라고 오른손엔 카메라를 들고 왼손으로 호루라기를 삐익 삐익 불어대는 그녀의 처신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정작 상태가 안 좋은 건 나였다. 호흡이 더욱 힘들어지고 몸이 얼어갔다. 유약하지만 그녀를 구하고 싶은 남자와 깡다구 세고 이성적인 여자의 ‘찻잔 속의 태풍’ 같은 사건이었다.


결국, 정인이의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구조대에서 보트가 와 우리는 무사히 건져졌고 다행히도 살아나갈 수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수에서 우리만의 하찮은 ‘타이타닉’을 찍었던 것이다. 전화위복이었는지 카약 대여 업체 측에서 ‘페어몬트 샤토 레이크 루이스 호텔’ 객실을 잡아주었다. 호수 바로 앞에 위치한 고급 호텔이라 비싸서 엄두도 못 내는 곳을 이렇게 또 이용해 보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호텔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젖은 옷을 말리며 객실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정인이가 끝까지 사수했던 카메라를 제외한 우리의 소지품들이 호수 밑으로 수장되어 버렸지만 또 이런 고급 호텔을 이용해 보는 극적 대 비감과 생존이 달려있던 극한 상황 속에서 나와 그녀가 보인 행동을 곱씹으니 웃음이 났다.


“인아. 나 그래도 그 와중에 너 살리려고 했다.”

“야 정작 내가 너 살린 거 알고는 있니?”

“그건 또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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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살리려 했고

너는 우리를 함께 살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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