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 앞에 주저앉은 사수가 멍하니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기도 잠시, 사수는 애기 밥! 애기 밥! 무릎을 치며 엉덩이가 바닥에 붙자마자 도로 일어났다. 밥이 뭔데! 밥이 뭔데! 라고 택시가 떠나가라 절규하던 사수의 무의식에서 마침내 그 '밥'이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장례식장 식사 메뉴에선 기본으로도 옵션으로도 찾아보기 힘들 듯한 신생아의 밥. 사수는 베일 끝을 펄럭이며 마트로 향했다.
사수가 나선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마스크를 교체해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서서 자아를 안고 흔드는데, 자꾸 재채기가 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약 30시간째 나는 같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 30시간 사이 그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내 마스크는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살아남은 자의 온갖 분비물에 나달나달 절여진 상태였다. 안쪽에서 일어난 미세한 보풀들이 코끝을 간지럽혔고, 그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마스크째 코를 문지르면 한마디로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냄새가 났다. 나는 살그머니 자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역시나 자아는 바닥에 등이 닿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야오야 오야오야 주술을 외듯 입술을 움직이며 나는 내 가방을 열었다. 웬 잡동사니가 그리 많은지, 순간 딴 사람 가방인 줄 알았다. 나는 땀이 났다. 몇 번을 뒤져도 챙겨 온 새 마스크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가장 먼저 챙겼는데.
가방 속 물건들을 한참 뒤적이다 마침내 밑바닥에서 봉지째 구겨진 새 마스크를 찾아냈다. 겨우겨우 찾아낸 그것은 반납 날짜가 아득히 지난 만화책 모서리에 눌린 채였다. 아니, 다섯 권을 빌렸는데 왜 네 권뿐이지? 만화방 벽에 붙어 있던 '분실 시 100배 배상'이라는 새빨간 문구가 불꽃을 튀기며 머릿속을 스쳤다. 등줄기에서 땀이 솟았다. 때와 장소를 잊은 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의식이 시키는 대로 입으로는 만화책 권수를 다시 헤아리며, 손으로는 새 마스크 봉지를 뜯었다. 헌 마스크를 재빨리 벗어던지고 새 마스크를 쓰려고 끈을 쫙 늘렸다. 그때 단번에 직선을 타고 올라간 자아의 울음소리가 정점에서 날카롭게 증폭되었다. 텅 빈 빈소가 쩍 갈라졌다. 내가 내 가방 뒤지면서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양 놀라버린 나는 필요 이상의 힘으로 새 마스크 끈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투두툭둑, 끈이 몽땅 끊어졌다. 끈과 분리된 새 마스크 본체가 나풀나풀 바닥으로 날았다.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멍하니 주워드는데, 정면에 보이는 작은 창 끄트머리로 마트에서 돌아오는 사수가 스쳤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베일이 사수를 집어삼킬 듯 펄럭였다.
여분의 마스크는 하나뿐이었다. 묶음째 챙길 걸…… 나는 후회막급이었다. 하나면 될 줄 알았다. 하룻밤이면. 그사이 그들과 생이별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얼른 바닥에 던져버린 헌 마스크를 주워 탈탈 털었다. 별수 없이 그걸 도로 뒤집어쓰고, 나는 우는 자아부터 안아 들었다. 그 순간 자아의 손은 그 단추와 단추 사이를 파고드는 데 가볍게 성공했다. 한참 그 주변을 맴돌던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저돌적인 속도였다. 참으로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냄새와 마음이었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아는 내 품에 안기자마자 울음을 그쳤고, 또다시 요술램프를 문지르듯 단추와 단추 사이를 쓸었다. 못 본 그사이 안쪽 털도 꽤 자란 모양이었다. 자아가 처음 손을 집어넣었을 땐 놀라도 너무 놀라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곳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자아의 손놀림을 따라가 보니 지금은 제법 길이감이 느껴졌다. 그 길이와 면적에 대한 계산값을 벌써 구한 걸까. 자아는 몇 번 쓸지도 않고 도로 잠이 들었다. 세상 모든 게 다 제 것인 얼굴로. 이로써 확실시되었다. 남다른 취향을 가진 이 아기는 좁은 틈에서 털을 만질 때 최상의 안정감을 찾는 게 분명했다. 하필. 내 의식은 자연스레 살아생전 도다리의 복부 상태를 상상하고 있었다.
*
"……"
마트에서 돌아온 사수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말이 없었다. 사수 손에 들린 빵빵한 장바구니가 빈소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수는 울기는커녕 여전히 내 품에 잠들어 있는 아기의 평온함에 놀란 듯했다. 마스크 교체에 실패한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나 역시 사수가 마트로 출발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아기를 안고 서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래도 사수는 자아의 평온함보다도 지금껏 본 적 없는 내 우직함에 제대로 놀란 듯했다. 사수는 놀란 자신을 숨기지 못했다. 곁눈질로 내 전신을 스캔하며 괜히 장바구니를 들었다 놨다 하는 등 뭘 어찌할 바 몰라했다. 나 역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사수는 본 적 없었다. 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사수의 몸짓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허, 참 나, 그래도, 암만 놀랐어도 이건 아니지. 사수가 이럴 줄은 몰랐다. 나한테는 그렇게 잔소리하더니 자기는 이렇게 버젓이 그 일을…… 나는 사수를 향해 단호하게 손사래 쳤다. 장바구니를 뒤적이던 사수가 마침내 그 안에서 새로 사 온 젖병을 꺼냈는데 세상에, 씻지도 않은 거기다 바로 분유를 타려 하고 있었다.
"새 젖병은 헌 젖병보다 더 박박 문질러 씻어야 한다면서요! 새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면서요! 눈에 보이진 않아도 기계기름 범벅이라고오오옷!"
기가 막힌 나머지 칠십 살 사수를 야단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말본새를 똑바로 하는 게 신상에 이롭지 않겠냐고, 평소 같으면 살벌하게 한소리 했을 사수였지만 이번엔 힘없는 곁눈질로 나를 힐끔, 하곤 바로 싱크대로 향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건, 배신이었다. 새것은 반드시 속부터 살필 것. 육아는 물론 삶의 전반에서 암기 또 암기해야 할 기본 공식라고 본인이 그리 강조해온 걸 까먹다니…… 하아…… 아니, 이건 또 뭔 일이람. 갈수록 태산이었다. 젖병 하나 씻는데 열 번 넘게 놓치는 소리가 났다.
"주님 곁으로 갈 때가 됐나 봅니다……"
둘이나 가버린 마당에 저런 소리까지. 사수는 너무도 서두르고 있었다. 젖병을 헹구다 말고 아차차 하며 거품 묻은 손으로 갑자기 장바구니를 뒤지는가 하면, 그 안에서 꺼낸 기저귀와 손수건, 좁쌀 베개를 내 옆에 놓아두고 돌아설 때는 자기 발로 자기 수녀복 밑자락을 밟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아휴…… 잠깐 휘청한 고사이에 주님을 몇 번이나 찾던지…… 내 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자던 자아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사수에겐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도무지 쉴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주된 이유는 전화였다. 사수는 사고 직후부터 내리 통화 중이었다. 방금도 젖병 씻다 말고 밖으로 뛰어나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다시 싱크대 앞에 서자마자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와 도로 뛰어나갔다. 빈소는 아직 조용했고, 동굴 속 같은 이곳에선 작은 혼잣말에도 막대한 울림이 생겼다. 그래서 사수는 전화가 오면 일단 빈소 밖으로 뛰는 듯했다. 잠든 자아가 깰까 봐. 그럴 거면 벨소리나 진동으로 바꾸지…… 어쨌든 마스크를 교체하려다 땀범벅이 된 나를 자세히 볼 새가 없으니 그건 다행이긴 했다. 지금 양쪽 관자놀이를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이 땀을 봤다면, 사수는 만사 제쳐두고 달려와 내 땀부터 닦아주었을 테니까. 젖병을 열 번도 넘게 떨군 그 손으로…… 나는 자아를 안고 있으니 두 손이 묶인 상태…… 그러다 사수가 마스크라도 잘못 건드렸다면……
만약 지금 사수에게 수염을 공개한다고 해도 당장 내 실상이 이 병원 저 병원에 노출되진 않을 거다. 사수가 세계의 털 관련 병원을 검색하고 앉아 있을 정신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덜컥 일을 벌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레이저 전문의에게 공개하지 않은 지난 사흘의 증거. 거기에 하루 추가. 또 반나절 추가. 그러므로 지금은 거의 닷새를 기른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콧수염 두어 가닥으로까지 확장돼 있었는데 거기서 얼마나 길어지고 빼곡해졌을지, 이제 전문의는 물론 당사자인 나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사수의 혼란은 이미 충분했다. 거기에 내 수염까지 더해진다면 사수는 진짜 쓰러져버릴지도 몰랐다. 본인 말마따나 가버릴지도. 오히려 내가 사수의 병원을, 어쩌면 봉안당을 검색해야 하는 엉뚱한 일을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없는 현실은, 그토록 끔찍했었다. 내 집보다 다리 위가 편할 만큼. 오로지 침묵으로 흐를,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만큼.
사수가 전화를 끊으며 빈소로 들어섰다. 알고 보니 끊은 게 아니라 방전되어 저절로 끊긴 거였다.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연결한 사수가 벽에 몸을 기대곤 스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디가 접힐까, 지금도 그 자리에 서서 자아를 안고 흔드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