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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Apr 26. 2021

이름을 시작하다 1

신글방 3기 1일 차 릴레이 글쓰기

나에게는 오래된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길다. 그 이름을 다 부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경쟁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그것도 너무 짧은 기간이라 말한다. 몇백 혹은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불러야 겨우 호명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도 누가 정말 그걸 다 불렀다면 그때 그가 발견하는 건 내 이름의 길이가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일 거라 말한다. 내 이름을 듣고 나도 내 이름을 잊었다. 내 이름이 궁금할 적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면 어렴풋이 몇몇 단서가 떠오른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침묵은 미래' 중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향이 날려온다. 갈색 투명한 액체한 모금을 들이킨 그는 하얀 도자기 컵을 받침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오른편에 있는 숲에 고정한다. 긴 다리를 꼬고 등을 의자에 기댄 채 숲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하염없다. 특별한 감정이 떠오르지 않은 하얀 피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윤기 나는 고동색 머리카락이 적당한 길이로 구불거리며 이마와 귀 옆을 장식하고 있다. 순간 불어온 숲 바람에 그의 머리가 날린다. 커피잔에 오른손을 가져가다 테이블 위에서 손이 멈춘다.


한 소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혼자 오셨나요?"

소리를 따라 고개를 천천히 돌려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서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하던 그는 소녀의 집요한 시선을 눈치챘다.

"옛 기억을 더듬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어떤 건지 들려줄 수 있어요?"

소녀의 당돌한 태도에도 그의 얼굴은 여유롭다. 왼손을 들어 비어있는 앞자리를 권한다. 자리에 앉아 그를 마주하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스토리가 있어요. 누군가는 끝냈다고 했지만 그 순간부터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소녀는 귀를 기울였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 이야기가 태어난 이유는 뭘까, 누가 그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다시 커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커피 향이 숲 내음과 함께 잔잔하게 공기 중에 퍼진다. 그를 응시하는 시선을 눈치챈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아주 오래되어 누구도 그 전체 이야기는 다 알 수는 없다고 해요. 그렇지만 어렴풋이 한 번 들은 사람은첫 부분은 기억할 수 있다고도 하고요."

"아.. 마치 전설이나 민담 같은 거?"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누군가에겐 고통이고 또 다른 이에겐 희열을 주는 그런 이야기죠."

"고통과 희열을 한 번에 줄 수 있는 이야기라고요?''

"네, 세상 곳곳에 숨어 있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를 끝낼 수 없다고 하는 그런..."

"태어난 이유도, 끝도 알 수 없는, 처음은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으면서도... 고통과 희열을 가져오는... 그런 이야기..... 그러면... 왜 그 이야기를 생각하고 계셨나요?"

잔잔하던 미소가 방긋 커지며 그의 마음에 파문을 가져왔다. 자기 안에 머물던 마음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로 옮겨졌다.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에 호기심으로 빠져든 갸름한 얼굴이 단발로 자른 금빛 머리칼이 잘 어울렸다. 감청색 치마에 하늘색 블라우스가 단정했다. 인형 대신 책을 한 권 품에 안고 어른인 그에게 다가와 궁금한 걸 물어보는, 당돌하게 그 일을 하는 자연스러움에 그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거였다.

"왜 그 이야기를 생각하고 계셨는지 궁금한데..."

소녀의 질문보다 소녀 자체에 흥미를 가지던 그가 입을 열었다.

"왜냐... 왜일까... 끝나지 않을 그 이야기를 언젠가는 끝내고 싶다는 생각?"

"그렇군요. 누군가는 시작을 할 수는 있다면서요? 어떻게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옛날 옛날 한 옛날, 어느 마을에"

"그다음에는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거기에 누가 살았어요. 그 사람은 뭘 했는데 누구를 만났고 어떻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이렇겠죠?"

"그리고 마지막엔?"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만약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에게 잔뜩 뭘 했고 지금도 하는 중이라면?"

"음... 그러면 그 이야기는 끝이 안 나요."

"그런 이야기예요."

"아, 그게 아저씨가 계속 생각하던 이야기라고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던 소녀가 말했다.

"그래도 시작은 할 수 있죠? 들려주세요. 끝이 나지 않는 그 이야기."

소녀의 영혼 언저리를 맴돌던 그가 다시 소녀의 눈으로 시선을 옮긴다. 드디어 그가 이야기를 열었다.

"옛날 옛날 한 옛날, 어느 마을에 여러 가지 모양이.."



(Pixabay로부터 입수된 confused_me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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