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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Jul 07. 2021

옥장판이 가져다준 선물

[글모사 9기] 주제 4: 선물

뚜루루루루루

혜정의 집 전화기가 울린다. 남식이 잠에서 깰세라 거실에 연결해놓은 무선 전화기를 얼른 집어 든다. 작은 목소리로


"예보세요?"

"혜정아, 언니다."

"언니? 어, 잠깐만."


전화기를 들고 혜정이 안방 맞은편에 있는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곱게 닫는다.


"언니, 오랜만이네. 안방에 제부가 자고 있어서."

"아, 맞나. 제부는 좀 어떠시노?"

"응, 뭐 그렇지. 나빠지지는 않고 있어서 감사하고 있어."

"뼈는 다 붙었다 카디 몸에 힘이 안 돌아온다꼬?"

"응, 그렇대. 재활치료를 하면 좀 나아진다는데 애들 아빠가 굳이 하지 않겠다 고집을 부려서.."

"그랬나.. 치료받으면 훨씬 회복이 빠를낀대..."

"응, 그렇지. 근데 형편이.. 아이들한테 많이 기대고 있는 게 마음이 쓰이나 봐."

"아, 맞다! 내 정신 좀 보소. 진성이 요새 뭐하고 다니노?"

"진성이? 아... 뭐 그렇지 뭐.. 근데 진성이는 왜?"

"하... 그 노마가 어제 대뜸 전화를 해서 잘 지내시냐고 하길래 그렇다 하니까 우리 집에 온다 안 카나."

"언니 집에? 그래서?"

"어, 뭐 오랜만이고 해서 오라 했지. 근데 진성이가 커다란 짐을 들고 들어오는 기라."


혜정은 그 순간 등골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걸 언니네 집에 들고 가진 않았겠지? 제발.. 진성아...


"짐을?"

"그래. 이게 뭐로 했디만 선물이라 안 카나."

"선물?"

"놀래 가지고 진성이 니가 무슨 여유가 있어가 선물을 가주왔노꼬 물어보이 한 번 풀어보시라꼬 하는 기지."

"그래서 풀어봤어?"

"그래.. 근데 옥장판이 딱 나오는 기야. 그것도 아주 2인용으로 큰 놈으로."

"옥장판.... 진성이가 언니네 집에 옥장판을 가지고 갔다고?"

"그래, 가스나야. 그라디만 한 번 올라와 보시라고 하디만 바로 전선 연결해가 뜨뜻하게 해 주대."

"아.... 응... 언니 그래서 그 담엔 어떻게 됐어?"

"어예 되긴 뭘 어예 되노. 지금 그 옥장판 위에 지글지글 몸을 굽고 앉았재."

"언니, 미안해."

"뭐가 말인데?"

"진성이가 다른 이야기는 안 했어?"

"왜 안 했겠노. 자기가 이 때까지 살아온 이야기 길~게 하디만 아버지, 어머니, 동생 효성이까지 자기가 모시고 있어가 생활비 모자라가주고 친구가 하는 사업에 뛰어들어봤다 카는데... 내가 어예 그냥 넘어가겠노."

"그랬구나..."

"내사 요새 옥장판 유행이라케가 하나 살까 하는데 진성이가 들고 와서 샀다만 혹시 진성이 내한테만 온 거 아이고 다른 집에도 갔을까 싶어가 연락했다 아이가."

"그렇구나... 아이고 언니 미안해... 며칠 전에 집에 옥장판을 50장을 가지고 왔더라고. 그러면서 친구랑 같이 사업한다고 알바 2개 하던 거 다 그만뒀다는 거야.... 당장 내일 먹을 것도 없는데... 애들 아빠는 집에서 저러고 있지, 나도 밖에 나갈 형편 못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아, 맞나... 내가 돈 좀 부쳐주까?"

"아니야, 언니. 언니한테 부담 주려고 한 이야기 아니야. 그냥 진성이가 걱정돼서.. 암튼 언니 연락 줘서 고마워. 내가 진성이랑 잘 이야기 해볼게."

"근데.. 실은 내가 연락한 거는.. 옥장판 1장 때문이 아이다."

"그럼? 뭐 더 있어?"

"어.. 사실은 진성이가 깔아준 옥장판은 선물로 줄테니까, 다른 거 1개를 팔아달라 카더라고."

"뭐라고? 하..."

"그라믄서 이모가 1장 더 팔아주면 자기한테도 이득이 된다카믄서. 혹시 필요한 사람이 더 있으면 연락 달라꼬 그때는 좀 더 저렴하게 주겠다꼬. 아무래도 진성이 다단계 회사 다니는 거 아잉가 싶어가 연락했다."

"안 그래도 효성이가 이야기를 해서 정호랑 같이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확실한 거 같네."

"그래. 뭐 옥장판 2장 정도야 언니가 감당할 수 있는데... 내사 니랑 니네 가족이 걱정이 돼가.. 마 잠도 안 오고..."

"그러게. 언니 우리 걱정하느라 못 잤겠다. 진짜 미안해. 내가 돈이 있으면 언니네 집에 있는 거 다시 사고 싶네. 어휴.. 어쩜 좋아."



그렇게 혜정은 언니 여정과 함께 진성의 옥장판에 대해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대화가 길었는지 맞은편 방에서 자고 있던 남식이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 놀라 소리크기를 조절하지 못한 혜정의 목소리를 듣던 그는 낌새가 이상해 안방에 연결된 수화기를 살그머니 들어 올렸다. 혜정은 언니 여정과 대화를 하는 중인 것 같았은데 맘에 걸리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옥장판 50장만 팔고 그만 두면 어찌어찌 될 다만 혹시 더 깊이 연관될까 봐 내사 그게 걱정이다."

"그러게. 그럴 수 있겠네. 나도 옥장판 50장 들고 들어올 땐 그래 주길 바라고 좋게 넘어갔는데... 만약에 다단계 시스템에 더 깊이 빠지면 좀 심각하겠다. 그치?"

"그래. 제부한테 이야기해야 안 되겄나. 아직 이야기 못했제?"

"응. 몸 아픈 거 악화될까봐 못했어. 지금 진성이 방에 와 있는데 아직 옥장판 40개 정도 쌓여 있거든. 이것도 못 보게 하려고 엄청 애쓰는 중이야."

"그렇구나. 제부가 얼른 나으면 좋을낀데 맞제?"

"응. 얼른 회복해서 밖에 산책도 나가고 같이 장도 보러 가고 싶어. 예전에는 바빠도 그렇게 해줬는데... 애들 아빠가 회사 부도나고, 자기도 사고 만나고 하면서 맘이 많이 무너졌나 봐.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질 않네..."

"아, 맞나. 왜 아니겠노. IMF만 해도 큰데 교통사고 나가 몸이 다 망가지가꼬 얼마나 고생했노 그동안... 제부 생각하면 나도 마 마음이 짠하고 그렇다."

"언니, 걱정해줘서 고마워. 내가 잘 말해볼게."


수화기를 붙잡은 남식의 오른손이 벌벌 떨린다. 자신이 우울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틈에 맏아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의지가 남식의 마음에 불붙듯 일어났다. 살며시 수화기를 내려놓고 절뚝거리며 거실로 나와 식탁 의자에 앉아 혜정을 기다렸다. 아직도 쿵쿵거리는 가슴을 느낌곤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혜정이 방에서 나오지 않아 귀를 기울여보니 방 안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껏 외면했던 아내의 슬픔이 남식의 가슴을 파고든다. 찢어지는 마음을 달래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진성의 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혜정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여, 여보... 여기는 왜.."

"여보, 당신. 많이 힘들었지? 내가 미안해."

"아... 아니에요. 뭘요.."


혜정이 급히 눈물을 닦으며 밖으로 나가자는 몸짓을 했으나, 남식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진성의 방 안 가득한 물건들을 응시한다. 혜정이 남식의 몸을 부축하며 같이 나가려 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 진성이가 사업을 시작했다고?"

"어.. 어떻게..."

"당신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미안.. 내가 좀 엿들었어."

"아.. 당신 놀란 거 아니에요? 미안해요,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혜정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주저앉는다. 남식이 불편한 다리를 접으며 그 옆에 앞에 혜정을 꼭 껴안아준다.


"여보, 내가 그동안 너무 내 생각만 했나 봐. 우리 진성이, 효성이 그리고 당신이 이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진성이가 가족을 위해 사업을 하겠다고 다단계회사에 가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아빠인 내가 힘을 내서 일을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여보. 미안해."

"아니에요. 당신도 회사 일이랑 사고로 얼마나 힘들었어요. 그리고 그 전에는 우리 집 가장으로서 많이 힘쓰고 애썼던 것도 알고요. 당신 안 미워요. 괜찮아요."


혜정과 남식은 눈물범벅이 된 서로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며 펑펑 울었다.


"여보, 근데 진성이가 옥장판을 친척들에게 자꾸 강매를 하나 봐요."

"그렇구나. 여보, 근데 우리 여윳돈 좀 있어?"

"당신 사고 나서 보험금 받은 거 있어요. 그건 혹시나 해서 아이들에게도 이야기 안 하고 가지고 있었어요. 사고 나서 받은 거라... 당신 목숨 값 같아서 쓸 수도 없었고..."

"그랬어? 너무 고마워, 당신. 그럼 그거 나 줄 수 있어?"

"그럼요. 근데 어디 쓰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응. 우리 진성이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쓰려고."

"그래요, 여보. 지금 줄게요. 난 당신 믿어요. 이렇게 먼저 방에서 나와주고 날 만나러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여보."


혜정은 정말 오랜만에 세상으로 나온 남식이 모습에 감격하여 통장과 도장을 찾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남식도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며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자신만의 동굴로 숨어버린 지 어언 2년. 비장한 얼굴로 다가와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는 진성을 볼 때에도, 울면서 안방으로 들어와 아빠가 잠든 줄 알고 실용음악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속삭이듯 하는 효성을 볼 때에도 남식은 좀처럼 어둠에서 나오지 못했었다. 그러나 진성이 가정형편을 위해 알바를 포기하고 다단계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더 이상 동굴에서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아빠의 전화를 받고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한 진성이 씻고 나와 식탁에 앉는다. 오랜만에 거실에 나와 있는 남식을 보고 반가워하며 인사한다.

"아빠, 많이 좋아지셨나 봐요. 오랜만에 거실에 나오신 거 보니 너무 기뻐요."

"응, 진성이 덕분이지. 잘 지내고 있니?"

"네, 열심히 살고 있어요. 몸은 좀 나아지셨어요?"

"응.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이제 밖에 나와서 좀 걸으려고."

"와, 진짜요? 넘 좋다. 엄마, 우리 집에 경사가 많네요. 여기 이거 받으세요."


진성이 엄마에게 봉투를 내민다. 놀란 혜정이 진성을 쳐다보며 말한다.


"응? 이게 뭐야?"

"얼른 봉투 열어 보세요."

"이게 무슨 돈인지.. 엄마는 궁금해서.."

"아빠도 여기 와서 앉아 보세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진성은 이모 여정에게 옥장판을 선물하고 1개 팔았다는 기쁨에 넘쳐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남식과 혜정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진성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리고 진성은 여정 외에도 외삼촌 정호에게도 팔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미 진성의 상태를 눈치챈 정호는 2장을 사준 것이었다. 그 돈을 들고 진성이 집에 와서 자랑을 하고 있는 거였다.


"우리 아들이 사업을 잘하고 있구나."

"네, 너무 신나요. 이렇게 하면 정말 한 달에 몇 천은 그냥 벌 것 같아요."

"우리 진성이가 신난 걸 보니 엄마도 무척 기쁘네. 이렇게 즐거운 얼굴 오랜만이어서."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웃네. 우리 이제 식사할까?"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진성이 오랜만에 웃는 얼굴이 계속 보고 싶어서 혜정은 하고픈 말을 마음에 담아두기로 했다. 오랜만에 세상으로 나온 남식도 마냥 웃기로 했다. 옥장판 3장 팔고 사업이 번창할 거라 믿고 있는 어리석고 순진한 아들의 말을 오늘은 믿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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