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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Mar 02. 2022

이사 가는 날

내일 아침부터 이사를 해야 해서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렸다. 먼저 잠든 남편의 숨소리를 듣다 잠이 든 것 같은데, 새벽에 잠이 깼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났다.  

'이제 정말 마지막 날이구나.'

생각이 드니 갑자기 화장실 안의 모든 물건들이 새롭게 보였다.


이제 다시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정들었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다시 잠을 청했지만 파문이 일어난 마음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결국 새벽 4시에 몸을 일으켜 글을 쓰러 나왔다.


약 16평 정도 되는 공간을 4등분 해 놓은 집.

베란다가 없어 영덕의 강한 위풍을 매일 경험하는 집.

거실이 없어 안방에 각종 운동기구가 가득한 집.

다용도실이 없어 세탁기를 화장실에 두어야 하는 집.

수납공간 없어 서재, 옷방, 창고가 한 방에 있는 집.

빨래 건조를 위해 제습기와 선풍기가 동원되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집.

고양이가 새를 물어와 현관에 깃털을 다 뜯어 놓는 집.

주소가 어정쩡해서 배달음식 시키려면 집 밖에서 대기 타야 하는 집.

주말마다 집 바로 옆에서 모임 하는 학생들로 인해 하루 종일 드럼 소리를 들어야 하는 집.


집 같지 않은 집에 살면서도 크게 불행하진 않았다.

내 집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벌판.

산들바람이 이는 곳.

강아지가 뛰어다니고 고양이가 곤히 잠든 곳.

서너 사람이 살 수 있는 작은 나무집.

작은 풀꽃들로 가득한 정감 넘치는 곳.

거실 난로에서 굴뚝으로 연기가 퐁퐁 올라오는 곳.

사시사철 맑은 날씨에 따뜻한 곳.

아무 일을 하지 않고 매일 놀아도 괜찮은 곳.


그곳에 나는 살고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남편의 마음.


그를 만나기 전,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기대는 걸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뭐든 다 해주고 싶어 하는 그에게 처음엔 적응이 잘 안 됐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 희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일을 함께 겪고 지나오면서 진심으로 어떤 모습이든 용납해주는 그를 통해 많은 치유를 받았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는 그의 마음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놀러만 갔는데 뭘 하고 놀아도 아무 말하지 않고, 되려 같이 놀아주는 그의 마음속에서 자주 머물게 되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집 지을 나무도 옮겨놓고 강아지와 고양이도 데려다 놓은 모양이다.


이사 갈 마음의 준비를 미루고 미루다 이사 하루 전, 어제 아침부터 드디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포장이사이긴 하지만 귀중품들을 따로 챙겨놓는 일, 남의 손이 타면 싫을 것 같은 물건들을 미리 정리해두었다. 처음에는 신나서 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흘러 저녁쯤 되니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짜증을 부리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한 남편은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말했다.


'아이고, 우리 나오미. 어서 쉬어. 수고 많았지. 몸살 나겠다. 얼른 쉬어.'

'쉬긴 뭘 쉬어. 아직 덜 했어. 힝!'


그러자 남편은 달려와서 남은 게 뭔지 물어보고 같이 하기 시작했다.

툴툴거리던 나는 이내 잠잠해졌고, 대강 마무리를 하고 나서 쉬면서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새로 들어가게 될 집은 훨씬 넓고 깨끗하고 아파트라서 집 같은 구조다. 수납공간도 많아 깔끔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자라면서 이사를 정말 자주 다녔다. 11살 이후로는 상처받기 싫어 마음을 꽁꽁 묶어 두었다. 자주 바뀌는 터전에 적응하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정든 곳을 떠나는 느낌이 너무 새로웠다. 찡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마음이 가슴을 두드리니 눈물이 핑 돈다.


우리 부부는 남편 직장 사택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우리의 염원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곳에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로 인해 매일 불편하거나 괴롭다 느껴지지 않는 , 내가 사는 집이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이사를  앞에 두고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글을 시작했지만, 남편 마음속에 지어둔  집이 건재하므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게 되든  평온하고 안전할 것임을 오히려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 맘껏 아쉬워하고 서운해해도  마음조차 보듬어  사람이 있기에.


(이미지 출처: Pixabay@Phil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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