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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해 Jan 03. 2021

영화보다 영화같은

버드 박스

위키피디아


<<버드 박스>> (넷플릭스, 2018)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추천한 영화였다. 여자아이가 나오는데 톡 튀어나온 이마가 우리 아이를 닮아 너무 귀엽다면서. 처음 보았을 때도 감동 있었지만 아이가 영화 속의 아이처럼 다섯 살이 되고, 코로나로 우리 삶에 재앙이 온 이후 다시 보니 샌드라 블록의 마음과 상황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엄마로서 보는 <<버드 박스>> 는 영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맬러리(샌드라 블록)는 아이를 갖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었지만 어쩌다 아이를 가지게 된다. 출산이 다가오자 그 아이를 원치 않는 그녀에게 의사는 입양을 권한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데 우연히 마주친 벽에 머리를 박는 사람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데리러 온 동생마저도 무엇엔가 홀린 듯 자살한다. 이후 세계는 아수라장이 된다. 살아남은 몇 명의 사람들이 한 집에 모인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재앙이 생긴 원인도 생각해보고 살아남기 위한 방도를 찾는다. 그곳에는 맬러리와 임신 주 수가 비슷한 올림피아도 함께 머무르게 된다.


임신한 상태에서 이런 재난이 닥치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까? 맬러리와 올림피아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출산이 임박하면 가만히 있어도 다리는 코끼리처럼 붓고, 몸도 무겁다. 축복과 기대로 출산을 기다려야 할 때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걱정과 스트레스로 제정신이 아닐 것 같은데, 의외로 맬러리는 담담하다. 아마 맬러리는 나처럼 간절히 원하던 아이가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저런 위기가 과연 영화 속의 위기라 말할 수 있을까? 최근에 우리 현실에도 있었다. 고열이 나는 임산부를 어느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아이를 사산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코로나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열이 나는 사람들은 진료를 거부당한다. 집 안에 갇혀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 왜 우리 모습 같을까? 지금 우리 현실이 디스토피아 영화 같다.


맬러리와 올림피아는 거의 같은 시간에 출산한다. 그리고 올림피아는 갑자기 집에 들어온 정신이상자로 인해 억지로 보지 말아야 할 악령을 보게 되고, 창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그녀가 몸을 던지기 전에 맬러리는 간절하게 올림피아에게 아이를 달라고 한다. 정신이 홀린 상태에서 올림피아는 아이를 겨우 맬러리에게 준다. 그녀가 모성과 악령 사이에서 사투하는 그 미묘한 고통이 화면 속에 가득 찼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다른 이의 도움으로 맬러리는 두 아이와 함께 살아남는다. 핏덩이 둘을 안고 있는 맬러리의 마음은 어땠을까? 몸은 회복도 안 된 상태에서 자신의 몸보다 더 먼저 지켜야 하는 갓난아이 둘을 안고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던 맬러리를 보니 가슴이 아프다.


나는 자연 출산을 시도하다 중간에 위험해져서 제왕절개를 했다. 처음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마취가 다 풀리지 않아 기억이 잘 안 난다. 남편이 찍은 영상을 아이는 눈을 감은 채로 꼬물꼬물 젖을 찾아 먹는다.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막 모성애가 솟아났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열 달을 뱃속에 품었다고 해도 이제 막 태어난 아이는 퉁퉁 부은 얼굴로 이상해 보인다. 내 몸속에서 이런 생명이 나왔다니 낯설고 실감도 안 난다. 출산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기만도 바쁘다.


모성애는 아이를 키우면서 생긴다. 하루하루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몸이 점점 회복될수록 사랑이 커진다. 사랑이 커지는 만큼 작은 생명체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커진다. 태어나자마자 잘린 탯줄로 낯선 존재로 느껴졌던 아이는 다시 보이지 않는 탯줄로 나의 일부가 된다. 실제로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몇 년 동안 아이의 세포가 엄마 몸속에 남아 있기도 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아이를 싫어하던 맬러리는 변한다. 그 변해가는 맬러리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된다. 그녀는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다. 아이들이 잘못될 경우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냉정해진다. 아이들을 지키기위해 (악령이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보이', '걸'이라고 부른다.


희망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마로서 걱정이 너무 커서 그 과도한 걱정으로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것뿐이다. 이런 맬러리의 모습은 예전 어머니의 모습이다.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하지만 삐뚤어질까 봐 엄하게 키우던 어머니들. 한국 엄마라면 충분히 공감할 모습이다.


맬러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눈가리개를 벗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가르친다.


"마스크 절대 벗으면 안 돼."


밖에 나갈 때마다 아이에게 신신당부하고 조금이라도 벗으려고 하면 난리를 치는 내 모습과 맬러리가 오버랩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눈가리개를 벗으면 죽는 것처럼 마스크를 벗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상황이 슬프고, 당혹스럽고, 두렵다.


이들은 집을 떠나 안전 가옥을 향한다. 안전할 것 같던 집이 더는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령을 보아도 죽지 않는 정신이상자들이 빈집을 찾아다니고, 사람들을 보면 죽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사를 보니 아프리카 등 일부 국가에서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먹고 살기가 힘들어져서 도둑질하고, 불 지르고 강도질을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지금 코로나 사태가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식료품과 전기가 없다면 지금 상황도 당연히 저렇게 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https://www.google.com/amp/s/amp.belfasttelegraph.co.uk/life/weekend/what-malorie-and-the-kids-did-n

정신이상자들을 피해가다 톰은 죽고, 맬러리는 아이들과 강 하류로 이동해야 한다. 강을 건너려면 누군가 앞을 봐야 한다. 누가 볼 것인가? 쳐다보는 맬러리에게 '걸'은 울먹이며 자신이 보겠다고 한다. 이 장면에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자신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알아 저런 말을 한 거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몇 초간 망설이다 맬러리는 다 같이 안 보기로 결심한다. 낳지 않아도 '걸'은 이제 맬러리의 딸이다.


이 대목에서 정인이가 생각난다. 생후 16개월에 숨진 정인이. 입양된 작고 예쁜 아이는 양부모의 학대로 장기가 찢어지고 창자가 끊겨 죽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가 작고 여리고 소중한 만큼 내가 낳지 않아도 아이가 소중하다는 걸 알 텐데.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낳은 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조차 생각도 못 할까? 영화 속 악령이 씌지 않는 정신이상자들. 그들은 영화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다. 정인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셋 다 죽을 수 있지만 함께 하는 걸 택한 맬러리와 아이들은 마침내 안전 가옥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희망과 함께 이름을 갖는다. 영화처럼 현실도 해피앤딩이길. 맬러리가 가진 버드 박스처럼 코로나 혹은 정신이상자가 가까이 오면 알려주는 버드 박스가 나에게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라고 보기엔 너무나 현실 같은 영화. 버드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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