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 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든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재봉 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 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갯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 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 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하는밤, 나무의 탯줄이 보고 싶었다 뭉텅이로 발견되는 꽃의 사체를 쥘 때 알았던 거지 비어버린 자궁에 벚꽃이 피고 사라진 언니를 생각했어 비가 호수 속으로 파열하는 밤에 말이야 물속에 비친 것은 뭐였을까
언니가 떠난 나라에선 계절의 배를 가른다며? 애비가 누구냐니, 사생하는 문장으로 들어가 몸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야 떨어지는 비를 타고 소매로 들어간 것이 내 민낯이었는지 알고 싶어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출처> 문학동네 2020.09.10
시인 김희준은 1994년 9월 10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로 만 스물여섯의 시인. 2020년 7월 24일 불의의 사고로 영면했으니 만 스물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하니 이것은 시인의 유고 시집. 시인이 태어난 날이자 시인이 떠난 지 사십구 일이 되는 날에 출간되어 시인 없이 어쩌다 우리끼리 케잌위에 촛불도 불지 못하고 돌려보게 된 시인의 첫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제목 끝. 쉼표 하나
시식평>
왜 난 장례식장의 육개장이 이토록 맛있는 걸까 양은 들통에서 뜨겁던 것은 위로 식은 것은 아래로 뚜껑을 열기 전 대류하는 공간 속에서 고사리는 고사리대로 무는 무대로 무른 상태까지 몰아가며 우려내는 벌건 국물에 적당히 식은 밥 한 덩이를 말아서 먹으면 왜 그토록 세상은 평화로워지는걸. 입안으로 고스란히 씹히며 사라지는 모든 행간과 문장들. 혼자서는 말도 꺼내지 못한 슬픔의 살갗. 신은 아름다운 걸 먼저 탐하는 거였구나 나는 아직도 기다리는 거였구나. 아직 끓지도 않고 무르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