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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멀어지고 끝내 다정했던.

아무 일 없는 햇살아래 마음이 말랑해지는

by 적적


가을 햇살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괜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날 있잖아요.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냥 목소리 한 번쯤 듣고 싶은 그런 날.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서 얼굴에 닿는데, 그 온도가 참 묘하죠.

따뜻한데 이상하게 쓸쓸해요. 밝은데도 마음 한쪽이 비어 있는 느낌.

그런 날엔 세상이 잠깐 멈춘 것 같기도 해요.

그럴 때마다 생각나요.

왜 아직도 그 사람이 떠오를까. 다 지난 일인데.


11월 둘째 주의 햇살은 유난히 오래 머무는 것 같아요.

여름의 잔재가 다 사라지고, 겨울이 막 문턱에 도착한 그 시기.

빛이 묘하게 따뜻하죠.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아요.

그 애매한 온도가 좋아요.

인생에서 그런 ‘사이’의 온도가 오히려 진짜였던 순간들이 많잖아요.

그때도 그랬어요.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날도 이런 햇살이었어요.

테라스가 있는 카페였죠.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커피잔 옆에는 반쯤 탄 담배 하나.

그 얼굴 위로 가을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어요.

그날 이후 계절이 수십 번 바뀌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장면만은 조금도 낡지 않아요.

그땐 마흔아홉이었어요.



사랑이란 게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던 시기였죠.

근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몰랐어요.

그 나이가 되면 다들 그런 착각을 하잖아요.

모르는 걸 아는 척하고, 아는 걸 모르는 척하고.

사랑에 대해서도 그랬어요.



그 사람과 나는 애매한 사이였어요.

연인이라 하기엔 뭔가 부족했고, 친구라 하기엔 마음이 너무 노출돼 있었어요.

그건 마치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공기 같았죠.

아직 차갑진 않지만 따뜻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온도.

그날 카페에서 마주 앉았을 때, 그 온도를 버티지 못해서 괜히 엉뚱한 말을 했어요.



햇살이 참 좋네요.



그 사람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잠시 웃었어요.



그러게요. 이런 날은 그냥 살아 있다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그 말이 오래 남았어요.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어요.

사랑이라는 게 꼭 함께 있어야 하는 건 아니더라구요.

그 사람이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놓일 때가 있잖아요.

그게 다행이었던 거예요.


그날 이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누가 먼저였는지도 기억 안 나요.

그냥 서로 동시에, 조용히 멀어졌죠.

다시 연락하면 뭔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렇게 끝났어요.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다른 도시로 이사했고, 일도 바뀌었고, 사람들도 바뀌었죠.

그런데 신기하게, 이런 햇살을 보면 그 침묵이 아직 유효한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웃음소리 나, 커피 향이나, 그날의 공기 같은 게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요.



비 오던 날이 하나 생각나요.

같이 걷다가 그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말했어요.



비가 내릴 때마다, 누군가를 잃어버렸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잘 몰랐어요.



지금은 알아요.

사람을 잃는다는 건 꼭 헤어지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그냥 마음속에서 조용히 사라져요.

아무 예고도 없이, 아주 부드럽게.


가끔 그 사람 SNS를 봐요.

진짜 가끔이에요.

새 사진이 올라와 있으면 이상하게 안심이 돼요.

아, 잘 지내는구나.

그게 다예요.



그 사람이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걸 확인하면, 그날 하루는 조금 덜 외롭죠.



40대의 사랑은 좀 달라요.

젊을 때처럼 뜨겁지 않은데, 이상하게 더 깊어요.

크게 타오르진 않지만 오래 남아요.

말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지는 마음 같은 거요.

그 불빛이 작아도, 여전히 마음 한쪽에서 타고 있잖아요.

그게 남는 거예요.



가끔 생각해요.

그때 그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계절의 착각이었을까.

근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 순간의 마음이 진짜였다는 게 중요하죠.

사랑이든 착각이든, 한때 누군가를 진심으로 바라봤다면 그건 충분하잖아요.



오늘도 카페 창가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어요.

빛이 유리잔에 반사돼서 반짝이는데, 그게 참 예쁘더라고요.

그 사람 생각이 또 났죠.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마 어딘가에서 이 햇살을 보고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요.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잖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그냥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날.

가을 햇살이 너무 좋아서, 괜히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날.

아무 이유도 없는데 마음이 말랑해지는 날.

그 사람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라요.



우린 왜 이렇게 자꾸 끝 얘길 할까요?



그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죠.



끝을 얘기해야, 시작이 얼마나 예뻤는지 알잖아요.



그 말이 참 그 사람 같았어요.



아마 그때 이미 알고 있었겠죠. 우리가 오래가진 못할 거라는 걸.

그래도 이상하게, 그 말 덕분에 마음이 편했어요.

완벽하지 않아서 좋았던 사랑이었어요.

그 이후로 사랑을 대하는 방식이 좀 달라졌어요.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그 순간의 진심만 믿게 됐어요.

사람 마음은 늘 변하잖아요.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란 것도, 이제는 조금 알겠어요.



오늘처럼 햇살이 좋은 날엔 다 괜찮아 보여요.

그때의 어리석음도, 지나간 시간도, 사라진 사람도.

빛이 다 감싸주잖아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랑이란 건 결국, 사라져도 여전히 그리워할 수 있는 용기 아닐까.

그 용기로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기다리고, 또 햇살을 맞는 거죠.

언젠가 아주 먼 훗날,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때 그 사람과 있었던 계절이 참 따뜻했어요.


그 한 문장으로도 충분하잖아요.



가을 햇살이 너무 좋아서, 그냥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인생이고, 사랑이잖아요.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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