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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자리의 색들

얇아진 공기 두꺼워진 낙엽.

by 적적

11월 셋째 주의 공기는 유난히 얇아진다. 숨결이 닿기만 해도 금이 갈 것 같은 공기 속에서, 가을은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듯 한 겹의 찬 비를 내린다. 세상은 그 비 한 줄기에도 쉽게 흔들릴 만큼 민감해지고, 바람은 이미 겨울의 겉면을 미리 들춰 보이며 골목의 곡선마다 얇게 걸려 있는 낙엽들을 차례로 떼어낸다.

그 순간, 도시의 나무들은 자신이 품고 있던 계절의 증거를 우두둑 떨구며 땅 위로 해방시킨다. 그 낙엽들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편지처럼 젖은 도로 위에 흩어지고, 비는 그 편지들의 글자를 지워 나간다. 글자를 잃은 낙엽들은 제 몸의 색으로만 말을 한다. 바스러지기 직전의 빛깔로 계절의 마지막 목소리를 남기는 것이다.

비에 젖은 낙엽은 형태보다 질감이 먼저 느껴진다. 바람에 말라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끝에 부서지던 것들이, 수분을 머금자 갑자기 무게를 가진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발밑에서 눌려진 낙엽이 길게 늘어지고, 그 얇은 표면 아래 숨겨져 있던 잎맥의 선들은 물 위에서 빛을 잃은 금속처럼 무표정해진다. 그 무표정함은 기묘하게도 포근하다. 무언가가 완전히 종막을 준비할 때 갖는 침착함, 더 이상 휘둘리지 않으려는 결심 같은 것이 담겨 있다. 계절의 끝에서는 풍경조차 단단해지거나 차분해지기 마련이다.



찰나처럼 떨어지는 낙엽들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언제나 느린 동작으로 기억된다. 나무에서 이탈하는 순간에는 속도도, 방향도, 형태도 모든 것이 제각각인데, 눈에는 이상하게도 은근한 여유만 남는다. 찬 바람이 잎의 가장자리를 파고들고, 그 순간 잎은 자신이 들고 있던 마지막 색조를 바람에게 바친다. 그렇게 떠밀리듯 떨어지는 낙엽은 공중에서 잠시 멈춘 듯한 착시를 남긴 후 아래로 내려온다. 그 착시 속에서 사람들은 무언가 묵직한 감정을 읽는다. 잔향처럼 오래가는 이별의 움직임, 지나가버린 계절의 인사 같은 것들. 그러나 정작 낙엽은 어떤 감정도 품고 있지 않다. 생은 이미 뒤로 밀려났고, 남은 것은 떨어지는 속도와 무게뿐이다. 감정은 바라보는 이들의 몫이다.


비는 낙엽의 퇴장을 돕는 조력자처럼 보인다. 마른 낙엽이 가지에 남아 있을 때는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비가 잎의 틈새로 스며들면 사정이 달라진다. 금이 가는 듯한 묵직한 방울이 모서리를 눌러, 견고해 보이던 잎도 결국 자신이 매달린 자리를 포기한다. 그것은 마치 오래 견뎌온 무언가가 마지막 단서 하나에 의해 무너져버리는 순간과 닮아 있다. 찬 비 한 번이면 충분하다. 작별의 형식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하게 완성된다.



골목의 풍경은 비 내리는 오후가 되자 천천히 색이 빠져나간다. 간판의 빛은 흐림 앞에서 빛을 잃고, 길가의 건물들은 물기 어린 벽면을 통해 잿빛을 띤다. 그러나 이 색 바램 속에서 오히려 풍경은 더 선명해진다. 눈을 자극하는 것들이 사라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젖은 흙의 냄새, 그 위에 얹혀있는 낙엽의 얇은 향, 낙엽과 낙엽이 포개질 때 나는 종이 같은 마찰음. 이 작은 감각들이 모여 도시의 깊이를 다시 쓰는 것이다. 11월의 비는 풍경에서 채색을 빼앗는 대신 감각의 결을 선물한다.



젖은 낙엽은 소리도 달라진다. 마른 낙엽은 걸음을 질척하게 만들지 않는다. 잘게 부서지는 잔소리 같은 소음으로 계절을 흩뜨린다. 하지만 비에 젖은 낙엽은 부서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참아내듯 눌리고 또 눌린다. 발걸음이 그 위를 지날 때마다 낮은 숨소리처럼 스며드는 소리가 난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무언가가 뒤에서 조용히 따라붙는 듯한 소리. 이 계절에서는 가장 작은 소리조차 쉽게 잊히지 않는다. 소리 하나가 온 풍경의 긴장을 바꿀 수 있다.



거리의 사람들은 이 시기에 보폭이 달라진다. 우산 끝을 따라 흘러내린 물방울이 지면에 떨어지는 순간을 피하듯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낙엽을 밟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피하려다가 더 많은 낙엽을 건드린다. 11월의 도시는 이렇게 엉뚱한 동작으로 가득하다. 의도의 반대로 흘러가면서도 결국 계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 이것 또한 가을의 풍경이다. 인간은 언제나 계절보다 느리고, 때로는 계절의 장난에 가장 쉽게 휩쓸리는 존재들이다.



시간이 낮게 가라앉는 늦은 오후가 오면 낙엽의 기운도 달라진다. 비는 그칠 듯 말 듯, 하늘은 연한 철빛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 무채색의 시간대에 낙엽은 오히려 더 강렬해진다. 노랑과 갈색의 경계에 있는 잎들은 어둑한 빛 아래서 마치 불씨처럼 보인다. 타오르지 않으면서도 남아 있는 열기. 이미 식었지만 형태만큼은 분명하게 남아 있는 온도. 낙엽은 그렇게 마지막 자세를 유지한다. 생의 온도가 모두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 빛을 조용히 눌러 피워내는 것처럼.



비가 끝난 후의 거리는 낙엽이 만든 지층으로 뒤덮인다. 젖은 잎들이 포개져 길의 형태를 왜곡한다. 발밑에서 들리는 소리는 더 낮아지고, 색의 층위는 더 복잡해진다. 겹겹이 쌓인 낙엽들은 바람이 잠시 잦아든 틈을 타 서로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밀어낸다.


이 움직임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 수준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느릴 뿐 멈추지 않는 생의 미세한 동력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움직임들. 비에 씻긴 낙엽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서로의 형태를 바꾼다. 이 미세한 변화가 계절의 결말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모든 풍경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된다. 11월 셋째 주의 가을은 그런 순간들로 가득하다. 비가 내리고,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이 지나가고, 사람들의 우산이 흔들리는 장면들. 이 평범한 움직임들은 계절의 마지막을 압도적인 디테일로 만든다. 거창한 사건 없이도 풍경은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떨어지고 젖고 흩어지는 자연의 모습만으로도, 계절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또렷하게 증명한다.



비는 곧 멎겠지만, 비에 젖어간 낙엽의 감각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11월 셋째 주의 가을은 그렇게 인사를 건넨다. 비 한 줄기의 냉기와 낙엽 한 장의 온도로 자신을 설명한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방식으로, 떠남의 형식을 지키는 법을 아는 계절처럼.


세상은 이 인사를 매년 같은 방식으로 마주하면서도 매번 새로운 감정으로 받아들인다. 낙엽이 떨어지는 모양이 매년 다르듯, 그 인사가 남기는 감각 또한 언제나 조금씩 다르게 번진다.



찬 비는 결국 멈추고, 바람은 밤의 결로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직 가을이다. 젖은 낙엽이 지면 위에서 은근한 온도를 품고 있는 시간, 비에 씻긴 공기 사이로 가을의 마지막 숨이 스며드는 저녁. 그 짧은 순간에 계절은 인사를 마친다. 그리고 뒤돌아 서기 전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기듯 얇은 공기 속에 흔적을 남긴다. 그런 방식으로.



11월 셋째 주의 가을은 찬 비로 인사를 마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9e9POwhJ9w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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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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