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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현 Sep 11. 2024

저승길에 사이렌 소리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엠블란스를 타고 이송되는 동안 쉴 새 없이 울려대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는

'내가 죽어서 저승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2014년 7월 4일,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엄마와 함께 논에서 일을 하는 도중 강하게 쪼여오는 가슴통증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아버지가 심장질환인 것 같다며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는 전화였다. 며칠 후 아버지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심장내과에서 검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검사결과 아버지는 심장질환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암 일수도 있다는 말에 덜걱 겁이 났다. 내심 암은 아니길 바라며 검사를 진행했지만 폐암 4기라는 충격적인 진단 결과가 나왔다.


 아버지는 그동안 크게 아픈 적이 없이 비교적 건강했다. 술과 담배는 이미 이십여 년 전에 모두 끊은 상태여서 아버지가 폐암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폐암은 특별한 전조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이상 폐암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환자들이 몸에 통증을 느끼고 병원을 찾게 되는데 그때는 암 4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경우였다.

시골에 살고 계신 어른들이 대부분 그렇듯 크게 아프지 않은 이상 병원에 가는 일은 드물었다. 아버지는 사고로 크게 다치신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를 빼곤 병원에 간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아프지도 않은 멀쩡한 사람이 뭐 하러 병원을 가냐는 주의였다. 그러다 보니 검진할 기회조차 없었다. 자식으로서 신경을 못쓴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는 현재 아버지 몸상태로 봐서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단계라고 했다. 재차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현재 상황에서는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는 게 죄송하다며 애써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도 했다. 보통 폐암 4기 환자는 약 1달 안에 사망한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 후 아버지의 왼쪽 팔에 참기 힘든 통증이 시작되었다. 암세포가 왼쪽 팔을 짓눌러서 오는 통증이었다. 의사는 굉장한 통증일 거라고 했다. 주치의는 모르핀 주사를 처방해 주었다. 그 통증은 주기적으로 찾아왔고 병원에서는 통증이 올 때마다 모르핀 주사를 처방해 주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음날 여러 가지 추가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를 마치고 아버지와 병실에 있을 때 주치의는 진료실로 나를 불렀다. 주치의는 아버지의 전신 엑스레이 사진 결과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전신에 곳곳에 검은색이 보였다. 검은색은 바로 암세포라고 설명했다. 아버지 몸 곳곳에는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한 사진이었다. 아버지 몸이 이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에 나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치의는 병원에서 더 이상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고향에 내려가서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것이라고 퇴원을 권유했다. 일주일 후에 아버지는 먹는 약과 패치 진통제 처방을 받고 퇴원다.




 고향으로 내려가고 이틀 후 아버지가 복통이 있어서 우선 가까이 사는 막냇동생이 사는 지역의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날밤 동생과 함께 병원을 찾아갔다. 다행히 아버지는 상태는 그리 나 빠보이지 않았다. 단지 속이 불편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서울아산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래서 그날 오전에 퇴원을 하고 부모님을 공항동 우리 집으로 모셨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하루 머무는 동안 어깨통증과 속이 불편한 탓에 편히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아침 식사를 준비했지만 속이 불편하다며 식사를 하지 못했다. 병원에 아버지 상태를 알리고 동생 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검사 결과 아버지의 복수에 물이 차있었다. 복수에 물이 차는 것은 암환자에게 생기는 질환이라고 했다. 그 결과를 들은 나와 엄마는 복수에 물이 찬 것도 모르고 아무런 조치도 없이 이틀 동안 머물렀던 그 병원을 원망다. 잠시 후 아버지와 함께 복수를 빼내기 위해 치료실로 이동했다. 담당의사 아버지 등에 호스가 연결된 긴 바늘을 등에 꽂아 넣었다. 곧바로 복수에 차 있던 물이 호스를 통해 반투명 플라스틱 통 안으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의사는 나에게 복수가 다 빠지면 알려달라고 했다. 의사 지시에 따라 나는 아버지 뒤에 앉아 복수가 빠지는 걸 지켜봤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지난 이틀 동안 복수에 물이 차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란 생각을 하니 진작에 서울병원에 모시지 못한 게 아버지한테 너무 미안했다. 물통 반을 채우고 나서야 배에 찬 복수가 다 빠져나왔다. 당장 병실로 이동해서 쉬어야 했지만 빈 병이 없어서 우선 응급실 병동 침상에 누워 대기해야만 했다. 다행히 그날 밤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부터 금식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물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식도까지 암세포가 퍼져 있기 때문에 자칫 음식물이나 물을 마시다가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수액으로 음식물과 물을 대신했고 물은 입안을 헹굴 수만 있게 했다.

그날부터 나는 아버지가 물로 입안을 헹구려고 할 때면 물을 넘길까 무서워"아버지 절대 물을 넘기면 안 돼. 헹구기만 하세요. 꼭"이라고 아버지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에서는 최종적으로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가 크게 의미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최대한 아버지의 통증을 줄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이틀 동안 방사선 치료를 했다. 아버지는 무언가 치료를 하고 있다는 것에 조금은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삼 일째 되는 날 아버지가 급격히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다행히도 이틀 후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이틀 정도 아버지의 몸 상태 지켜보던 주치의는 이제 아버지가 살아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고향으로 내려가 그동안 함께 지냈던 동네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드리라고 했다.


 다음 날 오전 퇴원을 앞두고 소식을 전해 들은 서울에 살고 있는 몇몇의 친척들이 병실을 찾아왔다.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동안 1층에서는 아버지를 긴급이송해 줄 엠블란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친척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아버지는 이동 침상에 누운 채로 엠블런스로 옮겨졌다. 엠블란스가 출발하면서부터 사이렌을 켰다. 의료원에 이송되기까지 약 1시간 반 동안 사이렌소리는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 요란한 사이렌 소리 덕분에 도로의 차들이 길을 잘 비켜주었고 엠블란스 기사의 민첩한 운전실력 덕분에 약 한 시간 십여분 만에 의료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의료원에 오는 동안 엠블란스에서도 무사히 잘 견뎌주었다.

아버지는 엠블란스를 타고 이송되는 동안 요란하게 울려대던 사이렌소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럽던지, 내가 죽어서 저승 가는구나. 저승 가는 길에 들는 소리인 줄 알았다니."

아마도 아버지는 엠블란스 사이렌 소리에 죽음을 맞이하고 저승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의료원에 도착해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병실에 입원한 후 왠지 아픈 사람 같지 않고 한결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가 의료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네 어른들은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병실을 찾았다. 나는 어른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병실 밖 복도에 앉아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떠난 뒤에 병실을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때 내게 굉장히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사람들이 전부 내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 같."

아버지 본인은 이따금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힘들어했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곧 세상을 등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이 들었으리라. 그런 자신에게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대하는 동네 어른들의 말들과 애처로운 눈빛들에서 매우 섭섭함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물을 마시지 못한 시점부터 약 일주일 동안 얼음을 얼린 시원한 생수병을 손에 쥐고만 있었다. 그 물로 입을 헹구기만 할 뿐 목으로 넘기지 못했다.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낮에 병실에 있다가 동생과 교대하면서 두 달 전 내 결혼식 앨범을 들고 근처 사진관에 들러 아버지 영정사진을 주문했다. 다음날 오전에 사진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잠시 시골집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는데 새벽 1시쯤 동생으로부터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병실에 가보니 아버지는 침상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거동도 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리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담당의사는 아마 오늘을 못 넘기실 것 같다고 했다. 전날 아버지가 깨어 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아버지는 통증이 올 때마다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팔 통증은 여전히 아버지를 괴롭혔다. 담당의사에게 진통제를 놔 달라는 것 외에는 아버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진통제를 맞고 나서야 아버지 얼굴엔 다시 평온함이 찾아왔다.


 오후 3시쯤, 아버지의 피부에서 조금씩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몸이 서서히 식어갔다. 이제 아버지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4시경 평온하던 아버지 얼굴이 또다시 심하게 일그러졌고 왼쪽 팔에도 경련이 일어났다. 의식이 없음에도 아버지는 그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당담의사에게 진통제를 투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담의사는 이번에 진통제가 들어가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으니 신중하게 결정해 달라고 했다. 더 이상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가족과 상의를 끝에 가시는 길 편안하게 보내드리기로 하고 의사에게 그 뜻을 전했다. 얼마 있다가 아버지의 얼굴은 편안함을 되찾았고 약 한 시간 후 아버지는 이승에서의 긴 여정을 끝내고 영면에 들어갔다.




2014년 8월 3일 오후 5시경 아버지는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정확히 한 달만에 73세 일기로 세상과 작별했다.

주변에서는 아버지가 자식들 고생 안시켜려고 빨리 돌아가신 것 같다고들 했다.

엄마는 이 좋은 세상 제대로 한번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며 니네 아버지 너무 불쌍해서 어쩌냐며 한탄하셨다.


평소 나는 삶은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고 그래야만 꿈을 이룰 수 있고 그래야만 멋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서는 그런 말들이 내겐 별 의미 없이 다가왔다.

꼭 삶을 치열하게 살아갈 필요도 없고, 꼭 꿈을 이룰 필요도 없으며, 꼭 성공할 필요도 없다고.

꼭 삶을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꿈을 이룰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결국 죽으면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결국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언제 가는 세상과 단절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기왕 사는 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해보고 싶은 거 해보고, 놀아보고 싶으면 놀아보고, 먹어보고 싶은 거 먹어보고, 가보고 싶은 곳은 가보자고.


오늘이 즐겁다고 내일이 반드시 즐거우리란 법은 없지

그래도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삶을 살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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