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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현 Sep 21. 2024

어쩌다 진학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아

최단신 45번, 하마터면

 중학교 입학식날 반과 번호를 배정받았다. 1학년 4반으로 배정되었고 번호는 45번이었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번호는 분명 한자릿수여야만 했다.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담임선생님께서 정해준 45번을 받았다. 나랑 키기 엇비슷한 친구 한 명도 내 뒷번호 46번을 배정받았다.

입학을 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내 키에 어울리지 않은 45번을 받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45번과 46번은 등록금을 못 낸 학생들이었다. 여차하면 제명하기 수월한 뒷번호로 배정해 둔 것이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할 만큼 우리 집의 경제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걸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1년 동안 최단신 45번으로 지냈다. 다행히 2학년 때부터는 제 키에 맞는 번호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때 등록금을 마련 못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아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마터면...




"대학은 무슨, 기술 배워서 돈 벌어야지."

 누나는 중학교 바로 옆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일반고였지만 2학년부터 인문계반과 실업계반으로 나뉘었다. 집에서 집안 형편상 대학까지 보낼 여력은 없었고 그저 취업해 돈을 벌길 바랐다. 누나는 집 형편을 알다 보니 여지없이 실업계 반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2학년 때부터 1등, 2등을 했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입학력고사를 칠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오로지 취업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누나를 생각해 보면 그 부분이 참 아쉬운 대목이었다.


 나 역시 중학교 3학년이 되니 고등학교 진로가 고민이 되었다. 부모님 보다 나 스스로 고민을 먼저 한 것 같긴 하다.  우리 중학교 학생들은 거의 95% 이상이 농사꾼의 자식들이었다. 어른들은 자식만큼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해서 은행, 사무, 기술직 같은 직업을 갖길 바랐다. 부모님 역시 같은 생각 었지만 어떻게 해야 기술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입시정보를 알아볼 만큼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자식들 배골지 않게만 하는 것이 당시 최우선 과제였다.

내 진로선택은 3학년 때부터 인기가 있었던 공업고등학교 진학하는 것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걸 알고 난 후 당장 대학진학보다는 전문기술을 배워 얼른 돈을 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난 무조건 기술을 배워 취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최우선이었고 대학은 생각조차 못했다. 동네 형 누나들이 대학에 갔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각이 없었던 것도 그런 영향도 없지 않아 있었다.

 도시에 있는 공고에 진학하겠다고 하니 엄마와 아빠는 '그려 잘해봐'라고 격려는 해주었지만 누나처럼 집에서 가까운 일반고등학교를 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한 해, 누나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대기업 생산직 취업을 했다.

 



공고 입시전형은 중학교 3학년 1학기 내신성적으로만 당락이 가려졌다. 학급성적 순위가 40% 안으로 무조건 들어야 원서를 쓸 수 있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공고 입학원서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선생님은 합격이 가능성이 높은 학교를 추천해 주었다. 다행히 내가 염두에 두었던 학교에 입학원서를 쓸 수 있었다.

 면접을 보고 얼마 후 토목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1 지망 건축과는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어찌 되었든 공고에 합격했다는 것에 기쁠 따름이었다. 또한 일찌감치 입학을 확정 지어서 12월에 있을 전국연합고사 시험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서 너무 좋았다.


 토목과는 수학과 아주 밀접한 학과였다. 나는 수학에 잼병이었다. 고등학교 학업 성적은 거의 바닥을 길 정도로 좋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형편없는 내 성적에 '너 공부하면 잘할 것 같은데 왜 이래?'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사실 중학교까지야 시험공부를 안 해도 기초학력만 있으면 벼락치기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토목은 기술학문이다 보니 평소 공부를 게을리하면 벼락치기는 통하지 않았다. 점차 학업성적은 떨어져만 갔고 결국 뒤에서 2등까지 내려갔다. 사실 그 성적표는 충격이었다. 내가 꼴찌에서 발발 길 줄을 몰랐다.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닥친다고 하지만 뒤에서 꼴찌 2등은 충격자체였다. 아무튼 시간이 흘렀고 드라마틱하게 성적이 올라간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하위권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이었다.


공고는 여름방학이 끝나면 2학기에는 전원이 현장실습을 나가야 했다. 난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대기업에 현장실습을 배정받았다. 말이 현장 실습이지 일을 정말 못하거나 크게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곧 취업으로 이어졌다.

그 해 8월 29일 함께 배정된 6명의 동기들과 대기업 임시직으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계약직이라는 용어 대신 임시직이라 칭했다.



 

학벌이 뭐라고.....

 회사에서는 하반기가 되자 인사이동 준비가 한창이었다. 기존 정규직은 승진을 하게 되고 임시직은 정규직 전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시기였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는 재료시험실에는 8명 중 정규직 2명, 임시직 6명이 근무를 했다. 정규직 비율이 매우 낮았다. 나와 경리누나를 제외한 4명 중 단 1명만이 정규직 전환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부서장이었던 차장님은 4명 중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하고 산업기사 자격증이 있는 2년 차 C대리를 정규직 전환자로 정하고 본사에 서류를 올렸다.

그런데 당시 분위기상 후보는 누가 봐도 O과장이었다. 최고참이었고 차장님과도 오래 같이 근무한 사이었다. 그날 O과장은 당일 점심때 술을 마시고 들어와 차장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사무실에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던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비정규직의 설움을 피부로 처음 느꼈던 장면이었다.

차장님은 아마도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높은 4년제 출신을 정규직으로 추천했을 것이 분명했다. O과장님은 전문대 졸업자였고 신참한테 학벌로 밀린 것이었다. 하지만 C대리도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지 못했다.

 공부팀에서는 B대, S대 출신 정규직 주임과 대리는 각각 대리, 과장으로 고속승진을 했다. 그때 이 상황을 지켜보며 씁쓸해하던 정규직 만년사원 한 명이 있었다. 그는 고졸 사원이었다. 현장 측량팀을 이끌고 있었고 만년 사원이다 보니 회사에서 직함은 기사였다. 승진한 공무팀 직원보다 입사 선배였지만 그해에도 진급을 하지 못했다. 학벌 앞에서는 연차와 실력은 무용지물이었다. 지금도 물론 그러하지만 실력보다는 학벌이 우선시되던 사회였다.

 



 우리 부서는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거나 날씨가 추운 날에는 공사현장보다 시험실에서 업무를 보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시험실에 일이 없는 날에는 종종 공무팀 업무를 도왔다. 공무팀 요청으로 동기와 2층 사무실에 올라갔다. 책상에는 교각 설계도가 펼쳐져 있었고 설계변경이 필요해 치수의 합을 내달라는 단순한 일이었다. 그때 선배들이 최근에 있었던 진급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입사한 공무팀 C대리님은 일을 마치고 야간대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난 그땐 이렇게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왜 야간대학을 다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C대리님은 자기 말고도 직원들 중 야간대에 다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말해주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다니는 이유는 바로 승진 때문이었다. 승진을 하려면 4년제 학벌이 필요했다. 우리나라가 지금 학벌 없는 사회를 외치고는 있지만 실상은 학벌중시 사회라며 여기선 전문대라도 나와야 그나마 사람취급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곧 최종학력 고졸이 될 나에게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와 동기에게 핫바리 전문대라도 꼭 진학하기를 권유했다.




진로를 바꾸다.

 어렸을 때부터 나름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연필스케치를 많이 했다. 교과서는 그림 낙서로 지저분했다. 중학교 때는 미화부장도 맡기도 했고 중학교 미술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는 미술에 소질이 있으니 미술학원에 다녀볼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부모님에게 학원을 보내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비록 취업을 위해 공고로 진학을 선택했지만 그때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토목과가 아닌 디자인과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고 지방 전문대에 두 곳에 원서를 냈다. 디자인과는 실기시험이 있었는데 두 학교 모두 정밀묘사 시험이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정밀묘사는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다음 해 2월 29일 자로 18개월의 회사생활을 마감하고 3월 2일 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나는 토목 전공자에서 디자인 전공자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 전공을 살려 현재 직업을 갖게 되었고 그것으로 삶을 유지하고 있다.

하마터면 국졸이 될뻔했던 내가, 고졸이 될 뻔했던 내가, 대학 갈 생각조차 없었던 내가, 대학을 졸업한 걸 보면 삶은 참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낀다.


간혹,

그때 회사 선배님이 나와 동기에게 일을 도와달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때 전문대라도 진학하라고 권유를 안 했다면,

그때 그 말을 듣고도 생각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때 그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지 모른다. 운이 좋았다면 정규직이 되었을지도.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만약은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을 가고 있을 뿐.


언제가 세월이 흐르면 또 다시 진로를 바꿔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 선택을 잘했노라고 얘기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p.s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기회를 준 30년 전 그 두 분의 선배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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