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라현 Sep 14. 2024

이어폰 없는 세상

조용한 세상

 요즘 길거리든, 버스든, 지하철이든, 어딜 가나 유년층과 노년층을 제외한 연령층의 대부분의 사람들 귀에는 이어폰이 끼워져 있다. 마치 신체의 일부인 양.

 



 고등학생 시절 어딜 가든 카세트플레이어와 이어폰을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 지금으로 따지면 스마트폰과 같은 필수품이었다. 브랜드도 없는 카세트플레이어였다. 이어폰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생 신분으로서는 고가 브랜드 제품을 구매할 여력은 없었다. 주변에 즐비한 전파사에 가면 저렴한 카세트프레이어와 이어폰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비록 저가제품이었지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카세트플레이어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음질이 다소 떨어지는 이어폰이어도 좋았다. 그냥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나이에 음질 퀄리티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정품보다는 복제품이 넘쳐났다. 어딜 가나 '짜가가 판을 치던 세상'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대중가요 음반은 정품보다 복제품이 더 많이 풀렸다. 그야말로 저작권은 개나 줬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정품의 4분의 가격으로 최신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빌보드가 있었다면 대한민국에는 길보드가 있었다. '길보드'는 길거리에서 팔리는 판매량을 말하는 것이었다. 길보드에서 대한민국 인기가요순위가 판가름날 정도로 그만큼 길거리에서 팔리는 복제음반의 판매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방증했다.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정품에 대한 의식 수준은 딱 그랬다. 유명 가수의 음반이 출시되면 바로 다음날 정품과 똑같은 복제품 테이프가 길거리 리어카에 버젓이 깔려있었다. 길거리 여기저기 리어카에 달린 스피커로 따끈따끈한 신곡들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보니 제 가격을 주고 정품음반을 사는 사람들은 드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을 짝퉁왕국이라고 칭하지만 그때 대한민국은 딱 지금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나 역시 길보드에서 히트곡을 모음집이 나오면 사서 들었다. 우선 여러 신곡들을 미리 들어보고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그 가수의 음반테이프를 구매했다. 그렇게 구매한 음반테이프와 음반 CD는 100여 개였다. 당연히 오래 듣고 소장하기 위해 사 모은 것이었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노래도 있었고 너무 플레이어에 끼웠다 뺐다를 반복하다가 긁혀버린 CD도 여럿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그 옛날가수 음반들은 고향 우리 집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그 음반들은 플레이를 할 장비도 없어진 탓에 있으나 마나 한 처지가 되어있다.


시간이 흘러 군을 제대하고 보니 세상이 탈바꿈되었다. 학교는 물론 각 가정에 인터넷과 PC가 빠르게 보급되었다. 이제는 CD와 테이프가 없이도 컴퓨터에서 인터넷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개발되면서 CD음원을 손쉽게 MP3 파일로 변환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MP3플레이어가 카세트플레이어와 CD플레이어를 밀어내었다. 그뿐 아니라 개인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휴대폰으로도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음악과 동행해 왔던 카세트플레이어와 CD플레이어는 그 효용성을 잃게 되었다.

이제 온라인에서 손쉽게 음원을 들을 수 있게 되면서 음반시장의 판매량은 리어카 길보드 때보다 못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제 마니아가 아닌 이상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과거 심심치 않게 영광을 누렸던 밀리언셀러 가수들은 더 이상 출현하지 못했다.


단순히 리어카에서 컴퓨터로 도구만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 파급력은 길보드는 비할 깜냥도 못되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개나 줬던 저작권 수준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기점으로 대한민국에서도 조금씩 저작권 개념이 개선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 록, 메탈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오랫동안 그 전자음이 가득한 시끄러운 음악을 이어폰을 통해 즐겼다. 때론 영어공부를 한다며,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뉴스, 영어회화를 이어폰을 통해 들었다. 어디 이동할 때는 항상 이어폰은 귀에 꽂혀있었다. 그렇게 아주 오래도록 이어폰은 신체의 일부인 양 없어서는 안 될 장착도구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을 타고 음악을 듣기 위해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날따라 줄이 심하게 꼬여있었다. 이어폰을 줄을 잘 풀리지 않았다. 꼬인 줄을 풀다가 문득 굳이 꼭 음악을 들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만 이어폰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을 끊겠다는 생각을 하니 그동안 매번 꼬여있는 이어폰줄을 푸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 보니 출퇴근 시간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것도 지겹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는 조용한 출퇴근 시간을 가져보겠노라고 생각하니 안 그래도 소음으로 가득한 찬 세상인데 그 시간만큼은 귀를 편안히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길거리를 그냥 걷기만 해도 위험한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자동차, 오토바이, 킥보드, 자전거 등 각종 이동수단으로부터 안전을 위해서는 이어폰을 내 몸에서 꼭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깟 음악 몇 곡 듣겠다고, 그깟 영어 몇 마디 듣겠다고 절대로 내 안전과 이어폰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내 신체의 일부였던 이어폰을 벗어던진 지 7년째,

그렇게 난 이어폰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좋아라 했던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아니 시끄러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암튼 취향이 예전 같지 않다.

예전 휴대폰이었다면 내가 좋아하는 뮤직리스트가 가득했을 텐데, 지금 내 휴대폰 안에는 그 흔한 음악파일 하나 들어있지 않다.

예전엔 일을 하더라도 음악이 틀어 있어야 일을 했을 정도였지만, 요 몇 년 간 그렇게 음악 틀고 일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음악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다. 요즘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예전만큼 아니라는 뜻이다. 아마 세월이 흘러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카페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시끄럽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곳은 되도록이면 피한다.

아무리 유명한 곳이더라도 내 고요함을 방해하는 곳이라면 왠지 그곳은 내키지가 않는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왠지 조용한 곳을 찾게 된다.


요즘 잦은 이어폰 사용으로 인해 청장년층에서 소음성 난청을 앓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부디 건강하고 안전을 삶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 이어폰 없는 조용한 세상을 경험해 보길 바란다.


이전 07화 저승길에 사이렌 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