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한국 현대사:1959-2014, 55년의 기록》

현대사의 한가운데서

유시민, 《나의 한국 현대사:1959-2014, 55년의 기록》, 돌베개, 2014



나는 한때 시대의 흐름이니, 사회 풍조니 그런 것들에 휩쓸림 없이 살아가기를 소망했다. 나만 굳건하면 안 될 것도 없다고 여겼다. ‘88만 원 세대’니, ‘N포 세대’니 하는 말도 듣기 싫었다.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또래라는 이유로 한데 묶어 부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개개인의 상황이나 환경이 저마다 너무 달라서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24년 12월 3일 밤, 나는 내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국회의사당의 유리창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언젠가 그랬듯 제도가 이 땅 위 사람들의 자유를 옥죄기 시작하면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영화 <1987>의 한 장면처럼 지하철역 앞에서 몸수색을 받는 나와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4월 4일이 지나고 보니 예고 없이 한바탕 큰 시험을 치른 듯한 기분이 든다. 시험 범위는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 지난 10년 사이, 한 번은 국정 농단·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또 한 번은 내란 혐의로 총 두 명의 대통령을 파면한 헌법재판소는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설치되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한 것도 이때다. 최근 국방부가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대통령이 직에 복귀해 2차 계엄을 요구할 경우 불응하겠다”라고 밝힌 배경은 여기에 있다. 비록 위기는 있었지만 이 책 《나의 한국 현대사:1959-2014, 55년의 기록》에서 저자 유시민이 평가했듯 우리 헌법은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 선진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으며 따라서 이번 시험에서도 그 취지에 맞게 그럭저럭 잘 기능했다고 여겨진다.


시험은 치렀지만 광장도 머릿속도 여전히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저자의 말대로 “사건의 한가운데를 덮친 것은 혼돈”이며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태의 전모가 명료하게 정리되고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혼돈의 한가운데에서도 냉정함과 이성을 잃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예를 들면 ‘저항권’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들리는 저항권이라는 단어가 이 책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저자는 역사학자 칼 포퍼의 말을 인용해 저항권이란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누군가의 주장처럼 ‘헌법 위에 존재하는 권리’라거나 ‘사법 판결이 자기 마음에 안 들 때 마음껏 심술부릴 권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제18대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탄핵되기도 전에 출간된 책임에도 시사점이 있다는 건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실, 특히 반성 없는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우리를 위협한다는 진리를 반증한다.


책 제목이 ‘“나의” 한국 현대사’인 만큼 비록 현대사를 이야기하더라도 조금 더 에세이에 가까우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수많은 참고 서적과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풀어낸 유시민의 현대사 평론이다. 저자 자신이 목격하고 부딪혀 온 현대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은 논리적인 분석에 실감을 더한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책에서 다룬 시기는 1959년부터 2014년까지여서 이후에 있었던 대통령 탄핵을 저자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못내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2021년에 이미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 첫 번째 대통령 탄핵 사건, 코로나 사태까지 두루 다룬다. 머지않아 추가 개정판도 출간되리라 기대해 봄 직하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제도에 대한 시험은 끝났다. 시험 결과는 “대체로 잘 기능하지만 보완이 필요하다”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약 60일 뒤면 행태와 의식에 대한 시험이 있다. 내가 밟고 서 있는 토대가 절대로 나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이번 시험, 신중하게 임할 수밖에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닥치는대로 끌리는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