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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May 14. 2018

보증금100에 월세28



이혼 이야기를 꺼낸 남편이 처음 내게 한 경제적 제안은 이러했다. 약 800만 원의 현금과 3개월 동안의 대출금 및 공과금 지원, 그리고 자동차. 우리 부부는 모든 수입과 지출, 자산 현황을 공유했기 때문에 신랑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방 구하고 자리 잡는 데까지 충분할 것 같아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집을 나온 그날까지 내 수중에는 100만 원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신랑의 대출 한도가 꽉 찬 덕분에 더 이상의 대출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저축액도 없었다. 일정 금액 모이면 차를 바꾸고 여행을 가는 둥 ‘내일’은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 다 잘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긍정만이 있었을 뿐.


결국 보증금도 없이 방을 보러 다녀야 했다. 원래 800만 원을 받기로 했을 때도 보증금은 10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 최소한으로 잡았지만, 실제로 800만 원이 있는데 보증금 100만 원짜리 방을 보는 것과, 800만 원이 없는 상태에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결혼하면서 충북 진천으로 내려왔다. 서울이나 부산처럼 대도시라면 다른 동으로 이사 가면 그만이지만, 이곳은 이사 갈 동네가 없다. 일자리가 도시만큼 풍부하지 않은데, 신기하게도 방값이 서울보다 더 비쌌다. 진정한 독립이자 휴혼을 위해서 나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나의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첫 번째 조건은 아이와의 거리였다.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 볼 수 있는 거리여야 했는데 최대 1시간으로 정했다. 최후 낙찰은 대전이었다. 강사라는 나의 직업 상 우리나라 중간에 위치한 대전이 딱이었다. 기차와 버스가 있으니 사방팔방으로 강의를 다니기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방값이 한몫했다. 보증금 100만 원부터 시작하는 원룸 월세를 처음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매물을 친구에게 보여줬을 때 친구는 내게 되물었다.
“보증금 1000만 원을 100만 원이라 잘못 올린 거 아니야?”


이 미스터리는 부동산에 직접 갔을 때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최저 보증금 100만 원, 최대 보증금 200만 원, 최저 월세 20만 원, 최대 월세 30만 원으로 잡고 방 매물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부동산 중개인은 아이를 대동하고 나타난 나를 보더니 당황해했다.

“전화 목소리로는 어린 여자 분인 줄 알고 20대에 맞는 방으로 세팅해놨는데…… 아이가 있으니 제 플랜을 다 엎어야겠네요.”


괜찮은 방으로만 보여주겠다는 그의 말이 무색하게 나는 방을 보면 볼수록 말수를 잃어갔다. 전혀 관리되지 않은 빌라 입구, 지은 지 30년은 넘어 보이는 삐걱대는 나무문의 향연, 세면대가 없는 화장실, 그래, 이게 보증금 100만 원의 현실이구나. 이번에 리모델링을 싹 해서 상태가 A급이라는 방에 들어선 나는 “정말 깨끗하네요”라고 맞장구쳤다. 하지만 나는 계단을 반 층 내려간 상태였고 창문은 내 머리 위에 달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는 기분은 참 오묘했다. 단 한 번도 창문의 위치가 내 기분을 좌우하리라 생각한 적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방은 좁지만 창문이 제 위치에 붙어 있었고 창문을 열었을 때 전경이 좋았다. 초등학교 뒤편에 위치하고 있어서 환경도 괜찮았다. 100만 원에 25만 원. 조금 누그러진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공인중개사가 내게 말한다.

“20대 여자였다면 안 좋은 거 몇 개 보여주고 마지막에 좋은 거 하나 보여줬을 텐데, 아이가 있어서 괜찮은 걸로만 보여드렸어요.” (20대 여자애였다면 나는 과연 어떤 방을 마주해야 했을까.)


처음으로 방다운 방을 만난 나는 “괜찮네요”를 중얼거리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이런! 신비스러운 옥색 빛의 세면대와 변기는 누런 녹이 흘러내리고, 변기는 앉으면 깨질 것만 같은 상태였다. 아, 정녕 100만 원의 보증금에는 무언가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쓰레기 더미인 입구를 지나치든지, 온몸을 구겨서 들어가야 하는 좁은 화장실이든지, 햇볕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반지층이든지.

“위치랑 상태가 좋아서 금방 금방 나가는 방이라, 주인아저씨가 화장실을 수리할 필요성을 못 느끼더라고요.”


공인중개사는 멋쩍은 듯 친절한 중계를 해주었다. 그야말로 나는 카오스 상태로 나의 차로 돌아왔고, 공인중개사는 사무실로 안내할 필요를 못 느꼈는지 중간에 인사를 하곤 헤어졌다.


방의 컨디션은 월세와 상관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월세 30만 원 이상을 지불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매달 나가는 대출금 50만 원과 각종 공과금만으로도 이미 고정지출 7-80만 원 예상이다. 딱 1년만 고생하고 더 좋은 집으로 옮기자는 나의 계획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그냥 40만 원 방으로 가? 고작 10만 원 차인데 방 컨디션 차이가 너무 크잖아.’


참담한 심정으로 다음 공인중개사를 찾았다. 사무실에 앉자마자 나도 모르게 넋두리를 했다. “방을 몇 개 봤는데 우울해지기만 했어요.”

공인중개사는 나를 이끌고 새로운 빌라촌으로 향했다. 그 동네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 대신 평지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서부터 기분이 나아졌다. 주차장도 ‘정식으로’ 구비되어 있었고 1층 공동현관문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인생이 다시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주하는 싱크대는 이미 익숙했다. 싱크대는 하이그로시로 깔끔하게 짜 맞춰져 있었고 심지어 중문도 있었으며 화장실은 깔끔했고 창고도 있었다. 방다운 방을 처음 본 나는 앞뒤 잴 거 없이 “이 방 할게요!”라고 소리쳤다. 200만 원에 35만 원. 내가 정한 상한선을 넘어선 금액이었지만 방에 들어올 때마다 우울해지는 것 대신 덜 쓰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단번에 계약서까지 쓰게 된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월세 35만 원의 비슷한 조건으로 방을 더 둘러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대전 방 투어는 이후 네 명의 공인중개사를 더 만나보고서야 종료되었다. 최종적으로 계약한 방은 100만 원에 28만 원이었다. 주방과 방은 중문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네모반듯한 모양이었고, 화장실 또한 ‘정상적’인 크기와 구조였다. 보증금 100만 원에 20만 원 월세를 구하면서 엄청난 시설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화장실에는 세면대가 붙어 있고 샤워할 때 사방 벽에 엉덩이가 부딪히지 않으면 되었다. 머리를 감기 위해 허리를 숙여야 할 때 그 공간이 변기통 위밖에 없다는 건 슬프지 않은가. 현관문 바로 앞에 주방이 위치한 건 상관없지만, 현관 타일에 서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건 곤란하다. 왜 우리나라 원룸 시공업자들은 사람을 난감하게 하는 구조로 집을 지어야만 했는가, 이 구조가 최상이었나에 대한 의문점만 남은 투어였다.


계약한 방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붙어 있었지만, 방 크기가 작았다. 하지만 10평은 되어 보이는 다락방 덕분에 단점이 상쇄되었다. 이날 저녁, 친구는 나에게 치킨을 쐈다. 우울해하지 말라며. 적당한 방을 구했다는 내 말에 “100만 원짜리 방이 방이겠는가” 한숨을 쉬던 친구였다. 아니, 이봐 친구. 나 다락방 딸린 방 가진 여자야,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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