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짜리 여행 8

부안 마실길 7코스,

by 강물처럼

아빠는 기승전결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소설 첫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나 다 이야기한다.

내가 아직 그 첫 문장도 쓰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도 어쩌면 주눅이 들어서 그러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압도되는 것을 즐기지 않는데 그것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주눅 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가 大家라는 말도 거의 입 밖에 내본 적 없는 것 같다.

프로라는 말도 별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물어오면 말하려고 했던 것도 까먹어버리는 이상한 습성이 나에겐 있다.

혼자서 좋아하는 정도에서 내 감상 폭은 가장 깊고 넓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것은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호숫가를 거니는 기분처럼 꿈결 같고 기시감 있는 먼 나라 이야기 같으며 분명하게 들리는 내 발소리여서 좋다.

가까이 있되 나를 침범하지 않게, 나에게 영향을 미치되 순전히 바람 같을 것을 요구하는 나는 나의 독재자다.

나는 나의 산림감시원, 나의 멜랑콜리한 수요일 오후 3시, 무엇을 시킬지 몰라 그냥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 말한 그 아메리카노의 향이면서 그 향이 올라앉은 테이블, 그 순간에만 존재했던 나의 나를 돌아보는 나의 걸음들 속에서 느껴지는 글자와 풍경이 나다.


다*이가 밝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피곤한 얼굴로 현관문을 들어선 아이가 가볍게 돌아간 자리에 흐뭇한 기운이 돌았다.

토요일 아침, 내가 했던 첫 번째 선행 善行인 것 같아서 금요일 저녁 아내가 얻어온 장미꽃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향이 없어도 꽃은 꽃이니까 토요일 오후, 우리가 집을 비울 테니 꽃처럼 피우고 있으라, 너 그리고 11월 8일의 시침과 분침들아.


토요일에 성당에 자주 빠져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산이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수녀님에게 따로 연락한다느니, 다음에 잘 참석하면 된다느니 그런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감정과 감정 위를 면면히 그리고 촘촘히 다스리는 입자들은 오늘 가만있어도 좋다고 출렁거렸다.

2주 만에 길을 나서는 상쾌함과 반가움, 즐거움이 소리 없이 흘렀다.

오늘 우리는 1시간 반을 차를 타고 가서 3시간을 걷다가 돌아올 것이다.

도중에 실컷 쉬면서 1시간쯤을 다 써버릴 것이다.

그런데 꼭 그대로 토요일 오후를 보냈다.

변산 중학교 앞에서 2주 전에 우연히 잡아 탔던 택시를 불러 거기 앉을 때 4시 40분이었으니까 예정대로 흘러가 준 셈이다.

11월 첫 주가 여기 남쪽에는 단풍이 절정에 이른다.

변산반도 일대는 알다시피 국립공원이다.

그곳에 지금 단풍이 짙어가고 있었다.

노승의 빈 머리에 서리라도 내린 양 내변산의 긴 줄기가 추적추적 내 시선을 끌었다.

흐린 늦가을에 어찌 그리 정답게 보이는가 싶어서 내소사로 걸어 들어가 머리라도 깎을 뻔했을 것을 갯내음으로 달랬다. 7코스는 바다보다 산 쪽으로 그리움이 뻗치는 것이 아무래도 해찰하고 말 것이다.

그대도 나와 같거든 길이라도 잃고서 서툰 길눈 탓은 말고 살살 걸어도 좋을 것이다.

곰소항은 멀리 있어도 눈에 보이는 거리니까 돌아서 가더라도 하나 늦을 것 없으니까 걱정도 하지 말고.

그 덕 德을 보고 떡 본 듯이 좋아하려나 모르겠다.

멀리 돌아가는 길, 갈대가 흔들리던 길에는 손에 잡히는 지난 일들이 다 돌아누워 철 지난 사랑 이야기로 피.었.습.니.다.


'높고 한가함을 사려면 금이 소용된다.'는 옛 선사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름대로 부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산이는 산이가 걸은 만큼, 강이는 강이가 걸은 만큼.

걷다가 부자가 된 사람들은 끝에 가서 불평하지 않기로 하자.

더 걸으려고도 하지 말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우리는 손뼉을 부딪혀 우리가 여기에 왔었다고 종을 울리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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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코스는 절정을 지난 어수선함을 정리하는 대목이었다.

감정도 추스르고 벅차거나 복잡했던 관계들에 순서를 다시 정해서 처음에 몰랐던 인연들에 대한 경의와 감사도 곁들이는 길이다.

그것은 오십이나 육십이 되었을 것도 같은 구성진 가락이다.

마리아 칼라스의 정열적인 목소리에 가을이 덧씌워진 음색이다.

사연을 알아보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말없는 동정이나 순수 같은 것들이 마실길 7코스에는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주워도 소용없는 그것들을 우리는 가을걷이 하는 농부들처럼,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그림처럼 추수했다.

오늘은 우리가 수확을 거둔 그런 날이었다.

노란 그 이파리들은 무슨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었을까.

ㄱ자로 꺾이는 그 길에서 잠시 쉬었던 우리는 가을이었을까, 우리였을까.

우리는 어느 별에서 서로 만나기로 했었던 사람들이 맞.습.니.다.


하루 또 즐거웠고 거룩했으며 잘 심심했다.

곰소 항을 지키는 그 조그마한 빨간 것을 등대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는 그 등대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러,

어느 날 밤에는 혼자서라도 차를 몰고 여기 와서 앉아있겠다.

바람이 별을 차갑게 때리는 겨울밤이면 더 좋겠다고 은근히 제임스 딘 같은 미소를 지어본다.

어디에서 봐야 좋을지 나는 아니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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