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가 막을 내렸다.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선거 이후 불어닥칠 후폭풍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8년 전에 한 차례 겪어본 바를 예방주사 삼는 수밖에.
미국 차기 대통령이 결정되자 얼마 전에 읽었던 한 칼럼(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에 등장했던 '백인 남성 중심의 근대적 인본주의'란 문구가 퍼뜩 떠올랐고, 고故 김종철 선생이 미국 대학원 유학 시절 에피소드에 관해 쓴 글도 덩달아 떠올랐다. 두 글은 미국 대통령 선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미국 일방주의를 선언한 차기 대통령의 행보와 자꾸 겹치는 건 어찌 된 영문일까. 무엇이 겹치는지를 구태여 어설프게 주절거리느니 읽는 이가 직접 느껴보는 게 더 낫겠다 싶어 이 자리를 빌어 두 글을 소개한다. 칼럼은 문구가 나온 대목부터 우선 소개하고 전문은 아래 링크로 달았다. 고故 김종철 선생 글은 발췌했다.
백인 남성 중심의 근대적 인본주의는 비인간과 인간, 여성과 남성, 몸과 마음, 무생물과 생물이 근본적으로 다른, 종속과 지배로 구분된 존재라는 틀 속에서 작동했다. 그 결과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훼손, 핵폭탄과 전쟁, 양극화와 혐오, 무한경쟁과 상대적 박탈감과 같은 전지구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엉켜 있기도 한 것이다.(<정끝별의 소소한 시선-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한겨레, 2024.10.20에서)
어느 날 야간수업을 듣고 제일 늦게 방을 나서던 나는 전등을 끄고 나오기 위해서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스위치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강의시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궁금해서 옆방에 가보았다. 거기도 스위치 같은 것은 없었다. 웬일일까? 나중에 들으니, 건물 전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전기는 중앙변전소에서 통제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밤낮없이 강의실이건 연구실이건 전기를 켜놓은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황당하고도 충격적인 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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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전기란 공기 같은 것, 즉 건물 속에 들어가면 그냥 늘 있는 것이어서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전기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의 삶과 자연이 망가지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생활구조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듣던 '협상 불가능한 미국식 생활방식'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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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구의 6.3퍼센트를 점하는 미국은 미국식 생활을 위해서 세계의 부 50퍼센트를 필요로 한다.… 미국이 윤리적인 외교를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을 침략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공언한 국제문제 전문가 조지 케넌의 발언이 나온 게 1948년이고 그 이후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라고도 했다. 미국에 공부하러 건너간 저자는 무척 심란했던 모양이다.
'미국식 생활방식'의 구체적인 진상을 목도하고, 나는 복잡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오늘날 대학이나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 터무니없는 미국식 생활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전세계로 확산하려는 목적에 봉사하는 문화적 제도에 불과한 것이며, 대학 내 소수의 비판적인 학자·지식인들도 근본적으로는 '충성스러운 야당'과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내가 미국에 무슨 공부를 왜 하러 왔는지 심히 모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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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지구환경에서 무한한 성장이라는 건 불가능하지만 미국식 생활방식은 통제하지 못하는 이기심으로 탐욕만을 좇는 절멸의 전형일 뿐이다. 문제는 공익이 아니라 사익 추구가 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매우 난폭한 논리인 신자유주의에 오랫동안 젖어버린 우리 역시 미국인 못지않게 미국화 되었다는 점이다. 각자도생만큼 서글프면서 암담하고 비극적인 말도 없지만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내뱉는 말이 되어 버렸다.
'미국식 생활방식' 앞에서 절망을 느끼던 필자를 위로해준 건 루돌프 바로라는 철학자였다. 바로는 원래 동독의 공산주의자였지만, 반체제 혐의로 구금됐다가 서독으로 추방된 이후 녹색당 창설기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고 이 무렵 '절멸주의'라는 용어로써 현대문명이 이미 집단자살체제가 되었음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통렬했다. "우리는 안전을 추구하되 무기를 버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학물질을 쓰지 않는 보건위생을 추구해야 하고, 산업적 시스템 바깥에서 생계를 강구해야 하며, 땅과 숲의 보존을 위해서 짐승고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생명의 적이며 사탄이다." 요컨대 우리 개개인이 특별히 악한 동기가 없더라도, 오늘날의 거대산업체제에 별생각 없이 순응하는 생활 자체가 가공할 악행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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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원래 인간생활에서 물자와 에너지를 흥청망청 소비하는 생활은 정상이 아니라 일탈이라고 해야 옳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구한 인류사에서 '경제성장' 시대는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문명비평가 루이스 맴퍼드는 고대 그리스가 자유와 자치에 입각하여 위대한 문명을 창조했던 기반에는 간소한 생활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문화와 가난은 쌍둥이"였다.
생명에는 빛과 밝음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어둠과 그늘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늘과 어둠이 없으면 수면도 휴식도 취할 수 없다. 전기를 꺼야 밤하늘의 별들도, 북극성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미국식 생활방식'의 지배 밑에서 별을 잃고, 침로針路를 잃은 채 방황하는 이 정신적 빈곤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김종철, 『발언 Ⅱ』, 녹색평론사, 78~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