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이고 막내딸이고 대학 진학을 앞두면 입을 맞춘 듯 물어오는 말이 있다.
- 아빠, 나 대학 안 가면 안 돼?
깎새는 망설이지 않는다.
- 너 마음 가는 대로 해. 대학 안 간다고 안 죽어. 차라리 대학 안 가고 그 4년을 네가 원하는 다른 무엇으로 채우면 더 효과적일 수 있지 않을까?
진심이다. 자식들 진로를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을 뿐더러 그런 일로 제 기운까지 탕진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는 깎새다. 저희들 인생이니 스스로 겪어 헤쳐 나가면 될 일이다. 방목한다는 마누라 핀잔이 드세지만 깎새 노선은 확고하다. 간섭하려 들면 양자가 피곤해질 뿐이다.
확고한 의지나 명확한 비전이 안 섰는데 대학 진학을 굳이 독려하고 싶지 않다. 학교, 과 선택은 부차적이다. 지엽 말단이 본질일 리 만무하다.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는 주의다. 물론 현실적이지는 않다. 대학 졸업장으로 사람 등급을 매기는 작금의 현실을 감안하면 돼먹지 않은 고집에 사로잡힌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이 이 시대 필수 사항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 어떤 유의미한 가치조차 설정하지 못한 채 4년이란 황금기를 통째로 날려 먹은 아비의 뼈아픈 전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되풀이해서 강조하건대 대학을 가든 안 가든 뜻대로 하라. 단, 꼭 대학을 가야만 한다면 왜 가는지, 가면 무얼 할는지 심사숙고하길 딸들에게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충고해준다.
고故 신영복 선생이 쓴 『강의』 (돌베개, 2004) 맨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이야말로 깎새가 아비로서 따라하기는 벅차면서도 꼭 그리 하고 싶어 마음에 새긴 자녀 교육관이다.
곽탁타의 본 이름이 무언지 알지 못한다.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낙타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탁타'라 불렀다. 탁타가 그 별명을 듣고 매우 좋은 이름이다, 내게 꼭 맞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버리고 자기도 탁타라 하였다. 그의 고향은 풍악으로 장안 서쪽에 있었다.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헤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강의』, 514~5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