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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ipio Nasica Oct 21. 2018

아크레(Acre) 공방전의 최후

1799년 4월 15~16일의 타보르(Tabor) 산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대규모 구원군을 산산조각낸 프랑스군은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이제 후방 걱정도 별로 할 필요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투르크 놈들 별거 아니다'라는 자신감이 프랑스군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아크레 성 앞으로 돌아와 포위전이 시작되자, 이 높았던 사기는 빠른 속도로 고갈되었습니다.  먼저, 어중이떠중이들로 구성되었다가 타보르 산 전투에서 산산조각이 난 '다마스커스군'과는 달리, 아크레 성 안의 농성군은 현대식으로 무장되고 훈련된 니잠므 제디드 (Nizam-i-Jedid)라는 신식 부대였기 때문에, 이들의 전투력은 거의 프랑스군과 맞먹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자파(Jaffa)에서 항복했던 투르크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에게 항복할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니잠 제디드의 훈련 장면... 정예부대든 뭐든 훈련병은 모두 촌티나 보여요.)



생각해보면 타보르 산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것도, 오합지졸의 적군이 우르르 무너져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이 포위된 아크레 요새에서는 도망친다고 살 길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투르크군의 사기는 높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확실히 결연한 의지로 지탱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화력은 오히려 포위군인 프랑스군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에 설명드린대로, 영국 해군이 프랑스군의 공성포들을 나포해주었고 또 영국 해군 포병들도 아크레 시 방위에 적극 개입했기 때문이었지요.  무엇보다, 말이 '포위된 아크레' 였지, 사실 이들은 외부와 단절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제해권을 영국 해군이 쥐고 있었으니까요.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포위당했다고는 하지만 등 뒤의 돈 강 너머로 계속 보급을 받고 있었던 것과 마탄가지 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해, 이 아크레 공방전의 참혹함이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런지 보도록 하시지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돈강을 건너 들어오는 소련군의 보급을 막으려고 독일군도 정말 애를 많이 썼지요.)



아크레 성 앞의 포위 참호로 돌아온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크레 성벽 위에서 빗발치듯 날아오는 대포알이었습니다.  어찌나 거세게 날아오던지, 이집트 학사회의 정식 회원이자, 그 열정과 유쾌함으로 장교들이나 병사들 모두의 사기를 돋아주던 카파렐리(Louis-Marie-Joseph Maximilian Caffarelli du Falga) 장군도 그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이 참호전을 진두 지휘하던 카파렐리 장군은 원래 라인강 전선에서 클레베르(Kleber) 장군 휘하에서 싸우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1756년 생으로서, 클레베르보다는 3살 어렸던 카파렐리 장군은 열혈 자코뱅(Jacobin)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직속 상관이었던 클레베르와는 달리, 역시 열혈 자코뱅이었던 나폴레옹과는 사이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요.  그는 무엇보다 나무로 된 의족을 단, 외다리 장군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왼쪽 다리는 바로 2년전, 1797년 라인강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에 맞아 잃은 것이었지요.  특히 이 장군이 유명해진 것은 이집트 원정군 병사들의 빈정거림 덕택이었습니다.  이집트에 상륙하고 나서 이집트의 황량함에 실망하고 투덜대던 병사들을 카파렐리 장군이 지치지 않은 열정으로 독려하자, 어떤 병사가 '카파렐리 장군은 이집트에 말뚝을 박더라도 개의치 않나봐.  어차피 한쪽 발은 이집트를 딛고 서더라도, 다른 한쪽 발은 프랑스에 대고 있으니 말이야' 라고 투덜거렸던 것입니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를 읽었다니, 저보다는 더 지성인이었던 카파렐리 장군)



어느날 밤 카파렐리 장군은 참호 속에서 부하들에게 '저 지점에 포격을 집중시키란 말이야'하면서 머리 높이 팔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날아온 대포에 그만 팔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장군은 즉각 후송되어 유명한 군의관 라리(Larrey)에게 팔 절단 수술을 받았습니다.  왼발에 이어 오른팔을 대포알에 잃은 장군은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상에서도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곧 그의 절단 부위에 괴저(gangrene, 상처가 썩어들어가는 것)가 생겨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최후가 다가왔다고 생각되자, 의식을 잃기 전에 몽테스키외(Montresquieu)가 지은 본문에 볼테르(Voltaire)가 붙인 '법의 정신' 서론을 읽어달라는, 정말 골수 자코뱅다운 유언을 남기고, 나폴레옹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둡니다.   (그 내용이 뭔지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뭔지는 몰라도 정말 멋져 보이는데요 ?)



(지금도 아크레, 즉 현재의 이스라엘 아코 시에 남아있는 카파렐리 장군의 묘입니다.  실은 이 묘는 빈 묘이고, 실제 카파렐리 장군의 시신은 훗날 프랑스 고고학 발굴팀이 아크레 주변의 발굴 작업하던 중에 발견되어 프랑스로 정중하게 이장됩니다.  어떻게 그 시신이 카파렐리 장군의 것인지 알아냈느냐고요 ?  그 프랑스군 시신의 왼쪽 다리가 나무로 된 의족이었거든요.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겠습니까 ?)



이렇게 화력의 열세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옵니다.  시드니 스미스가 지중해 함대를 아크레 지원에 돌리는 바람에 다소 느슨해진 이집트 항구 봉쇄 덕택에, 프랑스 해군의 페레(Peree) 제독이 이끄는 3척의 프리깃함이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고 마침내 하이파(Haifa) 남쪽 24km 되는 지점인 탄투라(Tantura) 항에 입항했던 것입니다.  이 3척의 프리깃함에는 아크레 포위군에게 전달될 3문의 24파운드 포와 4문의 18파운드 포가 실려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이제 약 40km의 육로를 통해 질질 끌어 수송되어야 했지만, 아무튼 이들이 도착하면 나폴레옹군의 화력 부족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지요.

그 사이를 놀면서 보낼 나폴레옹이 아니었지요.  '카파렐리 장군까지 전사하는 마당에 너희들은 뭘 하는 거냐' 라는 질책에 떠밀린 프랑스 공병대는 밤마다 용감하게 작업하여, 마침내 아크레의 중앙 성탑 밑에 지뢰를 설치하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이 과정 중에 많은 희생자를 냈지요.  드디어 4월 24일 아침 9시, 그 지뢰를 폭발시켜 중앙 성탑 일부가 무너지면서 작은 구멍이 뚫립니다.  이 구멍은 제대로 된 침투 돌격을 하기에는 너무 작았으나, 용감한 프랑스군은 상관하지 않고 돌격했습니다.  하지만 그 큰 폭발에 성탑이 흔들거림에도 불구하고, 성탑의 투르크군도 정말 용감하여 끝까지 수류탄과 돌덩어리를 던지며 맹렬히 저항했고, 특히 성탑이 거의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아예 불붙인 커다란 화약통 2개를 투척하는 무리수까지 둡니다.  이 화약통 2개가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성탑도 일부 파괴되었지만, 성탑에 붙었던 프랑스군을 산산조각 내었지요.  이것으로 이 4월 24일 돌격은 희생만 남기고 끝나게 됩니다.


(프랑스군의 공병 sapeur 입니다.  도끼와 앞치마가 트레이드 마크지요.)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간신히 프랑스군을 막아낸 것이고, 이제 즈음해서는 프랑스군이나 성내의 투르크군이나, 프랑스군의 공세에 투르크군이 결국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동안 아크레 방위에 있어 브레인 역할을 하던 펠리포(Phelyppeaux)가 5월 1일 사망합니다.  전사는 아니었고, 시드니 경의 기록에 따르면 과로와 뜨거운 햇볓에 장시간 노출된 결과 얻은 열병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펠리포의 생전 지시대로, 야간에도 성벽 위에 환하게 불을 밝혀, 프랑스 공병들이 야음을 틈타 성벽에 지뢰를 설치할 수 없도록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그런 펠리포의 조치로 프랑스 공병대의 활동이 주춤해졌지만, 그 효과도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5월 6일, 탄투라에 하역되었던 공성포 7문이 아크레에 당도한 것입니다.  이제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붐붐붐, 아크레 평탄화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셈이지요.  그러나 바로 그 날, 나폴레옹을 크게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집니다.  수평선 너머에 무려 30척의 함대가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지원군이 왔나 ?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역시 그럴리가 없었지요.  이 함대의 돛대들에는 오스만 투르크와 영국기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그 동안 이집트 침공을 위해 로데스(Rhodes) 섬에 집결해있던 하산(Hassan) 베이(bey, 장군)의 알바니아 부대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들이 상륙하기 전에 아크레를 함락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바로 다음날인 5월 7일 새벽부터 그야말로 맹공을 시작합니다.  당연히 탄투라에서 수송해온 대구경포로 집중 포격이 먼저 진행되었고, 그 대상은 여태까지 줄곧 집중 공격 대상이었던 중앙 성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중앙 성탑에 집착했던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중앙 성탑 뒤는 바로 제자르 파샤의 궁전 안뜰이었고, 그 궁전과 아크레 시내 사이에는 얇은 벽이 하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즉, 저 중앙 성탑만 뚫으면 시내까지 일사천리로 진격이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날 집중 포격을 받은 중앙 성탑은 그야말로 벌집이 되어, 상부 구조물이 거의 다 날아가버린 모양이 되었습니다.



(붐붐붐 쉐킷쉐킷 !!)



5월 8일 새벽, 드디어 프랑스 척탄병들이 다시 돌격해들어갔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쌓아놓았던 모래주머니와 동료 병사들 및 투르크 병사들의 시체를 해자에 던져 넣어 메꾸면서 성탑에 기어 올랐고, 벌집이 된 성탑을 아직까지도 지키고 있던 투르크군을 밀어내고 마침내 성탑 안으로 침투, 드디어 이 성탑에 프랑스 삼색기를 게양합니다.  그러나 투르크군도 정말 용감하여,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성탑 윗부분은 여전히 투르크 병사들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건 모두 자파(Jaffa)에서 나폴레옹이 저지른 포로 학살의 대가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 위기의 순간에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한 것은 약 8백 명의 영국 해군 및 해병대원들이었습니다.  이젠 무기도 다 떨어져서 프랑스군을 향해 돌덩어리를 집어던지며 저항하던 몇 안되는 투르크군을 대신하여, 영국군이 프랑스군의 앞길을 가로 막았고, 이들은 서로의 총구가 거의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무너진 돌더미를 사이에 두고 서로 총질을 해대며 접전을 펼쳤습니다.  이러는 동안 제자르 파샤가 직접 현장에 보충병들을 이끌고 달려와 간신히 이 위기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됩니다.  이제 성탑이 거의 허물어지고 또 점령되어 더 이상 가치있는 목표물이 되지 못하게 되자, 프랑스 포병대가 그 성탑과 연결된 성벽들을 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튼튼한 성탑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성벽은, 그동안의 지뢰 및 화약통의 폭발로 꽤 흔들린 상태라서 쉽사리 무너졌습니다.  이날의 포격으로 성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시드니 경의 기록에 따르면 무려 50명의 병사들이 횡대로 줄지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큰 공간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제 아크레의 함락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였습니다.



(Boys, it's WIDE OPEN !!!!)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후 일찍 맹장 란(Lannes)의 지휘 하에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투르크 군이 어디서 저항을 하겠습니까 ?  점령된 성탑 ?  무너진 성벽 위 ?) 무사히 무너진 성벽을 통과한 프랑스군의 선발대는 기세 좋게 제자르 파샤의 궁전 안뜰로 진격했고, 이어서 궁전과 시내를 구분하는 얇은 벽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아크레 시내로 침투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군 중에서 아크레의 함락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자르 파샤가 '잔인할 뿐 무능한' 노친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보입니다.  시드니 경의 기록에 따르면, 제자르 파샤가 전통적인 투르크군 방식을 적용하여, 프랑스군의 선두가 저항받지 않고 텅빈 궁전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적절한 순간에 병력을 측면 투입하여 그 허리를 끊고 성내에 갇힌 프랑스군을 모조리 척살한다는 작전을 짰던 것입니다.  이 작전은 그야말로 멋있게 성공합니다.  프랑스군의 선두를 이루었던 정예 척탄병들이 기세좋게 시내로 쳐들어간 사이, 그 뒤를 따르던 프랑스 보병들의 측면을 투르크 정예 부대들이 덮치자, 프랑스군은 크게 당황하여 주춤했습니다.  맹장 란이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으나, 그 자신도 목이 총탄에 꿰뚫리는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실려갔고, 다른 지휘관이던 랑보(Rambaud) 장군은 전사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의 진격은 돈좌되버립니다.

후방에 있던 프랑스군이야 우당탕탕 후퇴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미 시내까지 쳐들어간 용감한 척탄병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기세좋게 시내 거리로 달려들어간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리케이드와 이제 막 함대에서 내린 알바니아 정예 부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내 집집마다 울려퍼지는 이슬람 특유의 '히리리리~'하는 여인들의 콧소리가 섞인 함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기왓장과 함께 총격이 날아들었습니다.  사방팔방으로 적에게 둘러 쌓인데다, 어느덧 자신의 후방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척탄병들은 완강히 저항하며 모스크로 후퇴했습니다.  모스크 내부까지 살아서 후퇴한 척탄병들은 모두 200여명이었는데, 사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이 두터운 포위망을 뚫고 성 밖으로 탈출할 가능성은 제로였고, 식량과 탄약은 커녕 마실 물도 없는 모스크 안에서는 오래 버틸 수가 없었지요.  결정적으로, 자파에서 저지른 죄가 있었으므로, 이들은 항복한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것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워낙 완강하게 버티자, 오지랍 넓은 시드니 경이 중재하여, 항복하면 영국군이 투르크군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겠다고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시드니 경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프랑스군 병사들은 이 사실에 대해 두고두고 고마와했습니다.



(전에 보셨지요 ?  제자드 모스크로 불리는 아크레의 대 모스크입니다.  여기서 프랑스군이 농성했지요.)



1대10도 문제없다고 멸시하던 투르크군에게 보기 좋게 일격을 당한 프랑스군은 크게 풀이 죽었습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의 예스맨이었던 쥐노(Junot) 장군조차 참모 회의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크레 성내에는 중세 시대의 투르크군이 있고, 이를 포위한 것은 현대식 프랑스군입니다.  그런데 중세식 전술을 쓰는 것은 바로 우리고, 투르크군은 유럽식 전술을 쓰고 있군요 !"



(그렇쟎아도 심란한 나폴레옹에게, 쥐노 너까지 왜 !!)



5월 7일부터 시작된 격전은 이제 5월 9일로 접어들었습니다.  5월 8일의 격전이 너무나 치열했으므로, 양측은 모두 기진맥진하여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5월 9일 하루가 불안한 고요 속에 지나가는 중, 시드니 경은 나폴레옹에게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즉,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내어 '투르크의 대규모 구원군이 바다를 통해 또 오고 있는 중이고, 유럽의 반프랑스 동맹국들이 이집트로 원정군을 보낼 예정이라고' 협박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편지 따위에 흔들릴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크레 시내에 있을 제자르 파샤의 금고를 털어 그동안 밀린 프랑스군의 급료를 지불하고, 남는 돈과 장비로 주변 레바논인들을 무장시켜 이스탄불까지 쳐들어가겠다는 호언장담을 비서 부리엔에게 지껄였습니다.  실제로 시드니 경이 이날 성벽에 올라 주변을 망원경으로 정찰해보니, 인근 고지의 능선마다 레바논 및 시리아의 각 부족들이 (비록 콜라와 팝콘은 없었지만) 아크레 포위전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싸움은 중동인들이 다 하고, 생색은 영국인이 다 내지요.  이 그림을 보면 영국 장교 시드니 경이 무능한 투르크 병사들을 잘 지휘하여 나폴레옹을 무찌른 것처럼 보입니다.  나중에 로렌스라는 영국인이 또 '아라비아의 로렌스' 어쩌고 하면서 중동인들의 공로를 가로챘습니다.)



이는 나폴레옹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꿈꾸는 대로 이스탄불까지 진격하기 위해서는 인근 주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운집한 관중들에게 이 아크레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음날인 5월 10일 모든 것에 끝을 보기 위해 레바논 내륙으로 보내 투르크 지원군을 견제하도록 했던 클레베르(Kleber)의 부대까지 소환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나폴레옹은 이 5월 10일의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예 자신이 선두에서 지휘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참모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간신히 만류됩니다.  이는 결코 선두 지휘의 위험을 면피하기 위해 쇼를 벌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폴레옹 대신 선두 부대를 맡게 된 클레베르에게 나폴레옹이 내린 명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절대 선두에 나서지 말고, 후방에서 지휘하는 엄명을 내린 것입니다.  이 명령의 배경은 '내가 누리지 못하는 선두 지휘의 명예를 잠재적 경쟁자인 클레베르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유치한 질투심이었습니다.  자신은 물론 아들들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별의별 수를 다 쓰는 요즘 우리 사회 지도층들과는 정말 비교되는 일이지요.  (아, 우리나라에 과연 사회 지도층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나요 ?)



(주기율표 작성에 큰 공을 세운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모즐리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계 제1차대전에 자원 입대, 28세의 나이에 전사합니다.  지금도 영국 왕자들이 이라크나 아프간 같은 전쟁터에 실재 참전한다지요 ?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 및 국회의원 자제분들 중에는 몸이 편찮으신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에효...참...)



마침내 운명의 5월 10일, 프랑스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절대 선두에 서지 말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클레베르 장군은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하고, 검을 뽑아들고 선두에 서서 무너진 성벽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역시 오스만 투르크의 정예 부대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처럼 성내로 유인한 뒤 허리를 끊는 작전과는 정반대로, 이번에는 프랑스군의 의표를 찔러 아예 맞불 작전으로 나왔습니다.   즉, 투르크군이 오히려 무너진 성벽을 넘어 프랑스군이 파놓은 참호를 점령하고는 맹렬히 저항했던 것입니다.  이 바람에 북부 이탈리아 전선에서 나폴레옹과 고락을 같이 했던 봉(Bon) 장군도 전사합니다.  나폴레옹도 적진 가까이 접근하여 망원경으로 전투 상황을 파악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바로 옆에 적의 총탄이 날아와 부딪히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쓰러졌고, 참모들은 그가 총에 맞은 줄 알고 대경실색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악전고투 끝에 결국 프랑스군이 우위를 점해 프랑스군은 무너진 아크레 성벽까지 육박해 들어갔습니다.  나폴레옹 바로 옆에 있던 참모장교 라발레트(Lavallette)의 기록에 따르면 주변에서 대기하던 척탄병들이 나폴레옹에게 '빨리 돌격 명령을 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만만치 않은 적의 저항에 망설이던 나폴레옹이 마침내 돌격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들은 쏟아지는 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진격했고, 거의 무너진 성벽을 넘기 바로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그만 저지되고 말았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낀 해자 속에는 온갖 인화물질이 가득차 있었고, 지뢰까지 잔뜩 매설되어 있었는데다, 그 뒤로는 투르크군이 맹렬한 사격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용감한 프랑스군이라고 해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그 화염속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한편 이 장면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시드니 경은 프랑스 척탄병들이 진격하라는 나폴레옹의 무자비한 명령을 거부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전투의 꽃은 총검 돌격 ~ )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나폴레옹은 후퇴 명령을 내렸고, 프랑스군은 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물러섭니다.  이것이 나폴레옹의 마지막 아크레 공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결국 아크레 점령을 포기한 것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의 격전은, 아르콜레 전투를 승리로 이끌 정도로 강철 신경이었던 나폴레옹까지 질리게 만들 정도의 참혹한 전투였고, 이런 식으로 아크레를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일 것이 뻔했습니다.  게다가  지난 5월 9일 시드니 경이 편지를 보내 도발한 심리전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한 모양인지,  나폴레옹은 비워두고 온 이집트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어쨌거나 패전은 패전이었습니다.  아크레 점령에 실패한 것에 대해, 나폴레옹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나폴레옹의 기록에 따르면, '아크레는 더 많은 용사들의 피를 흘릴 만큼 중요한 전략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5월 10일 이후로도 10일 정도 공성포와 박격포를 동원해, 남은 건물들을 그야말로 갈아 뭉개버리겠다는 듯이 맹렬한 포격을 가했습니다.  특히 박격포로 약 1천발의 폭발탄을 집중 투하하여, 그렇잖아도 좁은 시내에 많은 인원이 집중되어 있던 아크레에 큰 인명 피해를 입힙니다.  하지만 이는 본격적인 공세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제 곧 시작될 철수 작전에서 들고갈 짐을 줄이기 위해 화약과 포탄을 다 소모하려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건 이미 여러번 보신, 1807년 코펜하겐에 퍼부어진 영국군의 박격포 공격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그 아래는 당시 박격포를 쏘던 영국 해군의 모습이고요.  당시의 bomb ketch의 모습을 제대로 그린 것 같지는 않네요.)



마침내 5월 21일, 나폴레옹은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패배를 미화한 뒤, 이집트로의 철수를 시작합니다.

"그대들은 한줌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무려 3개월 간 시리아의 심장부에서 작전을 펼친 끝에, 40문의 대포와 50개의 군기, 1만명의 포로를 노획했고 가자(Gaza), 하이파(Haifa), 자파(Jaffa), 아크레의 요새들을 갈아뭉갰다.  이제 목표를 달성한 우리는 이집트로 돌아간다."


실제로 이 3개월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오스만 투르크에 끼친 피해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중 2개월을 아크레에서 보냈는데, 아크레에서의 사망자만도, 민간인을 포함하면 약 1만5천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부상자는 빼고도 말이지요.  하지만 프랑스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이 3개월간, 프랑스군은 약 1천2백의 전사자, 1천명의 병사자와 2천3백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시나이 반도를 넘은 1만3천 중에 제발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8천5백명 뿐이었으니, 사상률이 무려 35%에 가까왔습니다.  정말 꽤나 비싼 값을 치룬 것이지요.

자, 시리아에서의 나폴레옹의 모험은 이제 끝이 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리아 원정의 클라이맥스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리아 원정의 절정은 아크레가 아니었거든요.  다음번에는 이번 원정의 절정,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이집트로의 후퇴 과정을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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