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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샤 Jan 26. 2022

Serendipity

위키백과에 따르면 세런디피티(serendipity[sɛrənˈdɪpɪti])는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특히 과학연구의 분야에서 실험 도중에 실패해서 얻은 결과에서 중대한 발견 또는 발명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 동명의 영화 세런디피디의 내용에 따르면 우연한 만남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종합하여 내 방식대로 결론을 내리자면 내게 세런디피티란 ‘생각지도 않았던 일로 행복을 느끼는 사건 혹은 기회’ 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전부터 승무원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파리, 로마, 런던 등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도시들을 더 많이 여행하고 싶어서였다. 넘쳐나는 문화유산과 환상적 이야기로 가득 찬 관광 명소들은 그 도시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고, 나는 그곳들을 꼭 가보겠다는 꿈을 꿨다. 그리고 이전의 여행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벅찬 감동과 설렘을 느끼고 싶었다. 사진이나 화면으로만 접하던 곳을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 간절히 바라던 곳을 내 발로 직접 디뎌 보는 것이었다. 

후에 꿈꾸던 그 도시들을 실제로 방문했을 때, 나는 실감 나지 않았고 정말 내가 이곳에 왔다는 생각에 가끔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유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며 도시를 둘러싼 그림 같은 풍경과 수많은 예술 작품들에 압도되기도 했다. 그런 유명한 도시들의 명성은 가히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한편, 관광 도시들을 다니는 사이사이에 가끔 아주 생소한 도시들을 갈 때가 있다. 스케줄에 그런 도시가 나올 때면 애초에 호텔 밖으로 나가기보단 그동안 밀린 피로를 풀어야겠다며 호캉스를 위한 짐을 꾸린다. 

책과 노트북을 챙기고 컵라면과 컵반, 휴대용 스토브, 그 외 군것질 거리로 가득 채우면서 어떻게 하면 더 알차게 호캉스를 보낼지 계획한다. 그런데 막상 도착했을 때, 날씨가 너무 좋다거나, 생각보다 안 피곤하다든가, 창 밖의 이색적인 풍경에 마음이 동한다든가 하면 '한번 나가볼까?' 하는 호기심으로 방을 나선다. 


기대도 하지 않았고, 전혀 생각도 못 해본 도시에서 아주 우연히 나섰다가 그곳의 매력에 흠뻑 취하고 결국엔 다시 오고 싶어지는 마음까지 들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런 날엔 마치 옷장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코트 주머니에서 돈을 발견했을 때처럼 매 걸음이 신나고 설렌다. 

바로 부쿠레슈티가 그런 곳 중 하나다.  


루마니아의 수도이자 영어로는 부카레스트(Bucharest), 루마니아어로는 부쿠레슈티라고 한다. 

세계 2차 대전 때 추축국에 가담했고, 패전 이후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90년에 민주화가 되었다고 한다. 거리 곳곳에는 여전히 공산국가의 어둡고 투박스러운 면모가 남아있기도 하다. 악명 높은 독재자였던 차우셰스쿠는 부쿠레슈티 전역의 많은 문화유산을 파괴하였고, 현재는 구시가지 주변의 몇몇 건축물과 개선문, 인민 궁전만이 부쿠레슈티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발칸반도에 위치한 나라임에도 인종과 언어는 라틴계이다. 그래서 거리를 걷다 보면 인종 구성이 주변 국가인 헝가리,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또 특이한 점은 동양인이 정말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어도 한국인은커녕 동남아시아인도 한번 못 봤다. 


동유럽의 겨울이 그러하듯 날씨가 매섭게 차가웠지만 값싼 물가 덕분에 우버를 마음 편히 탈 수 있었고, 부쿠레슈티의 웬만한 관광지는 작은 구시가지에 모여 있어서 걸어 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시가지 골목마다 루마니아 정교회의 독특한 교회 건축물과 그림을 볼 수 있는데,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같은 산을 오르는데 그저 다른 길로 오르고 있을 뿐이라던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결국은 같은 신을 믿는데 그 방식이 참으로 여러 모습이구나 싶었다. 수녀님으로 보이는 노년의 여성이 예배당 앞을 쓸고 있었는데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정교회 예배당이 유럽의 여느 가톨릭 성당과는 완전히 달라서 참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구시가지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다가 추위에 손발이 벌겋게 얼어갈 때쯤 마주친 반 고흐 카페는 아늑한 분위기와 함께 미술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고흐의 많은 작품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다만 예약하지 않은 홀로 여행객에는 커피 한잔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왠지 그게 평생을 외롭게 산 고흐의 삶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골목 끝에 위치한 서점에는 다양한 문구류와 책들이 즐비했고, 한 달 여를 찾아 헤매다 드디어 나는 마음에 쏙 드는 2022년 달력과 다이어리를 아주 생소한 도시, 부쿠레슈티에서 사게 되었다. 

고작 반나절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부쿠레슈티의 구석구석을 발길이 닿는 대로 살펴보았고, 그렇게 1월의 부쿠레슈티에서 만난 우연은 진한 사랑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찾아온 이 우연은 한동안 노동의 힘듦을 잊고 장점만을 계속 떠오르게 할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달엔 또 어떤 새로운 우연을 마주할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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