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서

바다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

by natflat

제주 해녀 할머니들은 물질을 나가기 전 바다에 인사를 합니다.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라고요. 이 작은 의례 속에는 서양의 저명한 생태학자가 평생 고민한 문제에 대한 답이 숨어 있습니다.


1968년, 한 편의 논문이 던진 질문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은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논문에서 충격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모두가 함께 쓰는 목초지가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각 목축업자는 자기 가축을 한 마리 더 풀어놓으면 그 이익은 자신이 다 가져가지만, 목초지가 황폐해지는 손해는 모든 사람이 나눠 가집니다. 그러니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축을 계속 늘릴 것이고, 결국 목초지는 망가져 모두가 망한다는 겁니다.


하딘은 이것이 인구 문제, 환경오염, 어업 자원 고갈의 본질이라고 봤습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명확했습니다. 공유지를 사유화하거나 정부가 강제로 규제해야 한다고요. 자발적 양심에 맡기면 양심 없는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냉소적 결론이었습니다.


이 이론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환경 정책 입안자들의 바이블이 되었고, 공유 자원을 민영화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게 전부일까요?


우리는 정말 혼자인가요?

하딘의 목축업자들은 완벽하게 고립된 개인들입니다. 각자 손익계산만 하고, 서로 대화도 협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어촌 마을에 가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서해안 갯벌 마을에는 “물때”라는 게 있습니다. 조수 간만에 따라 누가 언제 어디서 조개를 캘 수 있는지 오랜 관습으로 정해져 있죠. 이건 법으로 강제한 게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암묵적 약속입니다. 누군가 규칙을 어기면? 마을 회관에서 호되게 혼납니다. 벌금보다 훨씬 무서운 건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니까요.


이런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나” 대 “자연”으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갯벌”, “우리 바다”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여기는 아직 어린 조개가 많으니 3년 뒤에 캐라”라고 가르칩니다. 할머니가 죽고 나면 손녀가 또 자기 손녀에게 그렇게 가르치겠죠. 이게 바로 하딘이 놓친 것입니다. 인간은 원자처럼 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다는 숫자가 아닙니다

하딘의 논문에서 목초지는 그저 “자원”입니다. 가축을 먹이고 돈을 버는 도구죠. 그곳에 사는 풀, 벌레, 새들의 고유한 가치는 고려되지 않습니다. 이런 시각을 철학자들은 “도구적 자연관”이라고 부릅니다.


해양생태학자 입장에서 보면, 김 양식장 주변의 저서동물(갯벌 진흙 속 작은 생물) 연구 보고서를 쓸 때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지역의 저서동물 군집은 양식장 생산성에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 작은 생물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먹이를 찾고, 짝을 만나고, 천적을 피하면서요. 그들이 진흙을 휘젓고 다니면서 산소가 공급되고, 그들의 배설물은 영양염 순환에 기여합니다. 어떤 종은 다른 생물의 집이 되고, 어떤 종은 물을 정화합니다. 이 모든 것이 얽혀서 “생태계”가 됩니다.


인간의 경제적 이익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연결망을 우리는 “생물다양성의 내재적 가치”라고 부릅니다. 바다는 물고기를 뽑아내는 ATM 기계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경이로운 생명 공동체죠.


시간은 우리 생각보다 느리게 흐릅니다

하딘의 목축업자는 “지금 가축 한 마리를 더 풀면 내년 수입이 얼마 늘어난다”라고 계산합니다. 1년, 길어야 2~3년 단위의 계산이죠. 그런데 생태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갯벌 생태계를 예로 들어볼게요. 처음 몇 년간은 조개를 과도하게 캐도 별 문제가 안 보입니다. “봐라, 아직도 많지 않냐”라고 사람들은 말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으면 갑자기 붕괴합니다. 조개가 사라지고, 조개를 먹고살던 새들이 떠나고, 갯벌의 진흙 구조가 바뀌고, 물이 탁해집니다. 일단 이렇게 되면 복구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무인도의 생태계를 연구하다 보면 더 긴 시간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 섬의 생물 종 구성은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언제 대륙에서 떨어져 나왔는지, 과거에 어떤 기후 변화를 겪었는지, 인간이 언제 들어왔는지가 모두 현재의 생태계에 새겨져 있죠.


그래서 전통 사회는 “다음 여러 세대를 생각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지금 내가 내리는 결정이 증손자의 증손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라는 거죠. 분기 실적을 걱정하는 현대 기업의 시간관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할머니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딘은 공유지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수백 년간 공유 자원을 성공적으로 관리해 왔습니다. 단지 그들의 목소리가 학계에 잘 들리지 않았을 뿐이죠.


제주 해녀 공동체를 생각해 보세요. 각 마을의 해녀회는 물질 구역을 정교하게 관리합니다. 이 바위는 1구좌, 저 해역은 2구좌 이런 식으로요. 각 구역은 돌아가며 사용되고, 특정 시기에는 금지됩니다. 전복이 알을 낳는 시기에는 아무리 가격이 좋아도 따지 않습니다.


이런 규칙은 정부가 만든 게 아닙니다. 해녀들 스스로 물속에서 관찰하고, 저녁에 모여 이야기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논쟁하면서 만들어낸 집단 지혜입니다. 현대 해양생물학의 “최대지속생산량” 같은 어려운 개념을 몰라도, 그들은 “올해 전복이 작다”는 걸 압니다. “이 정도면 3년은 쉬어야 한다”는 감각이 있죠.


서해안 어촌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양식장 위치, 어망 설치 구역, 조개 채취 시기에 대한 복잡한 규칙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경제적 계산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 바다를 우리 아이들에게도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만들어낸 사회적 발명입니다.


놀라운 건, 이런 전통적 관리 방식이 최신 생태학 이론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순환 이용, 보호 구역 설정, 재생산기 금어, 체장 제한—이 모든 게 현대 어업 관리의 핵심 원칙이기도 합니다. 과학이 증명하기 훨씬 전부터 어민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누구를 위한 해법인가요?

하딘은 “상호 합의된 강제”를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들으면 그럴듯합니다. 다 같이 합의해서 규칙을 만들고 지키자는 거니까요.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작동했을까요?


역사를 보면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논리는 종종 공유지를 빼앗는 명분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이 대표적입니다.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공유지를 “합리적으로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을 쫓아냈죠. 그 땅은 귀족의 양 목장이 되었고,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 공장의 값싼 노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연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규모 간척 사업이 추진될 때, 전통적으로 그 갯벌을 이용해 온 어민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국가 발전”이라는 큰 명분 앞에서 “비과학적” 전통 어업은 구시대 유물 취급을 받았죠.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누가 “합리적”이라고 정의하는가? 누구의 지식이 “과학적”으로 인정받는가? 규칙을 만드는 테이블에 누가 앉아 있는가? 종종 정답은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바다가 가르쳐준 연결의 지혜

해양생태계를 연구하다 보면 경계가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하딘의 목초지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명확한 공간이었죠. 하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역 양식장을 생각해 보세요. 양식장에서 나온 영양염은 조류를 타고 멀리까지 퍼집니다. 그게 몇 킬로미터 떨어진 갯벌의 식물성 플랑크톤을 증가시키고, 그 플랑크톤을 조개가 먹고, 그 조개를 새가 먹습니다. 반대로 양식장의 생산성은 외해에서 들어오는 영양염, 주변 습지가 제공하는 어린 생물들, 상류 하천의 담수 유입에 의존합니다.


모든 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바다, 저기부터는 네 바다”라고 명확히 나눌 수 없습니다. 한 지역의 결정이 멀리 떨어진 곳에 영향을 미칩니다. 상류에 댐을 만들면 하구 갯벌이 변하고, 연안 어업이 타격을 받습니다.


이런 연결성은 단순한 과학적 사실을 넘어 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정말 분리된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는 산소는 바다의 식물성 플랑크톤이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먹는 생선은 복잡한 먹이그물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은 결국 우리가 먹는 물고기 뱃속에서 발견됩니다.


동아시아의 오래된 지혜


서양 과학이 최근에야 “생태적 연결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동아시아 철학은 오래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유교의 “천인합일”은 하늘(자연)과 인간이 본래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불교의 “연기설”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한다고 가르칩니다. 독립적인 자아란 환상이라는 거죠. 도교는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말고 따르라고요.


이런 사상에서 보면, 하딘의 질문에 의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탐욕스러운 개인을 강제로 통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깨닫고 조화롭게 살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물론 전통 사상이 모든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이상보다 복잡하고, 현대화 과정에서 많은 전통적 가치가 약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사상들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건 분명합니다. 하딘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 “원자적 개인”은 사실 특정 시대, 특정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요.


복잡성을 껴안는 용기

하딘의 이론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논리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정책 입안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죠.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합니다.


해양생태계를 공부하다 보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정교한 모델을 만들어도, 바다는 항상 예상을 벗어납니다. 어떤 종은 사라질 것 같다가 다시 늘어나고, 예측 못한 곳에서 새로운 패턴이 나타납니다. 생태계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합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향식 규제가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지역 공동체의 자율적 관리가 더 잘 작동합니다. 과학 지식이 중요하지만, 할머니의 경험도 귀중합니다.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형평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런 복잡성을 인정하는 게 포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나은 해법을 찾는 시작점입니다. 단순한 답 대신 지속적인 학습을, 일방적 통제 대신 적응적 관리를, 전문가의 독점 대신 다양한 주체의 참여를 추구하는 거죠.


우리는 모두 같은 바다를 공유합니다

결국 하딘이 놓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주 해녀 할머니가 바다에 인사하는 것, 갯벌 마을 사람들이 “우리 바다”라고 부르는 것, 손녀에게 “3년 뒤에 캐라”라고 가르치는 것—이 모든 게 그저 미신이나 비합리적 전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더 큰 생명의 그물망에 속해 있다는 깊은 이해입니다.


현대 해양생태학이 복잡한 수식과 데이터로 증명하는 것을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바다에게 무엇을 하든,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을요.


진짜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공유지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생명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진짜 비극입니다.


바다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러니 함께 돌보자고. 문제는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 원고의 내용과 이미지는 AI 도움으로 만들었습니다.

* 출처.

1. Hardin, G. (1968).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162(3859), 1243-1248.


2. Crowe, B. (1977). The Tragedy of the Commons Revisited. In G. Hardin & J. Baden (Eds.), Managing the Commons (pp. 53-61). W. H. Freeman. (Original work published 1969)


3. Hardin, G. (1985). Filters Against Folly: How to Survive Despite Economists, Ecologists, and the Merely Eloquent. Viking Pen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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