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전문 용어로 만리장성을 세운 타입과 진지함에 유머 한 스푼을 넣은 타입. 전, 후자의 마니아들에게 끌리더라고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나도 해봐야지! 하고 마음먹기도 합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빌린 『연필깎기의 정석』이 그렇습니다. 연필 깎기를 다시 해봐야지!라는 마음을 불러일으켰거든요.
이 책의 저자는 데이비드 리스. 부시 행정부 시절 친구들에게 이메일로 보낸 정치 풍자만화 ‘Get Your War On’이 바이럴 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클립 아트*로 만든 만화는 《롤링스톤》에 연재되고, 3권의 책으로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죠. 얼마 큼이냐고요? 연극으로 각색돼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대요. 직장인의 생활을 풍자한 ‘나의 새로운 서류 정리 기술은 아무도 막을 수 없어’ 등의 만화집을 펴냈습니다.
*클립 아트(Clip art): 미리 만들어진 그림.
**오프 브로드웨이(Off-Broadway): 500석 미만인 극장을 뜻하는 단어.
풍자만화로 큰 성공을 이룬 리스. 그는 돌연 직업을 바꿉니다. ‘연필 깎기 장인’으로요. 2013년엔 $32를 내면 그의 연필 깎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연필은 우편으로 보내야 하고요. 9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를 받을까? 궁금해졌습니다. $100가 들더라고요. 미국 외의 나라는 $120를 지불해야 하죠. 아, 물론 연필이 포함된 가격입니다. 그래도 세긴 하죠?
터무늬 없이 비싼 금액이지만, 연필 깎기 장인 리스는 다양한 고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애플 홈팟 광고와 영화 <Her>로 유명한 스파이크 존스 감독, 작가이자 코미디언인 존 호지먼(TED 강의인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짧은 여담’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13세 초등학생과 동네 우체부까지.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기에 다소 비싼 금액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걸까? 호기심이 샘솟았어요.
올바르게 연필 깎기, 연필 깎기의 모든 것!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를 담은 『연필깎기의 정석』. 만화가이자 연필 깎기 장인인 데이비드 리스가 연필을 ‘올바르게’ 깎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주머니칼로 깎기, 이중날 회전식 연필 깎기, 아이들과 함께 연필 깎기 등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상황에서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는 법을 설명한다. 유머와 장난이 섞인 저자의 행동에 의아해하기도 하지만, 연필을 깎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표현을 보여준다.
연필을 깎는 행위는 어쩌면 자신의 일을 더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사람의 마음가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연필 깎는 행위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명상의 시간을 선사하기에, 처음 맛보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소개를 읽고,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문필가,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 목수, 기술자, 공무원, 교사를 위한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를 배우고 싶었거든요.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추천사의 탈을 쓴 스탠드 업 코미디가 저를 맞이하더군요.
“이게 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짧게 한 말씀 드리지요.” 웃음이 터졌습니다. 청중들이 웃는 효과음도 함께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저자는 총 17장에 걸쳐 올바른 연필 깎기 방법을 설명합니다. 가장 먼저, 연필 깎기 장인은 자신의 도구 가방을 보여줍니다. 연필과 주머니 칼, 신뢰감을 주는 앞치마와 프로페셔널하게 연필밥을 집을 수 있는 족집게, 연필밥을 담을 비닐봉지, 장인의 작품(완벽하게 깎인 연필)을 보관할 플라스틱관, LED 조명이 달린 머리띠형 확대경, 방진 마스크, 그리고 $5와 잔돈을 꼭 챙겨 다닌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현기증이 날 때 샌드위치를 사먹기에 충분하지만, 할 일을 내팽개치고 영화를 보러 가기에는 부족한 액수’라서요. 제법 장인답죠?
도구를 갖추었다면, 심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연필 깎기는 부상의 위험이 있는, 격렬한 활동이니까요. 손과 어깨, 그리고 다리를 풀어준 뒤 올바른 자세로 앉습니다. 연필을 깎는 도구는 다양합니다. 외날 휴대용 연필깎이, 외날 회전식 연필깎이, 다구형/다단식 휴대용 연필 깎기, 이중날 회전식 연필깎이, 그리고 벽걸이형 회전식 연필깎이 정도가 있죠. 각 도구에 따라 연필을 깎는 법과 주의할 점이 다릅니다. 이 점을 숙지해야 연필 깎기 장인이 될 수 있다고 해요. 이렇게 숙련이 된 뒤엔 제이지*처럼 연필 깎는 법, 실로 연필 깎는 법 등을 연마할 수 있습니다.
*제이지(Jay-Z): 미국의 전설적인 래퍼이자 팝의 여왕 비욘세의 남편.
연필을 올바르게 깎는 방법은 1/3 정도 나오고, 나머지는 코미디예요. 코난 오브라이언이나 스티븐 콜베어의 쇼를 좋아한다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토크쇼를 읽는 기분이 들 거예요. 읽을 때마다 저항 없이 웃음이 터집니다. 그렇다고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아요. 연필 깎기를 통해 삶을 대하는 자세를 알려주거든요.
“연필 깎기가 그렇듯 살다 보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고, 그럴 땐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로 깎으면 되며, 완벽하게 깎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완벽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건 비겁한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으면 해요.” -추천사 발췌
“첫 칼질은 사실 도장이 완료된 연필 거죽을 벗겨내는 정도로만 하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대박을 노릴’ 필요는 전혀 없다. 이것은 날카로운 칼로 끈기 있게 손을 놀려야 완성되는 작업이다.” p.50
“연필깎이는 아끼고 보살필수록 그 고유의 역량과 특성에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그럴수록 더욱 자신감을 갖고 작업에 임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감이 상승하면 보다 유익한 생각이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므로 불안감은 자연히 줄어들게 된다. 수시로 칼날을 갈고, 원통형 절삭날을 깨끗하게 유지하라. 그리고 작업할 때는 집중하라. 이를 명심하면 머릿속의 악마를 퇴치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pp.121-122
“우리는 모든 연필 촉에 수반되는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아니 어쩌면 더 나아가 향유하는 법까지도 배워야만 하고, 그러면서도 이상적인 형태를 향해 계속 정진해야 한다. 이는 인생의 공허함을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각자가 놓인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잘 생각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면서도 현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p.128
“타협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완벽성은 오직 마음가짐과 노력의 완벽성뿐이다. 능력이 닿는 한 최고의 연필 깎기 전문가가 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적절히 대책을 세워나간다면, 결과적으로 따졌을 때 다른 모든 부분은 용서될 것이라 확신해도 좋다.” p.129
장인의 연필 깎는 법을 배우려다, 회사 생활을 배웠어요. 전 욕심이 많아서, 늘 ‘대박’을 치고 싶어 하거든요. 특히 회사일이 그렇습니다. 대박을 치기 위해선 중박, 쪽박 등 다양한 박들을 차 봐야 하는데 말이죠. 마음에 드는 게 나와도 계속 자신을, 자신의 일을 가다듬는 연습도 필요하고요. 매번 이래야지 다짐하고, 잊는 것 같습니다.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열심을 다하는 사람. 그리고 그 일에서 인생의 통찰력을 얻은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장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 <연필깎기의 정석: 문필가,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 목수, 기술자, 공무원, 교사를 위한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올해 읽은 책 중 유머와 내용 면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스탠드 업 코미디를 읽는 것 같을 정도로요.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 현실 웃음이 터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유머가 휘몰아친 뒤엔 통찰력 있는 문장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이 책은 지하철에서 크게 웃고 싶은 분, 그래서 옆자리가 여유롭게 쾌적하게 가고 싶은 분. 연말연시에 웃고 싶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전,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 책으로 하려고요. 그럼 이만, 즐거운 금요일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