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디> 이야기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음식이 등장하면 나는 멈칫한다. 주인공이 홀로, 혹은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나올 때면. 그 장면들은 내용 전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별로 연관이 없을 때도 있다. 대단한 음식일 때도 있지만 그냥 우리가 늘 먹는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일 때도, 볼품없이 허름하고 초라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장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솔직하고 쓸쓸하고 끈질긴 생명력 같은 것,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보드랍고 포근한 무엇이 그 안에 숨어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영화 <주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맑고 힘찬 목소리로 더없이 아름답게 부른 노래 '오버 더 레인보우'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로 세상에 등장한 배우 주디 갈랜드의 삶은 당연히 화려한 여배우의 삶이었으라 생각했다. 그녀의 노래나 실컷 들어보리라 보러 들어간 영화 <주디>. 르네 젤위거의 목소리로 주디의 노래를 몇 곡 듣긴 했지만 영화는 흔한 성공 스토리도 실패담도 아니었다. <주디>는 내게 전기 영화가 아니라 슬픈 음식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먹는다는 것. 그 무의식에 가까운 평범한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힘들고 어색하고 슬픈 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싶어하지만 머물 집이 없는 그녀가 피곤한 삶을 겨우 겨우 이어 나가던 때, 런던 콘서트 기회가 찾아온다. 영화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의 그 기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내내 작은 알약을 삼켰다. 물도 없이 삼켰다. 잠들기 위해, 노래하기 위해, 아이들과 조금 더 함께 있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 위해 그녀는 자꾸 약통을 열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재능이 많은 그녀를 사람들은 아껴주지 않았다. 가엾게도 어린 주디는 존중받지 못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다이어트를 강요하고 그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며 음식 대신, 애정 대신 알약을 내밀었다. 거부하고 반항해보기도 했지만 그녀는 결국 약을 삼키며 연기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플래시백으로 삽입된 <오즈의 마법사> 촬영 당시의 모습에 화가 났다. 왜 그들은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촬영장에 갇히다시피 노예처럼 영화를 찍은 그녀. 영화는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그녀를 병들게도 했다.
배우 르네 젤위거의 훌륭한 연기를 통해서 재현된 주디의 삶을 나는 점점 응원의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좋은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데 이 영화는 '기쁜 장면'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비틀비틀 쓰러질 듯 걸으며 무대에 오른 주디가 콘서트에서 무사히 노래를 마쳤을 때, 유머러스한 말로 사람들을 웃게 만들 때, 그리고 술과 약이 아닌 무언가를 먹을 때 나는 기뻤다. 그 장면들이 있어서 잠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약과 술이 아닌 음식을 먹는 장면은 나의 기억으로는 겨우 두 번뿐이었다.
# 장면 하나
콘서트를 보러 온 그녀의 오랜 팬인 두 사람에게 주디는 저녁 식사를 제안한다. 밤거리를 헤매 보지만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고 게이 커플인 두 사람은 그녀를 집으로 초대한다. 오믈렛을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며. 특별한 주디를 위해 특별히 더 맛있는 오믈렛을 만들고 싶었던 남자는 울상이다. 잘하고 싶었던 나머지 평소대로 하지 않고 크림을 넣는 바람에 너무 묽어졌다면서. 망친 오믈렛을 보여주는 남자에게 다가가 주디는 스크램블로 만들어버리자며 오믈렛 냄비를 젓는다. 장면은 바뀌고 그건 스크램블도 아니었다는 농담을 나누는 세 사람. 먹는 모습이 직접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좋았다. 그녀가 약이 아닌 음식을 처음으로 삼켰다는 거니까.
# 장면 둘
위태위태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주디는 결국 런던 콘서트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한다. 콘서트 동안 주디를 도와주던 매니저와 악단의 피아니스트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자리. 그들의 호의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그녀는 헤어질 즈음이 되어서야 마음을 연다. 이별에는 케이크가 있어야 한다며 매니저는 케이크를 잘라 주디에게 내밀었다. 주디는 이별 케이크 한 조각의 끝을 포크로 아주 조금 잘라먹었다. 마치 지구의 음식이란 것을 처음 먹는 외계인처럼 그 모습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녀 특유의 표정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부드럽고 달콤한 케이크조차도 겨우 삼킨 그녀가 말했다.
“정말 맛있다.”
'맛있다'는 말이 그렇게 슬픈 말이었던가. 애처로운 주디의 그 말이 얼마나 아프던지. 그녀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아래에서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에만 그녀는 먹을 수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오버 더 레인보우'의 일절을 부르고 더 이상 못하겠다는 그녀를 위해 관객들이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오직 그녀만을 위해 불러 주는 노래를 듣는다. 슬프면서도 행복한, 그 오묘하고 뭉클한 표정은 케이크가 맛있다고 말했을 때의 표정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