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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존재, 유디트를 기다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기존의 유디트와 다른 이유.

by 경계선

서양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져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모든 역사와 문화가 비슷한 패턴을 가질 것이지만 음악은 음악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그림은 그림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 속 이야기를 음악으로 재현하기도 하고,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한다. 언젠가의 역사적 사건이 회화에 등장하기도 하고 음악으로 재현되기도 하는 부분은 예술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 싶다.


서양 회화에 대한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닥치는 대로 그림을 보다가 뜬금없는 의문은 “왜 성모 마리아는 모두 파란색 옷을 입고 있나요?”였다. 서양의 고중세에 파란색은 당시 쉽게 구할 수 없는 안료였으며 ‘청금석’이라는 물질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었는데 청금석은 쉽게 구할 수 없어 ‘금’에 버금가거나 금보다도 비쌀 때도 있었다는 것. 성모 마리아에게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이 어우러진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도 밝게 빛나는 그 안료를 쓰게 하는 것은 예수의 어머니였던 성모 마리아에 당연할 수 있었겠다고 수긍한다. 그림을 보면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의 실상이 쉽게 들여다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흥미롭게 생각하게 된 주제는 “유디트(Judith)”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유디트에게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리는 일이 16-17세기부터 자주 일어나기 시작했고, 19세기말의 문학과 미술에 큰 인기를 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그림으로 유디트가 많이 알려져 있다. 서양의 회화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나로서 유디트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단어 ‘유디트’였다. 김영하 작가도 비엔나에서 클림트의 작품 유디트를 보고 온 후 쓴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 소설 내용을 읽으면서 ‘다른’ 유디트를 생각할 수는 없었다. 클림트의 유디트는 매혹적이면서도 방금 막 정사를 끝낸 여성의 나른한 표정이었다.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목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림의 중심은 유디트의 표정에 있었다.

Gustav_Klimt_039.jpg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901년 작품


유디트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었다. 예수 탄생으로부터도 한참이나 이전 시대에 소아시아 지역의 작은 나라 ‘유다(Judae)’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시리아’ 제국과의 전쟁이 있었고, 아시리아의 ‘홀로페르네스’라는 장군을 물리치기 위해 유디트와 유디트의 하녀(민간인 여성 2인)가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술에 취하게 하였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유디트가 잘라 아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이기는데 큰 공을 세운 여성으로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 나는 그 이야기가, 어떤 ‘여성’의 모습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이끌만한 요소를 충분히 가졌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대체로의 여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흔치 않다. 특히나 오래된 기록에 자신의 이름과 내용이 한 지면 이상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은 더욱 흔치 않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점. 희생의 방법 중 하나로 여성성 혹은 성적 어필을 했다는 점. 그 묘한 접점의 띠는 여성으로서 세상에 등장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전근대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른 일화를 주제로 한 그림은 시간을 두고 제법 많이 그려졌다. 르네상스 시대를 함께 했던 산드로 보티첼리,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파올로 루벤스 등의 작가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주목하게 되는 작가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6)이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았던 카라바조(1751-1610)의 그림을 비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젠틸레스키의 작품은 피렌체에서, 카라바조의 그림은 로마에서 만날 수 있는데 두 그림은 한눈에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유디트라는 주제를 전개하는는 방식에 대한 화가들의 생각이 같은 시대를 살았어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 기반을 둔다는 사실을 따라가 보면 제법 흥미롭다.


800px-Caravaggio_Judith_Beheading_Holofernes.jpg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 카라바조(Caravaggio), 1598-1599 또는 1602년 작품

카라바조의 작품의 유디트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의 시녀는 늙은 여자로 표현된다. 유디트는 밝고 순결한 이미지와 홀로페르네스의 끔찍한 고통을 대조하여 표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디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한걸음 떨어져 카라바조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지켜보고 있으며 옆에서 늙은 시녀가 수급을 담을 준비를 하고 있다. 당시 남성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당위성과 모습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림의 주제가 흰 옷을 입은 순결한 유디트라는 생각도 있지만, '욕망의 파멸은 고통'을 상징하는 홀로페르네스의 표정에 더 주목하는 느낌도 있다. 교훈을 주는 느낌의 그림이랄까. 역설적이다. 카라바조는 매우 뛰어난 화가였지만, 살인자였다. 살인자를 그를 벌하는 것은 당연했겠지만 그의 재능을 생각하면 살인죄로 다스리기에 너무 아까웠던 것. 그는 그림으로 교황에게 자신의 죄를 흥정(!) 하기도 하는 여러모로 문제적인 화가였다.


GENTILESCHI_Judith.jpg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20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서 후대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젠틸레스키에 주목해 본다.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서 여성 화가로서는 최초의 회원이 되었던 그녀는 회화 역사에서 여성으로 이름을 남긴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화가였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어려웠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런 젠틸레스키는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성폭행을 당했고, 이 경험이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십자가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한계와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화폭에 담고 싶었던 욕망은 누구보다도 유디트를 색다른 존재로 그리기에 충분한 동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고전적으로 유디트라는 이미지를 정숙하고 여성스러운, 그리고 순결한 존재로서 명명했던 과거의 수레바퀴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자신을 성폭행 했던 남자가 교황청에서 재판을 받은 후에도 처벌받지 못하는 현실에 매우 좌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잊지 못하는 그 사건에 대비하여 이 한 점의 그림을 남겼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아름다운 여성, 성적으로 어필되는 여성이 아닌 힘을 가진 여성으로 표현되는 이 유디트의 모습에서 이전과는 완전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이를 조력하는 시녀도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성이다. 그리고 홀로페르네스는 두 여인의 힘에 속절없이 당하여 목을 잘리게 되는 모습인데, 침구에 배어 나오는 핏자국과 튀는 혈흔 등이 그림에서 후각마저 자극하는 느낌이 든다. 실제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에너지가 시각적인 피비린내로 전해왔다.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운 모습 말고, 적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처단할 수 있는 어떤 '인간'의 범주에 여성도 포함될 수 있음을 젠틸레스키는 보여주고 싶었을까 싶다. 또한 자신이 처한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 이 그림에서도 드러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고통을 당하는 홀로페르네스가 아니다. 이 그림은 유디트의 강력한 힘이 우리를 그림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칼의 모양도 십자가의 형태이기도 하고,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모양이기도 하다.

그녀는 말했다고 한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다시 시대를 흘려보내 클림트로 돌아와 보면, 클림트는 기존의 바로크 시대와 전근대 회화에서 느껴지는 사실적 묘사, 원근과 명암의 대비 등과 결별했다. 자신의 느낌과 신화 속 인물들에 대한 재해석을 만난다. 세기말의 비엔나에서 해체적 미술과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시도했던 그림들이 다른 느낌으로 세련되었다. 현대 회화로 넘어오는 전환의 시기로보인다. 미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문제부터 다시 시작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전의 유디트들은 그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시각이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이전의 유디트들은, 어떤 여성이 사회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 알게 한다. 대체로 유디트는 희생과 겸손, 나약하나마 용기를 가진 여성으로 표현되고 머리가 잘린 홀로페르네스는 교만과 무절제, 욕망의 상징으로 보인다.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그림들은 제법 낯설다. 특히 집의 거실에 걸어놓을 수 있느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처음 그림을 마주하면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유디트라는 인물이 가지는 의미와 여성에 대한 과거의 여러 시선들을 생각해 보면, 이 주제와 이 그림 자체가 계속 회자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나는 또 다른 유디트를 기다린다. 어떤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 큰 가치를 위해 희생하는 여성의 모습, 그리고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연대하는 사람들. 여성뿐만 아니라 같은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 여성뿐 아니라 남성. 모두가 함께 손 잡을 수 있는 유디트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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