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따위 필요 없었지만 사실은 어른이 필요했을 때

by 레인

나는 설날 끝나면 추석 걱정하고 추석 끝나면 설날 걱정하는 아이였다.


나는 엄마, 아빠, 여동생 이렇게 넷이 단란히 산다. 는 뻥이고 할머니, 작은 고모, 여동생, 나 이렇게 넷이서 사는 아이였다. 어린 여자, 다 큰 여자, 늙은 여자 넷이 사는 집에 명절이면 유일하게 찾아오는 사람은 좀 더 큰 여자였다. 그러니까 나의 큰고모. 나의 어린 시절은 수많은 상처들로 꽉 차 있을 테지만, 큰고모가 준 상처도 꽤 많은 지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빠랑 이혼하고 우리 집에서 금기어가 돼버린 '우리 엄마'에 대해 직설적으로 묻고 자주 비난했으며, 내게 지혜를 나눠주는 방식으로 다그치는 것을 택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힘든 것은 그녀1(큰고모)이 나의 집에 닥쳤을 때 느껴지낯설고 거지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1이 형성한 '정상가족'이 나의 좁은 집에 파고들 때마다 나는 수없이 겉도는 한 마리 잉여가 된 느낌이었다. 4명의 여자가 함께 사는 나의 가족 형태가 평범하고 당연히 느껴졌다면, 그녀1의 정상가족이 우리 집에 파고들 때마다 나는 나의 위치를 실감하곤 했다. 아 나는 우리 할머니한테 딸린 애구나.


내가 이 명절 문제를 고민하다 결정한 것은 그녀1을 피해서 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아예 안 가서 서울에 홀로 남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가족들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애달프게 그리워서 그랬다. 그래서 오늘 한없이 물었다. 큰고모의 동생인, 나의 작은 고모에게.

'큰고모 언제 와요? 언제 오는데요?'

뱅뱅 돌다 결국 나의 작은 고모인 사람과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결국 감정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큰고모한테 상처 받았을 때, 그냥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걸, 아픈 걸 꺽꺽거리고 참던 어린 내가 턱을 열고 비집어 나와 마구 화내고 소리치고 또 울었다. 꺽꺽.


나는 작은 고모, 즉 그녀2와 대화하며 한 가지를 절실하게 느꼈다. 그녀2(작은고모)는 내 감정을 '인지'할 수는 있어도 영원히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2는 어린 내게 그랬던 것처럼, 울고 있는 내게 '네가 아직도 어린애야?'라며 울음을 멈추도록 압박했고, 더 이상 나와 동생이 그녀 2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개탄했다. 울음을 멈추길 압박하는 그녀 2를 보면서, 그녀 2는 내 감정을 수용해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른과의 관계에서 두려움만이 존중이라고 생각하는 그녀 2를 바라보며, 그녀 2와 나는 수평적이게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부분은 좀 덜 아팠다. 내가 그동안 좀 튼튼해졌는지.


그런데 사실은 너무 슬프기도 했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존중받는 것이라 믿는 어른과 관계 맺어야 했던 어린 날의 내가 불쌍해서 말이다. 내가 그녀2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내가 그녀1을 얼마나 어려워했던가. 그녀1(큰고모)에게 당신의 말하기 방식이 내게 상처 준다고 표현하는 연습을 혼자 하며 얼마나 두려워했고 그래서 아파했던가.


평론가 손희정은 영화 벌새에 대한 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들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지고, 지혜와 자원을 나눠주는 존재로서의 ‘어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기댈 수 있는 어른’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이, 아이들은 어떻게든 스스로 자라야 한다."

작은 고모와 큰고모, 그녀들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운) 어른이 되고자 했을 때, 역설적으로 그녀들은 우리에게 (때때로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스스로 자라야 했고, 스스로 자라서 때때로 기댔던 어른은 가족 밖의 어른, 고등학교 선생님 부부였다.


내가 내 몫의 삶을 살아내기도 버겁던 고등학생 시절, 어린 동생의 임신을 알았을 때 찾아갔던 어른은 선생님 부부였다. 초조하게 찾아가도 평안하게 맞았고 힘들다고 말할 때 남의 탓이라고 말해준 게 그와 그녀였다. 그녀2는 내게 '가족끼리 안 보고 살 거냐'라고 말했지만 아마도 내가 계속 찾아갈 존재들은 그녀들보다 그와 그녀일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위로를 건네줄 수 있는 존재도 그녀들이 아니라 그와 그녀일 것이다. '두려운' 어른이 아니라, '때때로 기댈 수 있는' 어른이 그와 그녀여서 그렇다.



벌새의 포스터 속 은희의 표정을 바라보면, 어린 날의 내 표정이 이랬으리라 생각한다. 내 집에 파고드는 친척이란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그들에게 상처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듯 강한 척해야 했을 때, 사실은 명절이 두려웠을 때,


어른 따위 필요 없었지만 사실은 어른이 필요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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