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대장정의 종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연안(延安)을 직접 공격하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보다는 주로 연안을 고립시키고 중국 공산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연안(延安)이라는 지역의 역사를 보면
연안(延安)은 중국 산시 성(陝西省)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주목받았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 연안(延安)
고대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에 연안은 변경 지역으로, 북방 유목 민족과의 교류 및 방어의 거점 역할을 했으며. 한나라 시대에는 서역 확장 과정에서 병참 기지 역할을 했다.
당나라(618~907년) 때도 연안(延安)은 북방 방어선의 일부로 활용되었다.
원나라(1271~1368년) 시대에는 몽골 제국의 통치 아래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고 명(明)·청(淸) 시대 들어와서 명나라(1368~1644년) 연안은 명나라가 몽골계 부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중요한 전진 기지였다.
청나라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으며, 농업과 상업이 발달했으며 19세기 후반에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서북 지역의 혼란이 가중되었고 청나라 중앙 정부에 있어 반란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리적으로 중국 연안(延安)은 산시 성 북부에 위치해 황토고원의 중심지로, 이 지역은 험준한 지형과 자연 방어벽을 제공해 외부 침입에 강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고대부터 중국 북서부의 중요한 교통 허브로, 도로와 철도가 발달해 주변 지역과의 연결이 용이하였다. 이는 경제적, 군사적 이동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게끔 하는 효과를 내었다.
고대부터 황토고원은 농업에 적합한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으며 근래 들어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이는 지역 독자적인 세력이 경제 자립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가 되기 전
1910-1920년대 중국 연안(延安)지역은 군벌 시대의 혼란 속에 있었으며, 특정 호족이나 군벌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이 시기 안안 지역은 주로 산시 성(陕西省)을 중심으로 활동한 군벌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특히, 염석산(阎锡山)은 산시 성(山西省)을 중심으로 한 군벌로, 인근 섬서성 지역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풍옥상(冯玉祥)과 같은 군벌도 산시 성 일대에서 활동하며 지역을 통제했다. 이들은 각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경쟁하며 연안(延安)지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염석산 같은 경우 1912년 중화민국 수립 후 산시 성 군 사령관이 되었고, 이후 산시 성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그 당시 산시 성을 현대화하기 위해 교육, 산업, 교통 인프라 등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독자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해 "산서 왕"으로 불리며 장기간 산시 성을 통치해왔다.
하지만 1935년부터 중국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이곳을 혁명 근거지로 삼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경제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특히 1930년대 후반에는 공산당 주도의 협동 농업, 방직업, 제철업 등이 활성화되어 공산당 위주의 경제 기반도시가 태어나게 되었다.
1934년 10월, 중국 국민당(國民黨, KMT)의 포위 공격(제5차 초광 작전)으로 인해 공산당의 주력군(홍군, 紅軍)은 장시(江西) 소비에트를 떠나 대장정을 시작했고
대장정 동안 홍 군은 약 9,000km를 행군하며, 수많은 전투와 어려움을 겪으면서
1935년 10월, 대장정을 마친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 주력부대(중앙 홍 군, 제1방면 군)는 산시(陝西) 성 북부의 연안 지역에 도착했다.
1935년 10월 중국 공산군(홍군)이 연안(延安)에 입성할 당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 세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크지 않았으나, 일정한 갈등과 세력 변화가 있었다.1935년 당시 연안(延安)과 산시(陝西) 성 북부 지역은 국민당 정부에 협력하는 군벌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세력은 마홍빈(馬鴻賓)과 장은(張殷) 등의 부대였다. 이들은 국민당 중앙 정부와 연계는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운영을 하던 지방 군벌이었으나 공산당 옌안 입성 시 별다른 충돌 없이 물러섰다고 한다.공산군 역시 대장정을 마치고 극도로 지친 상태였으나, 전략적으로 연안과 그 주변 지역을 장악해야 했다.
기존 군벌 세력은 공산군과의 직접적인 대규모 전투보다는 소규모 충돌을 벌였으며, 홍 군이 점차 지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후퇴하거나 국민당의 명령에 따라 철수했다. 연안(延安)입성 전후로, 공산당과 국민당 계열 군벌 사이에 일부 교전이 있었으나.하지만 공산당은 연안 지역에서 장기적인 거점을 구축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기존 군벌과의 대규모 충돌을 피하고, 점진적으로 지역을 장악했다.
그럼 왜 공산당은 연안(延安) 지역에 들어앉게 되었나?
1930년대 중국 공산당(중공)은 연안(延安) 지역을 본거지로 선택한 이유는 전략적, 지리적, 정치적 요인 때문이었다.
1. 전략적 이유: 국민당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후 퇴직
1934~1935년 동안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은 "제5차 초광 작전(第五次圍剿, 다섯 번째 공산당 토벌 작전)"을 통해 공산당 근거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공산당은 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대장정(長征, Long March, 1934~1935)을 단행했고, 살아남은 병력과 지도부가 연안(延安) 으로 이동했다.
당시 국민당은 중국 동부와 중부의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고, 서북부 지역(산시·간쑤·닝샤 등)은 군벌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연안(延安)은 상대적으로 국민당의 직접적인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세력을 구축하기에 유리했다
2. 지리적 이유: 천연 요새이자 방어에 유리한 환경
연안(延安)은 산시(陝西) 성 북부에 위치하며, 황토고원(黃土高原)과 험준한 산악지대가 많았다. 이는 국민당군이 공격하기 어렵고, 방어가 쉬운 천연 요새 역할을 했다.
연안 주변 지역은 농업(밀, 수수, 감자 등)과 가축 사육이 가능하여, 장기적인 생존이 가능했다. 공산당은 이후 협동농장과 자급자족 경제를 운영하며,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강화했다.
3. 정치적 이유: 농민 기반 혁명에 적합한 지역
연안 지역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농촌 지역으로, 가난한 농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토지 개혁과 농민 지원 정책을 통해 민심을 얻고, 병력을 모집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이전에도 여러 지역에서 소비에트 정부(혁명 근거지, 苏维埃政权)를 운영했지만, 국민당의 공격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연안(延安)에서는 공산당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부를 구축할 수 있었고, 마르크스주의와 혁명 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전파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1935년 10월, 대장정을 마친 후 공산당은 연안을 중심으로 한 서북(西北) 근거지" 를 구축했다.
이후 공산당은 연안 정권(陝甘寧邊區政府, 섬감녕 변경정부)을 수립하며 본격적으로 지역을 통치했다.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