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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거짓말의 추억

by 자낫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인 것 같지만 내가 잘 모르는 나의 모습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체취를 잘 모릅니다. 나에게 어떤 냄새가 나는지는 남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글 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이니 오늘은 저의 글쓰기 역사에 대해 읊어보겠습니다.


각 잡고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2학년 문예부 활동을 할 때였습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나도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바람도 있었지만 당시 글을 숭상하는 유교 전통이 남아있는 세속적 분위기에서 칭찬받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매헌 윤봉길을 배출한 충남 예산은 해마다 꽃피는 봄날에 매헌 문화제를 열고 백일장, 사생 대회, 서예 대회가 펼쳐졌습니다. 문장은 빼어나고 생각은 도덕적으로 보이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심사 위원들을 의식한 글쓰기였죠. 한 편, 머리가 굵어지고 고학년이 되어 자기 ‘생각’이라는게 생기기 시작하자 재미있게 쓰고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보통 글짓기 대회는 운문(시)부와 산문(생활문)부로 나뉘고 저는 산문을 주로 썼는데 소설이나 영화 시나리오처럼 기승전결을 잡고 복선을 깔고 클라이막스를 강렬하게 찍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일상 생활에서는 그런 영화같은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린이도 어린이 나름의 루틴이 있고 쳐내야 할 과제와 의무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어린이의 삶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제 어린 시절은 큰 틀에서 직장인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어요.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고, 아침 조회를 하고,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생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 극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은거에요. 마침 글짓기 지도 교사가 현실감이 살아있는 선에서 약간은 꾸며써도 좋다고 권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저는 상상력과 제 욕망을 투영하여 정말 글을 ‘짓기’시작했습니다. 그 꾸밈이 절정에 다다르자 도 대회에서 장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제가 ‘도시락’이었습니다. 보통은 가난하고 바쁜 엄마가 도시락으로 냄새나는 김치를 싸주어서 챙피했으나 나중에 그런 자신을 반성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레퍼토리였죠. 하지만 저는 아침 드라마 김치 싸대기 뺨 때리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당시 반에서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고 거슬리는 남자 아이가 있었어요. 이용성과 미묘하게 티격태격하는 관계로 글을 시작하고 그 애와 갈등이 고조되다가 크게 싸우면서 제 도시락 밥통과 반찬통이 교실 바닥에 떨어져 밥알과 반찬, 국물이 산산히 흩어지는 장면이 클라이막스였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용성이는 저를 도와 맨손으로 음식을 용기에 담습니다.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점심 밥이 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속상한 상황에 처하면 친구를 도와준다는 성선설을 내비치는 작품이었습니다. 용성이와 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허구였어요.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어느 날 아침 조회 시간에 “우리 반에서 글짓기 도 대회 장원이 나왔다. 수상 작품은 교실 앞에 붙여 놓겠다”라고 하신 겁니다. 저는 제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조마조마 했습니다. 특히 ‘이용성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두려워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저는 원고지에 쓴 소설같은 ‘생활문’을 내야했고 고스란히 교실 앞에 붙여졌습니다. 반 아이들이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어깨가 움츠려 들고 작아졌습니다. 마침내 이용성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 애는 멋쩍게 웃으며, “야, 내가 언제 네 도시락통 엎었냐?”라고 작게 항의했습니다. 저는 얼굴이 벌개지며 외면할 수 밖에 없었어요. 해명을 기대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용성이는 글짓기 수상작에 제 이름이 나와 은근히 기분이 좋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 사연은 허구가 아닙니다. 어른이 되고나서는 이야기를 지을만큼의 상상력과 재미에 대한 욕구를 내집 마련과 커리어 개발에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재밌는 이야기는 포기할 수 없네요. 이제부터 사부작사부작 이야기를 길어올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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