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서한
나저씨님께,
직접 뵙지 못하고 편지로 먼저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만 사람이 가장 솔직해지는 곳이 얼굴이 아니라 여백이라는 걸 저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백을 택했습니다. 조카를 통해 얼핏 들은 사연만으로도, 지금이 나저씨님 인생의 고비이자—아이러니하게도—전성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성기란 꼭 환호가 있을 때만 오는 게 아니더군요. 사람을 밑동까지 깎아내리는 낮은 자리에서야 비로소 진짜 중심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제 말을 청하셨다 하니,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저는 석학도, 상담가도 아닌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문장 하나가 남의 인생에 쓸데없는 상처를 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물러서지 않는 나저씨님의 부탁에서—대면이 아닌데도—간절함의 체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망설임을 끝내기로 했습니다. 이 편지는 그 결정의 증거입니다. 다만, 앞으로의 서신 왕래가 누군가의 ‘한때 기분’으로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먼저 약속이 필요합니다. 조언이라는 말은 언제나 거창하게 들리니, 저는 그 단어를 피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경험의 초안, 생각의 설계도, 그리고 나저씨님이 스스로 결론을 써 내려가실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을 함께 지키기 위해 다음 다섯 가지를 약속해 주십시오.
첫 번째 약속
제가 드리는 회신은 제 개인적 경험과 생각일 뿐, 인생의 정답이 아닙니다. 제 문장을 방패로 쓰지 마시고, 거울로 써주십시오.
두 번째 약속
상담과 응답은 편지로만 나누겠습니다. 글은 서두르지 않고, 감정은 덜어내고, 기록은 남게 됩니다. 기록은 종종 사람을 구합니다.
세 번째 약속
고민을 나누실 때 숨김없이,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적어주십시오. 미화된 사실은 의사가 만질 수 없는 붕대와 같습니다.
네 번째 약속
훗날 나저씨님과 비슷한 자리에 선 사람이 도움을 청한다면, 그에게 시간을 내주십시오. 받은 것을 흘려보내는 일만이 받은 것을 온전히 만듭니다.
다섯 번째 약속
우리의 서신 내용은 외부에 공유하지 않습니다. 침묵은 신뢰의 다른 이름입니다.
위 다섯 가지에 동의하신다면, 다음 편지에서는 나저씨님의 답장과 함께 지금의 고민을 보내주십시오. 한 가지 조심스럽게 부탁드립니다. “인생조언”이라는 무거운 단어 대신 “인생 선배가 겪은 개인적 경험”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기 비가 내립니다. 유난했던 여름의 오만함을 적시는 비입니다. 옷장 깊숙이 넣어두셨던 가을 겉옷을 꺼내실 때, 마음의 겉옷도 함께 꺼내주십시오. 너무 두껍지 않은 것으로요.
그러면 나저씨님의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시간은 급히 오라 하면 늦어지고, 천천히 오라 하면 제때 옵니다.
9월 28일, 한 잔의 커피와 함께 가을비를 바라보며
기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