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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누리 10시간전

돈을 남겨둔 채 테이블을 떠나지 말라

한국협상학회 창립 30주년 기념 기고

나는 협상학회에서 “돈을 남겨둔 채 테이블을 떠나지 말라”는 일생일대의 지혜를 배웠다. 협상학회에 발 들이기 전의 나는 가급적 남이 원하는 대로 대부분 맞춰주는 의사결정을 해왔다. 내 눈에는 사람들이 욕심쟁이로 보였다. 그래서 ‘먹고 떨어져라.’하는 못된 심산으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툭 내던졌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조용히 상대를 차단했다. MZ세대들의 ‘조용한 퇴사’ 문화를 보면, 이것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나는 상대와 힘을 합쳐 더 큰 파이를 굽는 대신, 상대를 옹졸하고 욕심 많은 사람으로 치부하면서 내가 양보한 몫의 파이를 아까워했다. 그건 ‘양보’가 아니다.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하며, 쉬운 길을 택한 나의 미숙함이었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협상 테이블에 돈을 흘린 채로 자리를 떠나는 것과 같다.  

    

협상학회에서 배운 지혜는 나를 변화시켰다. 이제 나는 테이블에서 상대의 필요와 내 입장을 모두 존중하며, 함께 더 큰 파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모색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얻었다. 테이블에 돈을 남겨둔 채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협상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협상학회는 나에게 협상의 본질을 가르쳐주고, 더 나은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기회를 제공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지혜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 나는 단순한 대화의 기술을 넘어, 삶을 변화시키는 협상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협상학회는 진정으로 다양성이 존중받는 학술 모임이다. 분기별 학술대회에는 판검사 출신의 변호사,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성과를 내는 영업 직원, AI 기술의 한계를 확장하는 창업자와 프로그래머, 협상 교육 전문가와 퍼실리테이터 등 각계각층의 활동가들이 모여, 협상의 본질과 실천적 방안을 논의한다. 또한 법학, 심리학, 경영학, 경제학, 사회학 등 학제 간 연구가 활발하다. 학문 간 경계를 아예 허물고, 실제 사회 문제, 정책, 커뮤니티 등 비학문적 요소와 이론을 통합한 초 학제적 연구가 수행되기도 한다. 다양성에 기반한 협상학회의 집단 지성은 협상 현장에서 요구되는 실질적 해결책을 제공한다.      


그러나 여전히 협상은 쉽지 않다. 협상은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나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굳게 다짐했다. 내일 아침에 잠에서 깨면 제일 처음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마신 후, 바로 책상에 앉아 논문 연구를 시작하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SNS 좋아요 귀신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스마트폰이 손에 쥐어진 대신, 내 인생에서 금쪽같은 한 시간이 삭제되었다. 나는 협상에 완벽하게 패배했다. 또 다른 날에는 남편과 사소한 일로 다툼이 커졌다. 남편은 "나는 맨날 양보만 해야 해? 나는 네가 먹고 싶다는 게 있으면, 내가 먹고 싶은 걸 참아가며 무조건 너한테 맞춰줬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나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 동의한 결과지, 네가 일방적으로 양보한 게 아니야!"라고 감정적으로 맞받아쳤다. 남편은 자신이 늘 희생하는 쪽이라고 느꼈고, 나는 나대로 억울했다. 우리는 '양보'와 '합의'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작은 다툼은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갈등이었다.     

 

이렇듯 협상은 공식 석상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과 관계에서 매 순간 이루어진다. 따라서 협상 능력은 개인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협상학회는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이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나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준 든든한 동반자였다. 나는 석·박사 과정을 협상학회와 함께하며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이제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싶다. 정체성에 기반한 협상 교육 프로그램을 협상학회와 함께 개발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협상 능력을 발휘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다. 이는 나와 협상학회가 함께 걸어갈 또 다른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최누리.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 한국협상학회 경영경제협상연구회 위원. 미쉐린 가이드 레스토랑의 정체성 연구 논문을 통해 정체성과 협상의 접점을 탐구해 왔다. 협상에서 연고주의의 경영학적 시사점에 대해 발표하고, 대화와 신념 협상 등을 주제로 토론했다. SNS에서 미쉐린 박사로 활동하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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