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읽고 by 황정은
(1) 서론
“디디의 우산”으로 상실과 회복 그리고 혁명을 이야기했던 황정은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통해 혁명 그 후를 그린다. 그녀는 “혁명은 가능한가”에서 시작한 물음을 “혁명은 성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간다. 대한민국의 합법적 탄핵은 분명한 제도적 성과다. 대통령은 행정부 권력과 사적 권력을 통해 자신에 대한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하고 반격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황정은의 시선은 학교나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 성소수자, 효율성 밖의 개인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황정은은 이들을 통해 보편성에 스며들지 못한 개체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개체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공감만이 진정한 혁명이라고 그녀는 차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는 듯하다. 황정은이 “디디의 우산”에서 보여주었던 일상생활 속에서의 깨달음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도 유효하다. 오히려 각각 개체의 삶을 통해 우리가 느껴야 하지만 놓치고 있는 본질을 사유할 수 있게 우리를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보편에 휩쓸려 “혁명의 성공”을 자축하는 우리에게 호명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사유의 부재는 또 다른 독재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상황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우리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고 그에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국회의사당으로 뛰어나간 국민들의 용기로 다시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개별 삶은 무시당하고 소외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와 슬픔을 자양분 삼아, 새로운 권력자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꿈틀꿈틀 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읽어야 할 이유일지 모른다.
(2) 줄거리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김소영의 시선을 통해 제도에 호명받지 못하는 자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서수경은 김소영을 사랑하지만, 레즈비언 커플이라서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둘은 중학교 때 달리기 시합장에서 처음 만났고 후에, 1996년 연세대학교 ‘연대 사태’ 현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 뒤 연인이 되었고 함께 살게 된다. 김소리는 김소영이 동생으로 결혼해 정진원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셋은 공동육아 형식으로 정진원을 키운다. 김소리와 김소영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입장으로 크게 다투지만,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한다. 김소영과 서수경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위에 참여하고 탄핵 선고를 거실에서 함께 맞이한다. 그리고 소설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 제목은 두 방향으로 읽힌다. (1)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2) 형용사적 라벨을 중지하라는 요청. 아래에서는 이 두 렌즈로 핵심 장면을 검증하고, 어느 쪽에 무게가 실리는지 살핀다.
(3) 제목: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의미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에서 제목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제목 또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소설의 제목은 내용을 함축하기에,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소설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주어인 구조다(말하는 주체는 문맥에 암시).
첫째,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원하는 작가의 바람이 투영된 문장이다. 황정은은 이 소설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소수자, 착하지 않은 딸, 등록금·급식 고지서 앞의 학생들처럼 이들은 자기들이 보편성에 포함되어야 할 소중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보편성은 설명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개체를 포괄해야 한다. 따라서, 황정은은 제목을 통해 그녀가 추구하는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아무것도 설명하지 말라”는 선언형 문장으로 읽힐 수 있다. 황정은은 딸을 규정한 “착한”이라는 형용사, 보통으로 규정지어진 보편적 성관념등은 설명등 형용사가 권력에 의해 폭력으로 변화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인간의 사유는 하나로 통합될 수 없지만, 언어라는 발화행위를 통해 사유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보편성의 최전선에서 형용사는 어떤 존재를 규정한다. “착한”이라는 형용사는 보편적으로 좋음을 뜻하지만, 착한에 붙는 개체는 개체만의 특이성을 잃는다. 착한 이 붙지 않는 명사는 나쁜으로 명명되며 명사의 실체 또한 나쁨의 자리에 자리하게 된다. 황정은은 설명하지 않고 명사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만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위에 언급한 데로 제목은 내용을 압축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목이 제시한 두 가지 관점에 서서 내용을 읽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4) 하우게의 식탁보와 니체의 타자기 그리고 능력주의의 허상
도구를 쥔 인간은 도구의 방식으로 행동한다. 황정은은 니체와 하우게의 사례로 인간의 한계를 지적한다. 니체는 연필로 집필활동을 하다 타자기라는 신문물을 경험했고, 이는 그의 저작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줬다.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스투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2003> 무엇보다 빨랐고 무엇보다 글을 쓰고 지우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하우게는 그의 시를 통해서 새 식탁보와 신선항 종이가 그에게 전에 없는 영감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새 식탁보, 노란색!
그리고 신선한 흰 종이!
단어들이 올 것이다
천이 좋으니
종이가 섬세하니!
피오르에 얼음이 얼면
새들이 날아와 앉지
<올리버 하우게 “새 식탁보”,”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봄날의 책 2017>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인류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유례없는 자의식에 빠져든다. 헤겔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정신은 세상은 그의 관념에서 태어났다는 믿음을 가지고 관찰을 통해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정신이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자아에 대한 뒷 모를 자신감은 차별을 개인의 선호에 의한 선택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소쉬르는 ‘차이의 체계’로 언어를 설명했고, 레비스트로스·바르트가 이를 구조주의로 확장했다. 하지만, 자기 결정 서사가 강한 주체에게 ‘구조의 영향’ 담론은 반발을 불렀고, 능력주의는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이때, 능력주의가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전면에 나섰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자유로운 결정이 자본주의와 함께 한 단계 더 도약했다.
인간은 능력에 따라 평가되고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받는다는 능력주의는, 자신의 능력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졌을 때만 의미를 가진다. 마이클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는 인간을 자만심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만약, 나의 능력이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면 내가 얻은 사회적 트로피는 나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능력이 획득되었다는 자본주의적 수사를 믿는다. 이는 능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이 가지는 도덕적 신념이나 선호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사고는 내가 소수자에 대해 가지는 감정조차 정당화시킨다.
황정은은 김소영과 서수경의 사례를 통해 이런 고정관념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김소영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통해 아무런 꿈을 꾸지 못한다. 반면에 서수경은 김소영보다는 나은 환경에 살았고 매일 보던 비행기는 그녀가 비행기 관련 전공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서수경은 보잘것없는 학교에서 뛰어난 육상 실력을 보였고, 불운하게도 그녀의 체육선생은 비전문적 훈련으로 그녀의 무릎을 고장 낸다. 마르크스와 더 레프트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김소영의 친구 Y도 갭투자를 시작하자마자 누구보다 자본주의에 물든다. 이 모든 사례를 통해 황정은은 사회가 생각하는 정상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의 꿈이 어린 시절에 보던 사소한 비행기로 결정될 수 있고 나의 재능이 주변에 우연적으로 만나게 될 지도선생님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면 다수가 가지는 상식이 근본 없다는 것이다.
황정은은 김소영과 서수경의 1996년 ‘연대 사태’를 통해 육체라는 그릇에 담긴 인간의 정신의 유한성을 폭로한다. 누구보다 굳은 결심을 하고 시위에 참여했지만 일주일간의 감금은 시위대를 육체적으로 완전히 녹다운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심지는 “씻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무너지고 만다. 마르크스는 경제체제인 하부구조가 법, 윤리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 존재하고 경제체제는 생존에 직결하기 때문에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육체의 유한성은 인간이 관념이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기에 능력주의의 한계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만약, 다수가 생각하는 통념이 우연적이고 유한하다면 통념은 극복해야 할 족쇄이지 우리를 맡겨야 할 대지가 아니다. 하지만, 다수는 과거에 의해 규정지어진 보통 생각을(롤랑바르트는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라는 문장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 과거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말했다) 신봉하며 타자의 권리를 짓밟고 있다. 사회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하지만, 다수는 결혼은 남성과 여성이 하는 것이라는 통념에 기대어 게이나 레즈비언 커플들의 행복과 선택을 억압한다. 이는 우리가 기대야 할 것은 과거의 문장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행복과 선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족과 연락을 끊고 충분하지 않지만 김소영, 김소리, 서수경, 장준원은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처럼, 타자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가 없음을 황정은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5) 언어의 폭력
헤겔에게 언어는 개별을 보편으로 매개하는 수단이다. 인간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생각을 한 가지 사물로 치환할 수 없기에 나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거나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생각하는 빨간색이, 타자가 생각하는 빨간색과 같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헤겔은 언어는 개별적 관념에 보편성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외화를 통해 나타낸다. 하지만,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나의 외화 된 생각이 타자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언어는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보편성을 띤다. 인간은 발화행위를 통해 타자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개별적 생각에 보편성이라는 옷을 입히고 표현한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언어를 통해 갖게 된 보편성이 작품이 되고 타자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고 말했다. 헤겔이 말한 ‘보편성을 부여하는 언어’는 긍정적 힘이지만 황정은은 형용사의 폭력적 사례를 밝히면서 언어의 부정적인 면을 전면에 드러낸다.
김소영의 아버지는 그녀의 딸들에게 착한이라는 형용사를 부정한다. 착한 과 합치될 수 없는 딸들은 나쁜 딸로서 규정되고 착한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는 행동을 바꾸라고 요청된다. 김소영의 대학선배는 5대 독자 3대 종손이라는 단어로 묘사되고 그는 여자들에게 무한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 김소영에게 관심을 드러낸 직장대리로 인해 김소영은 대리가 관심 있는 사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대리는 김소영에게 측은 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특정 객체에 형용사를 부여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는 황정은이 극복하고자 하는 다수다, 다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명사에 내재된 형용사를 이미 결정해 두고 이를 따르면 정상 그리고 따르지 않으면 비정상이라고 규정한다. 서수영의 연구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남성에게는 면죄부를 여성에게는 허드랜일을 시키는 정당성도 부여한다.
형용사의 권력과 그에 맞는 명사의 짝은 정규교육과정에서부터 시작해 미디어를 거치면서 사회구성원들에게 내재된다. 바람직한 여성과 남성상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시민상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꾸준히 봐오지 않았던가? 이렇게 내재된 “언어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위에 언급한 대로 2가지다.
첫째는 아무것도 말할지 않아도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 혹은 둘째 타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고 판단하지 않는 자아의 형성이 그것이다. 물론 소설은 이런 유토피아의 현실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소영과 서수경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든 군중들이 타자를 위해 빌려주는 어깨는 “사랑과 이해가 그 답이 아닐까?”라는 어렴풋한 힌트를 던져주고 우리에게 사색하게 만든다.
(6) 한나 아렌트: 아이히만과 김소영의 아버지 그리고 무사유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서 악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황정은은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의 어떤 측면은 평범성이라기보다는 상투성에 그 근원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평범하다는 것은 특수성 없이 보편성에 기댄 것을 말한다. 반면에 상투적이라 함은, 다수가 믿는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생동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히만은 나치 정권이 주장하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믿었고 유태인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다수가 주장하는 상투적 개념은 흡수하고 그 안에서 특수성이나 개별성 그리고 본인의 양심에 대한 사유는 게을리한 것이 그의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분석하고 있다. 황정은은 김소영의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집착과 한나아렌트의 무사유를 동일시한다.
그는 노동활동과 폭로와 노무현을 혐오한다. 노동이나 하는 주제에 자기 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서 노조활동을 하는 노조를 혐오한다. 삼성의 수십억 원대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배신자라고 매도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위가 없다고 혐오한다. 그의 세 가지 혐오는 다르게 보이지만, 모두 권위에 기댄 혐오다. 세 경우 모두 약자가 권위에 도전하는 순간을 혐오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노동은 천한 것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노동운동은 천한 것들이 권위 있는 회사에 정면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김용철 변호사는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삼성이라는 큰 권위에 흠집을 낸 자그마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혐오된다.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휘두르지 않고 낮은 자세로 국민들과 소통하는 노무현은 권위적이지 못한 인간으로 치부된다. 반면에, 김소영의 아버지는 그녀가 전두환과 노신영의 모습을 뉴스에서 보고 “아빠, 대통령이 죽으면 국무총리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 거지요?”라는 질문을 듣고 황급히 입을 막는다. 그는 “그런 말 하면 아버지가 감옥에 간다”며 겁에 질렸다. 이처럼, 그는 힘으로 세워진 정당성 없는 권위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가 독재라는 권위에는 순응하면서 약자의 권위에는 혐오로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김소영의 아버지는 권위를 힘으로 인식한다. 힘이란, 타자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의미한다. 독재정권은 폭력을 사용해 타자를 굴복시킨다.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지지와 정당성을 힘으로 얻고 그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잔인해진다.
둘째, 김소영의 아버지는 자본주의에서 도태되었지만 가정은 그의 권위를 다시 찾는 장소가 된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모순을 지닌다. 민주주의는 주체와 권리 그리고 평등을 강조하지만, 자본주의는 능력에 따른 차별을 추구한다.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는 가부장적 사회와 결합하고 가정의 가장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이들은 사회에서는 충직한 노동자요 가정에서는 권위 있는 가장이 된다. 이들의 권위는 가족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의해 주어진 정당하지 않은 권리다. 그리고 이는 독재자의 권리와 같다. 김소영의 아버지가 독재가의 권위를 무시한다면 자신의 권위도 파괴되기에, 독재가의 권위가 선을 넘어가기 전까지는 옹호하는 것이다.
셋째, 극단적 폭에 노출된 인간은 사유할 수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항상 사로잡혀 있다. 압도적 독재와 냉혹한 자본주의의 폭력은 인간을 사물로 만든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다면 가차 없이 철퇴가 내리치게 되고 이는 고통으로 심한 경우에는 죽음으로 다가온다. 김소영의 아버지와 아이히만의 공통점은 여기에 있다. 강력한 체제 앞에 선 유한한 인간은 큰 결단이 없이는 무사유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들은 통념에 기대어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얼마 없는 권위를 행사하는 인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7) 결론: 진정한 혁명이란?
“진정한 혁명이란 무엇인가?” 이는 황정은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시작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혁명이 삶을 바꾸지 못하면, 그것은 절반의 승리다. “혁명”이란 거창한 단어는 항상 거창한 행동을 요구한다. 우리를 억압하는 체제를 파괴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 시위하는 군중 혹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처럼 특권을 포기하고 타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과 같은 행동 말이다. 이런 행동이 요구되는 이유는 이것이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이는 인간이 인과관계에 따라 사태를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화심리학적으로도 유효하다. 육체적으로 허약한 인간은 도구와 전략을 통해 자연과 대결에서 살아남았다. 호랑이가 오는 길에 덫을 놓거나, 오늘 마주칠 맹수에 어울리는 도구를 들고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 악어를 만날 줄 알고 악어 사냥 도구를 가지고 갔다가 지상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표범을 만나면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다.
혁명은 확실성에서 불확실성으로의 이행이다. 지금의 체제의 불합리성을 별개로 혁명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에 불확실하다. 그리고 혁명을 행하는 인간의 유한성을 우리가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거창한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거창한 행동은 다수의 참여를 유도하고 내가 다수에 포함되었다는 그 안도감은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성을 가진 인간이 왜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군중으로 숨어드는 지를 적나라하게 분석했다. 그는 인간이 전체주의의 일원이 되는 원인을 분석했지만, 이는 새 시대를 여는 혁명에 동참하는 인간의 행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혁명은 그 안의 특수성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연대 사태”에서 생리대를 보급받지 못해 생리혈을 바지에 묻혔던 여성의 트라우마는 특이하다는 말로 희석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시위에서 옆에 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녀 아웃”이라는 여성혐오 발언은 어김없이 포용된다. 프랑스 여성들이 시몬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초반에는 외면하다 68 혁명에서 동지들에게 성차별을 겪고 그녀의 책을 다시 찾았다는 유명한 일화는 보편성 속에 희석된 특수성의 사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혁명의 목적은 무엇인가?” 보편적 가치를 무시하고 일부의 잘못된 가치관을 지키려는 구체제를 타파하고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사회구성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만약, 구성원에게 보편적 가치를 돌려주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면 구체제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황정은의 혁명의 승리에 대한 의심은 타당하다. 그녀는 소설 안에서 소외받는 개체들을 보여주면서 호소한다. “아직 혁명이 끝나지 않았다고”, “그리고 안심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녀의 책에서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김소영은 소설을 쓰는 집에 서수경, 김소리 그리고 정진원이 모여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고 즐겁게 하루를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녀가 생각한 세상이 아닐까? 성소수자, 미혼모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걱정 없이 자고 다시 일어나 활기차게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은 타자와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메시지다. 물론 타자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다. 김소영이 김소리와 언쟁하고 정진원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 모두가 자기와 다른 타자와 겪는 일들이다. 하지만, 통념에 기대지 않고 사유하면서 타자를 배려하고 긍정하는 것이 네 명을 이어주는 것처럼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야 말로,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는 울림을 주며 그녀는 소설을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