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피스토리우스와 데미안
마르가레테와 에바 부인이 대조를 이루듯, 피스토리우스와 데미안 또한 대조를 이룬다. 이 둘은 싱클레어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선생님이다. 하지만 피스토리우스는 이미 만들어진 숨겨진 지혜를 알려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데미안은 행동하는 존재다. 이 점에서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 결별하고 다시 데미안과 결합하게 된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가 아브락사스에 대한 지식을 갈망할 때 우연히 나타난다. 싱클레어는 많은 도서관을 다녔지만, 기득권에 의해 악마로 묘사되는 아브락사스에 대한 지식을 찾지 못한다. 그때 피스토리우스가 아브락사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아브락사스는 신들과 악마들의 결합체이다. 그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신성과 속됨을 동시에 품고 있다. 아브락사스는 우리가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는 모든 것, 즉 우리의 가장 깊은 본질을 상징한다.”
이처럼 피스토리우스는 아브락사스가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 성과 속의 변증법적인 특질을 가진 존재로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그는 싱클레어에게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가 정해놓은 길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독려한다. 이전에는 접할 수 없던 지식에 목말랐던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를 존경하지만, 문득 이상함을 깨닫는다. 피스토리우스는 지식의 습득만을 갈구할 뿐 자신은 독자적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는 싱클레어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 반기를 든다.
“당신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설 용기가 없습니다. 당신은 항상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당신은 내게 길을 가르쳤지만, 그 길 끝에서 스스로를 잃고 있습니다.”
이는 싱클레어의 입장에서 기득권과 같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더욱 나쁘다. 『스파이더맨 2』에서 피터 파커는 자신의 재능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한다. 스파이더맨이 되면 될수록 현실의 삶은 망가져 간다. 거리에서 사람을 구하고 피자 배달에 늦는다. 수업에 늦는다. 여자친구에게 소홀해진다. 피터 파커는 재능과 현실의 괴리로부터 자신의 재능을 저주한다. 하지만 그의 삼촌이 그에게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라고 충고하고 이는 스파이더맨이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내가 가진 재능은 내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그 선물은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돌려줘야 한다. 왜냐하면 이 힘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우연히 부여받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피스토리우스는 더욱 악하다. 각종 지식을 탐닉하고 이해하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싱클레어는 떠나고 다시 데미안을 갈구한다.
반면에 데미안은 지식과 행동을 갖춘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카인과 아벨 그리고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등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꺼리낌 없이 밝힌다. 그리고 고통받는 싱클레어를 크로머로부터 구해준다. 행동하는 지식인 그리고 사회의 억압에 저항하는 혁명가의 모습 또한 보인다. 싱클레어가 주체적 삶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이정표가 될 수 있는 데미안은 끝내 싱클레어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그에게 주체적인 삶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7) 니체의 책 그리고 통념의 파괴
『데미안』에서 니체의 책이 나오는데, 이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없기에 니체의 철학을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망치를 든 철학자로 유명한 니체는, 이전까지 서양 전통 철학이 추구하던 진리에 대한 통념을 망치로 박살 냈다.
니체는 언어의 정확성에 대한 질문을 언어의 불명확성으로 확장시켰다. 먼저 그는 모든 언어는 비유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고 지칭할 때, 그 사과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과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과는 나뭇가지에 달린 사과일 수도 있고, 벌레 먹은 사과일 수도 있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사과는 어떤 다른 무언가와 관계를 가지는데 우리는 두뇌에 사과라는 관념을 딱 하나만 분리해서 생각해낸다. 비록 그와 같은 사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크기가 조금 다를 수도 있고 색감이 조금 다를 수 있다. 혹은 표면에 상처 입은 사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특정 사물을 지식화하고 언어화하는 순간 이 모든 사과의 개별성은 무시되고 공통의 사과만 남는다. 그렇다면 사과라는 사물을 사과라는 언어로 지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과라는 사물에 투여된 욕망의 극대화를 위함이다. 우리는 사과를 사과라는 언어로 지칭하고 그 사과가 달고 맛이 있을 때, 좋은 사과라고 판단한다. 이는 사과라는 열매에 단것을 먹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단맛을 내는 사과가 사과의 본질인가? 그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맛을 내는 사과를 위해 유전자를 조작하고 햇빛을 쬐게 하는 등, 우리의 욕망에 맞게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화된 사물은 권력자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고 이는 특정 사물의 본질을 파괴하고 권력자의 욕망만을 대변한다.
이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어떤 사람이 학생이라 하면, 그 사람의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학생이라는 언어에 투영된 권력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학생이 더 좋은 학생이다. 학생이라는 언어의 강제라는 폭력에 가려진 개인의 개별성은 삭제되고 사라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밝은 세계는 밝은 세계라기보다는 권력자의 욕망이 투여되고 유지되는 세계다. 어두운 세계는 권력자의 욕망에 반하는 세계다. 같은 행동이라도 이처럼 다르게 보여질 수 있다. 살인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 사회는 살인을 거부한다. 물론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죽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은 어떠한가? 버튼 하나로 수억 명을 죽이는 것은 정당한가? 이런 살인은 국가 안보, 테러 방지 혹은 부수적 피해라는 다른 언어에 가려지고 정당화된다. 명예 살인은 어떠한가? 일부 문화권에서 기득권이 자기의 특권 보호를 위해 허용하고 오히려 장려된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에 대해 의심하라는 니체의 생각은 헤르만 헤세에 의해 『데미안』에서 다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언어로 규정되는 모든 관념이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회적 통념을 타파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은 자기 내면이 인도해 주는 것이다.
(8) 허약한 공동체와 연대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함께 연대와 공동체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강하고 영원하다고 믿지만, 그것은 매우 취약하다. 기존 사회는 불안정한 기초 위에 세워졌고, 사람들의 무지와 순응에 의존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세계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붕괴될 수 있다.”
이처럼 공동체는 언뜻 보기에는 강력해 보이지만 허약하고 외부의 충격에 취약하다고 묘사한다. 그 이유를 대중의 주체성 부족과 유행 쫓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던지고 공동체의 억압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를 두려워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개인에게 자유를 부여하기 전에, 인간은 순응의 삶을 살았다. 봉건제도에서 개인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있다. 기사의 역할, 농부의 역할 그리고 부인의 역할 등 기대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 아무 문제 없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본질과 실존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도 기대되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자유와 주체를 부여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자유와 주체는 바람직하고 기대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형성할 지적, 물질적 기반은 주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에 시달려야 하고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희석시키기 위해 미디어는 24시간 돌아간다. 자신의 주체적 생각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자유로운 인간은 공동체에 기대어 위안을 얻는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것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국민들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자유를 가진 주체적 존재이나, 1차 세계대전 패망에 따른 자신감의 상실과 그에 뒤따르는 경제적 박탈은 새로운 지지대가 필요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히틀러는 독일 게르만 민족의 부흥, 그리고 열등한 민족의 재산 압수를 통한 경제적 번영을 약속했고 개인은 그를 따랐다. 이는 현재의 일부 정치 상황과도 유사하다.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소수 인종과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한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일부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지지한다. 그 이유는 트럼프가 약속하는 여러 가지 물질적 보상뿐만 아니라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구호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이 모인 공동체는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쉽게 악용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기득권층이 보여주는 거짓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유행은 기득권의 의도에 따라 쉽게 변하고 이때 공동체 내부의 어떤 이가 희생될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탐구한 자유가 아니라,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물질적 번영에 대한 기대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단념 또한 쉽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세계의 연대와 공동체의 문제를 이야기한 것 아닐까?
(9) 결론
『데미안』은 성장 소설로 읽을 수도 있지만, 실존적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개인이 흔들리는 자아를 바로잡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는 성장 소설이지만, 끊임없이 몰아치는 세상에서 실존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실존적 소설이다. 하지만 몇 가지는 명백하다.
첫째, 성과 속의 구분은 자의적이라는 것.
둘째, 속스러운 세상과의 교류는 고통스럽지만 성장의 발판이라는 것.
셋째, 정해진 진리는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유하고 의심해야 한다는 것.
넷째, 그리고 그러한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얻은 나의 목소리는 나를 바른 곳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물론 속스러운 세계가 성스러운 세계보다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가 동반되지 않고 사회의 통념에 따라 성스러운 세계를 동경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다. 정보의 홍수에 살고 있고,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편 가르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죄다. 민주주의가 부여한 자유와 투표권은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라는 『스파이더맨 2』의 명언처럼, 우리는 끝까지 사유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저항하고 선택해야 한다.
다음은 카뮈의 "이방인"을 통해 부조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부조리에 저항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