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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를 배신하는 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 서론

현대의 고전이지만 완독의 문턱이 높은 작품이다. 현대 고전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많은 독자들이 책을 들지만 처음부터 나오는 니체의 영원회귀나 단선적 시간을 뒤트는 서술은 체코 시민들이 독재에 익숙해졌듯, 우리도 책을 내려놓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이 현대의 고전이 되었다는 것은 이 책만의 고유한 힘과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물론 영화를 통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접한 사람들도 많겠지만, 밀란 쿤데라가 영화화를 허락한 것을 후회한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는 담지 못하는 무언가가 책에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화와 다르게 이 작품이 가진 힘은 무엇이고 왜 고전의 반열에 올랐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2) 키치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 위해서는 키치를 이해해야 한다. 이 책에도 6장 전체를 활용해 키치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내용을 6장에 넣은 이유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오지 않고 독자들이 스스로 작품을 이해하라는 작가의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설파한 거처럼, 독자가 원하는 데로 독자가 따라온다면, 그가 증오해 마지않는 키치를 그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키치란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삶을 가볍게 만드는 모든 행위가 곧 키치다. 아니, 겉보기에는 무거운 삶을 살고 있지만 키치적 삶은 가볍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아간다. 부모님은 공경해야 하고,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고, 민주주의는 정의롭다. 이러한 모든 고정관념을 밀란 쿤데라는 키치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밀란 쿤데라는 스탈린 아들의 죽음과 똥을 이야기하면서 키치를 설명한다. 스탈린의 아들은 공산주의적 입장에서는 신에 가깝다. 신의 아들이기에 그는 추앙받고 존경받지만, 수용소에서 그를 죽음에 내몬 것은 똥이다. 똥 때문에 촉발된 싸움에 모욕감을 느낀 스탈린의 아들은 전기 철조망으로 돌진했고 감전되어 죽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2가지 키치를 생각한다. 첫째, 스탈린의 아들이 더럽고 하찮은 똥 때문에 죽었다는 똥의 가치를 폄하하는 키치. 둘째, 밀란 쿤데라가 말하듯 똥 때문에 죽었다는 건 키치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생명을 던질 수 있다는 키치로부터의 탈출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공산주의 민주주의라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이념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이 키치라는 생각. 이 상반된 두 입장이야말로 쿤데라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한 핵심이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삶이란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벼움과 무거움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누군가한테 무거운 삶은 남에게 가벼운 삶이 될 수 있고 그 반대가 될 수 있다. 밀란 쿤데라가 생각하는 무거움과 가벼움은 키치로부터의 속박과 키치로부터의 해방에서 비롯된다. 누가 봐도 무거운 삶 즉, 신의를 지키고 책임을 다하는 삶이 자기의 선택과 가치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무겁지만 피해야 하는 키치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을 사랑하는 삶은 책임을 다하지만, 어쩔 수 없는 속박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은 피해야 할 키치다. 반면에, 우리 사회가 정해놓은 문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랑을 찾는 바람둥이 삶은 한없이 가볍지만, 이는 키치를 벗어나 자신만의 무거움을 찾아 떠나는 가벼움으로 키치에 저항하는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 될 수도 있다.


밀란 쿤데라는 네 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키치란 무엇인가? 그리고 키치에 저항하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3) 인물 소개와 키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테레사, 토마시, 사비나 그리고 프란츠 이 4명의 인물의 사랑과 삶에 관해서 쓰고 있다. 책의 구조는 인물의 대비와 마찬가지로 각 장이 대비를 이루는 형식으로 쓰였다. 1장은 2장과 대비되고 3장을 기준으로 4장과 5장이 대비된다. 6장은 키치에 대한 설명과 사비나와 프란츠의 삶과 죽음, 그리고 7장은 테레사 토마시 부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장이다.


1장 가벼움과 무거움: 토마스의 시점 이야기

2장 영혼과 육체: 테레사의 시점 이야기

3장 이해받지 못할 말들 사비나와 프란츠의 이야기

4장 영혼과 육체: 테레사의 시점 이야기

5장 가벼움과 무거움: 토마스의 시점 이야기

6부 대장정: 키치 그리고 사비나와 프란츠의 결말

7장 카레닌: 토마스와 테레사의 결말


책의 구조를 보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1장과 2장을 매우 다른 것 같지만, 실상은 같은(이유는 뒤에 설명하겠다.) 토마스와 테레사의 키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3장은 사비나와 프란츠의 키치(같은 장에서 두 명의 대비 모습을 설명한다) 4장과 5장 또한 토마스와 테레사의 키치. 1장과 2장의 대비와 4장과 5장의 대비가 다른 점은 1, 2장은 기존의 키치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키치로 가는 모습을 그렸다면 4장과 5장은 키치를 벗어나 자신만의 무거움을 찾아 떠나는 토마스와 테레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렇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거워 보이지만 가볍디가벼운 키치에서 벗어나 진정한 무거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그린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테레사는 가족과 어머니라는 오래된 키치에서 떠나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향해 떠난다. 이는 가족이라는 기존의 키치에서 벗어났지만, 보수적인 사랑이라는 새로운 키치로 자신을 짓누르는 선택을 한다. 반면에, 토마스 또한 가족과 아버지의 책임이라는 키치에서는 벗어났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가벼운 선택만이 진정한 자유라는 키치로 자기 자신을 내몰게 된다.


사비나와 프란츠는 어떤가?? 사비나는 공산주의의 키치에서 벗어나 ‘배신’이라는 미학으로 저항한다.. 반면에, 프란츠는 사비나의 연인으로, 사비나와 외도를 즐기면서 가족과 책임이라는 키치에서 벗어나지만, 사비나와의 관계를 인정받아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키치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여러 가지 인물들의 대비되는 상황을 통해서 키치를 표현하는 쿤데라의 의도는 키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활환경과 관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토마시에게 키치인 것은 테레사에게 새로움이고 사비나에 키치인 것은 프란츠에게는 반 키치 개념이 된다. 따라서, 키치란 상황이나 내용이 아니라 형식 그 자체인 것이다. 지금 무거움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책임이 나의 선택과 자아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생각 없이 이끌려온 수동적인 책임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4) 키치에서 벗어나는 법

키치에서 벗어나는 법이 정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책 전체를 통해 쿤데라는 3가지 정도의 방법을 보여준다.

첫째, 우연이라는 세상의 선물을 통해서

둘째, 예술을 통해서

셋째, 꿈을 통해서 키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첫째,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다. 하지만, 그 우연의 축복을 온전히 받는 인간이 있지만, 우연을 애써 무시하고 키치의 무거움이 주는 안락함을 선택하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새로움에 대한 선택을 두려움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나비가 되기 위해선 고통과 파괴는 불가피하다. 테레사는 6번의 우연이 동반되는 만남을 위해 엄마의 억압에서 탈피했고, 토마시는 오이디푸스 사설, 사인 거부라는 여러 가지 우연을 통해 테레사와의 사랑을 완성했다. 이처럼, 우연의 새들이 나의 어깨에 내려앉았을 때 그 아름다움을 과감히 잡는 것이 키치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이다.


둘째, 예술은 사람의 상상력 이후의 세계를 보여주는 분야다. 예술은 키치의 삶 속에서 살고 키치가 삶의 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안적 세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의 무한한 상상력과 현실의 어두움을 차례로 보여줄 수 있다. 특히 쿤데라가 말하는 은유의 위험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의 상상력의 무대이다. 따라서, 예술로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와 예술을 즐기면서 상상하는 행위 모두 키치에 대항하는 인간의 고유한 무기다.


셋째, 꿈 또한 키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꿈은 사람이 무의식이 표현되는 예술의 공간이다. 키치에 의해 억눌린 무의식은 현실 세계에서는 표현되지 못하지만, 꿈에서는 은유와 비유로 상영된다. 꿈을 꾸는 나는, 꿈의 해석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순간, 예술이 주는 수동적 저항을 넘어 꿈의 해석을 통한 능동적 예술가의 권한을 부여받는다. 꿈꾸는 인간이 키치를 벗어나는 인간의 전형이다.


쿤데라는 사비나는 예술적 인간으로 테레사는 꿈을 꾸는 인간으로 표현한다. 토마시와 프란츠는 예술이나 꿈을 통한 능동적 인간이 아니기에 키치에 대한 저항 또한 소극적이다. 토마시는 책임을 벗어던졌지만, 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책임과 다양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자신만의 키치에 속박되었고 프란츠는 자신이 설정한 정절이라는 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이 벗어던진 키치는 억압의 정도 또한 약하다. 사회적 강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존재와 생존에 아무런 위협 없이도 벗어던질 수 있는 그런 키치다. (물론 이후 토마시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리지만, 이는 테레사의 영향하에 일어난 변화의 결과 아닐까??) 반면에 사비나는 끊임없이 키치를 배신하는 생활을 택한다. 자신도 무거움을 동경하는 것을 깨닫지만, 멈출 수도 없고 멈추지 않아도 괜찮다. 왜냐하면 예술이라는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자신을 억누르고 삶의 전부였던 어머니에게서 도망친다.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프라하에서 연고도 없지만 가방에 의존한다. 왜?? 꿈에서 이미 능동적 예술가의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과 예술을 가진 인간의 주체적 반항 그리고 가능성을 두 여성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5) 영원회귀와 카레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로 시작한다. 영원회귀란 같은 세상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세상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세상은 무겁다 하지만, 인간은 한 번의 삶을 살기에 매우 가볍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내 생각에 영원회귀가 갖는 의미는 이렇다. “인간은 한 번의 삶을 살지만, 영원회귀의 세상처럼 키치를 따르는 같은 삶을 반복한다. 이러한 삶을 사는 인간은 무거워 보이지만, 매우 가벼운 삶을 살고 있고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매번 같은 삶이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같은 삶에서 다른 모습을 찾는 가벼움이 진정한 무거움으로 가는 길이다”이다.


테레사의 어머니와 프란츠의 부인은 전형적으로 영원회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테레사의 어머니는 자신의 운명을 증오하며 세상과 테레사에게 저주를 퍼붓지만, 정장 삶은 항상 일정하다. 또한, 남과의 다른 특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가치를 주장하며 불행한 삶을 키치의 쳇바퀴에서 재현한다. 프란츠의 부인 또한 마찬가지다. 정절이라는 영원회귀의 쳇바퀴가 돌아가는 운명에 자기를 내던지고, 어떠한 삶이 찾아와도 쳇바퀴를 전복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쳇바퀴를 처음 돌린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인 프란츠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히 쳇바퀴를 굴리는 삶을 선택한다. 저자는 영원회귀를 통해 삶의 영원회귀로의 귀순을 적발하고 이를 심판에 맡기면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카레닌은 테레사에게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는 존재로 보이지만, 오히려 카레닌은 키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카레닌은 키치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카레닌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건 없이 주인을 사랑하는 카레닌은 의식과 이성이 없기에 모든 것을 사랑으로 수용한다. 카레닌을 무조건 사랑하는 테레사 조차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의 토마시를 조건 없이 사랑하지 못한다. 왜?? 둘 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의식과 이성의 존재로 인해 끊임없이 키치를 느끼고 그에 복종하지만, 또한 키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가진 인간에게 의식과 이성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과 이성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과 이성을 가진 다른 인간과의 교류뿐이다. 테레사와 토마시의 마지막 사랑이 그랬고, 프란츠에게 사비나가 그러했다.


(6) 참을 수 없는 억압: 공산주의

이 책은 전체주의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테레사와 토마시의 삶을 망가뜨렸을 뿐만 아니라, 키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왜 키치의 전형적인 모습일까?? 키치는 거부할 수 없는 가치 혹은 진실,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삶의 양식 등을 말한다고 위에서 설명한 바 있다. 공산주의는 그 특성상 키치가 될 수밖에 없다.


첫째, 공산주의는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한다. 공산주의 사상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과 승리는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키치다.


둘째, 공산주의는 과학적 인간관을 통해 혁명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관료적 집중주의로 국가의 목표에 전념하도록 한다. 공산당이 설정한 국가와 당의 목표는 신성시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생각 그리고 자아를 포기하고 당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정진해야 한다. 반론은 ‘반동’으로 호명되고, 절대긍정의 의례가 일상이 된다—이것이 체제의 키치다.


셋째, 그 당시 공산주의는 공산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과 도청을 통한 공포정치를 만들었다.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을 표현할 수 없는 사회 그리고 표현하는 사람에게 가차 없는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사회, 키치를 증오하던 사람들마저 키치에 순응하고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된다. 물론 키치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쿤데라는 둡체크와 체코 여성들을 소설에 등장시킨다. 누구보다 정의롭고 명석하며 체코 사회를 위해 싸웠던 둡체크. 기존 공산주의의 키치를 벗어던지고 체코만의 공산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의 압도적 폭력하에 누구보다 나약하고 복종적인 태도로 체코 대중 앞에 나타나게 된다. 굶주린 소련 군사들 앞에서 낯선 행인들과 포옹과 키스로 저항하던 체코의 여성들은 소련의 공산주의 하에서 대중목욕탕의 자리에 목숨 거는 무지한 대중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이 변한 이유는 단 하나, 생명을 위협하는 압도적 폭력이다. 이를 통해 쿤데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키치를 벗어던지고 무거움으로 향하는 여행을 가로막는 것은 압도적 폭력”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전체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폭력적 정치체제에서 탈피하고 증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7) 내 생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고전의 지위를 누르는 작품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생각은 고전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물론 책을 읽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러한 작가의 작품 기법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끝을 보여주고 쓰는 책은 읽기 쉽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생각을 온전히 가지고 가는 일방적 교류에 지나지 않는다. 수동적 인간. 키치가 주는 단물을 쪽쪽 빨고 키치의 저 아래에 있는 인간의 고통은 보지 않는 인간과 키치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일부러 자신의 의도를 감춘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철학적 개념을 도입하고 시간을 뒤죽박죽 섞으면서 직선적 시간관의 인간에게 일부러 도전장을 던진다. 우연히 책을 받고 도전장을 받아 든 우리 인간은, 도전장을 포기하고 책장에 책을 고스란히 넣어두던가, 애벌레에서 탈피해서 나비가 되는 것처럼 기꺼이 도전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불안과 파괴라는 불완전한 영역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글이 어렵다는 불평에 한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책이 의미를 쉽게 전달한다면, 이는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밖에 안 된다. 나의 책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고 해석의 방향 또한 많아진다. 이러한 작가와 독자의 교류가 진정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키치는 상상력으로만 탈피할 수 있다. 상상력의 빈곤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배신이요, 체제에 대한 순응이다. 쿤데라의 작품은 키치를 비난하는 것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그리고 독자와의 교류를 통해 키치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그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작가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뿐만 아니라 “농담” 등의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저자는 죽었다.” 저자는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그 바통을 우리에게 넘겼다. 이제 바통을 넘겨받은 우리가 행동할 차례이다. 책장으로 가서 꽂아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길 바란다. 책을 건드는 그 순간 우리는 키치를 배신하고 선을 넘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이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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