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1984”인가?
조지오웰의 명저인 “1984”는 그 누구도 아는 소설이다. 1948년 써진 디스토피아 소설로 전체주의가 부상하는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다른 고전처럼, “1984”는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같은 울림을 줄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명백히 “yes”다.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 지금 이 책을 다시 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 “1984”를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1984”가 그려낸 세계는 중앙정부가 개인의 정보를 소유하고 조작해 개인의 생각을 조정하는 사회다.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 이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인터넷과 프리 미디어는 정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 정부가 정보를 통제하려는 순간, 민주주의만이 checks and balances는 정부를 처벌하고 시민들에게 힘을 돌려준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정부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우리를 구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우리를 육체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우리의 사상을 조종한다. 완벽한 중립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중립성을 추구하는 기성미디어와는 다르게 인터넷에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반향실 효과”는 우리가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을 막는다. “확증 편향”은 우리의 주장이 맞아야만 하는 증거를 찾으라고 우리에게 소리친다. 이런 가짜뉴스를 몰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유도한다. 가짜 뉴스에 열광하면서 쏘아대는 우리의 별풍선은 다른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거름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가짜뉴스에 열광하는 우리는 “1984”에 나오는 2분 증오와 같은 레벨의 증오를 특정 집단에 쏟아낸다. 중국인, 여성, 남성 그리고 성적 소수자 등은 보호받고 같이 가야 하는 우리의 동지가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집단으로 변한다. 물론 이들이 우리 사회에 진정한 피해를 끼친다면 2분 증오는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가짜 뉴스와 과장 뉴스로 발생한 증오는 백해무익하다. 또한 이런 증오는 인터넷에서 건강한 토론이 일어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거침없는 증오와 패드립에 논리적 논거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인터넷에 노예가 되었는가? 이는 사유능력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분 쇼츠에 중독된 우리의 뇌는 사유는커녕 입 벌리고 침 흘리며 무분별하게 정보를 받아들이게 한다. 물론 공교육 또한 문제다. 우리의 교육의 궁극목표는 시험을 통한 서울대에 입성하는 것이지 생각하고 배설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형태를 달리할 뿐 “1984”에 묘사된 사회와 다르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예전의 전체주의 국가와 다르게 인터넷은 권력쟁탈의 야욕을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미셸 푸코가 말하길, 예전의 권력자는 권력을 뽐냈지만 지금의 권력자는 권력을 감추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숨겨진 권력은 분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뒤에서 분노의 대상을 만들고 우리의 분노를 그쪽으로 내몰고 그들의 힘을 영원히 지속한다. 인터넷은 완벽한 예시다.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숨긴 채, 우리가 우리의 자유로 뉴스를 찾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조지오웰의 메시지는 여전히 강력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메시지는 지금 더욱 시의 적절하다. 숨겨진 권력을 개시하는 것은 우리의 앎과 사유다. 이런 점에서 “1984”를 다시 꺼내는 것은 인류의 자유에 다시 불을 지피는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불길로 깨어난 우리의 사유는 권력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1984" 리뷰 긴버전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