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는 인간, 실존을 창조하다

시지프신화를 읽고 by 알베르 카뮈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 철학을 전개하고 부조리한 삶에 반항했지만, 부조리한 방법으로 사망한 매우 특이한 철학자이다. 알베르 카뮈의 인생 자체가 부조리였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가셨고 그의 어머니는 청각장애자로 힘든 삶을 살았다. 카뮈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가난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직면했다. 할머니의 엄격함과 어머니의 장애로 집에서는 거의 침묵을 지키면서 살았지만, 학교에서는 그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던 거 같다. 그의 스승 루이 제르맹은 카뮈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챘고, 그가 프랑스의 유명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 그 결과 카뮈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불의의 차 사고로 사망했다. 이런 면에서 카뮈는 삶은 부조리로 시작하고 부조리로 끝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카뮈가 이야기하는 부조리란 무엇인가?? 그는 시지프 신화라는 그의 책에서 신들에 반항한 죄로 끊임없이 돌을 언덕으로 굴려 올리는 시지프의 모습에서 부조리를 설명한다. 그 무엇도 시지프를 돌을 굴리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세상과 그의 형벌을 이해할 수 없는 시지프, 그 자체가 카뮈의 시선에서는 부조리인 것이다. 하지만, 카뮈는 행복하게 그리고 의미를 찾는 인간 실존으로서의 시지프를 설명하면서 반항하는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이는 이방인에 나타나는 개인 실존적 부조리와 반항의 시초가 된다.


(2) 실존주의와 현상학

알베르 카뮈는 실존주의 철학자,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는 자신이 실존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알베르 카뮈가 부조리와 그에 의해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실존주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지만, 부조리를 살아가는 바람직한 인간 그 자체는 실존주의 철학과 궤를 달리한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이점을 명확하게 한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은 그 존재의 특성으로 인해 불안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힌다고 말했다. 인간은 죽음과 육체적 한계에 갇혀 있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인간의 이성과 관념은 무한함을 항상 추구한다. “죽고 나서 나는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가?”와 같은 무한함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앞에 인간은 유한함과 무한함의 모순으로 인해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에 키에르케고르는 신이라는 무한한 존재에 기대는 삶의 방식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뒤에 더 설명하겠지만, 알베르 카뮈에게 종교는 도피이자 헛된 희망일 뿐 인간 각자의 실존을 실현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또한, 인간의 모든 경험적 관념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우리 인간의 육체 그 자체로 세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현상학은 인간이 각자의 실존적인 방법으로 부조리와 세상을 탐구해야 한다는 부조리 철학의 인식 방법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후설이 후에 이야기했던 우주적 질서와 본질에 대한 인식은 부조리철학과 현상학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차이점을 형성하고 만다.


따라서, 실존주의와 현상학은 부조리철학을 이해하는 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반항하는 인간과 본질을 거부하고 인간의 실존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부조리 철학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3) 부조리의 원인

그렇다면 인간들이 부조리를 느끼는 무엇인가? 부조리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가? 아니면 세상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제기하는 필연적 비극인가? 알베르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란 위의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포한다.


이 세상에 인간은 아무 의미 없이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인간에게 생각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는데 이는 인간이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존재론적 불행을 함께 선물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 체계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칸트는 인간이 감성과 오성이라는 체계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계로 범주화하고 이해한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인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지와 색 등을 통해서 자연을 바라보지만,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체계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인간은 범주화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인간 각 실존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된 객관적 해석을 강요한다. 이는 문화, 법체계, 사회, 경제체제 등으로 사물화 되는데, 이에 벗어난 해석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해 방식으로 간주한다.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실존을 찾아가는 진정한 인간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이성에 따른 인간의 범주화는 계몽의 변증법에 나온 아도르노의 비극과 매우 흡사하다.


둘째,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원인과 결과로 대표되는 인과성으로 세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우리의 능력이 세상을 파악하고 알 수 있다고 단언하는데, 그런 오만함과 이를 통해 지켜지는 안정감을 위한 인식 방법이다. 원인과 결과,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의 흐름은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로 대표되는 이성적 사고관과 일치하는 생각이다. 원인을 파악하면 불확실성은 제거되는데, 이는 인간에게 안정감을 제공한다. 따라서, 인간은 수학 과학 등의 방법론으로 세상에 이해를 도모했다는 착각을 가지게 되고 이를 우리가 정한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을 벗어나는 경험을 했을 때 극도의 불안함과 불합리성을 느낀다.


문제는 세상을 이해하는 인간의 체계는 세상 그 자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범주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범주화는 인간의 경험에 기반한 체제일 뿐 세상의 본질은 아니다. 인과율 또한 우리의 상상과 안정성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지극히 인간적 세계관일 뿐, 이는 세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세상은 그저 우리에게 무관심할 뿐이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지극히 작은 존재일 뿐, 세상을 창조하지도 않았고 세상의 방향에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 따라서,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부조리는 필연적 현상이다. 인간의 인식 체계에 따라 세상이 작용하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은 부조리한 감정을 느끼고 절망하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감정은 다음과 같다.

“왜 도덕적 인간이 불행을 경험하는가?”, “왜 나의 어린 시절은 불우한가?”, “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가?”, “왜 강대국은 후진국을 유린하고 삶의 기반을 빼앗아 가는가?”

인간의 도덕적 인과적인 세상의 이해는 도덕적 인간은 행복해야 하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나의 어린 시절을 불우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이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강대국의 악행은 세상의 모순으로 비칠 따름이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인과적 관념은 우리의 관념일 뿐, 세상에 존재 이유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은 절대로 “인간을 위주로 돌지 않는다.”


(4) 부조리에 대항하는 인간의 자세

부조리와 인간이 필연적 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카뮈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살, 희망 그리고 반항 이렇게 3가지 선택이 있다고 한다.


첫째, 자살은 부조리에 대한 굴복이다. 이는 우리를 부조리에 몰아넣은 세상에 대한 복종에 지나지 않는다. 시지프가 제우스에게 비합리적 형벌을 받아 자살을 선택한다면, 제우스는 천상의 궁전에서 비웃음을 날릴 뿐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로 자신의 실존에 따라 행동할 의무이자 권리가 있다. 우리 존재는 스스로 존재를 만들어내고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살은 부조리에 굴복할 뿐이지 나에 대한 존중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하고 의미를 생산하는 그 행동을 끝낼 때, 우리는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해악적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인간의 행동과 결단에 영향을 받는다. 이를 “앙가주망”, 즉 책임 있는 자유라고 하는데,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개인의 결단은 다른 인간 또한 비슷한 선택을 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하기에 해악적이다. 따라서, 제우스는 더욱 강력하게 인간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힘에 도취할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개인적 인간적인 면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둘째, 종교는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부조리한 경험에서 느끼는 허무함과 무력함은 종교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다. 부조리는 신의 뜻으로, 행복한 미래를 위한 필연적 경험이라고 자기 스스로를 속이게 만든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구원적 접근은 그 어떤 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나의 실존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경험과 존재로만 창조할 수 있다. 직접 경험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존재가 나의 실존에 대한 해답이라면, 그 실존은 존재 의미를 잊어버린다. 왜냐하면 종교에 의한 실존이란, 종교기관의 복음 혹은 계시 그리고 그들이 해석해 놓은 성경으로 만들어진 거짓 기반으로 만들어 거짓된 실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의 요청은 카뮈에 의해 거부된다. 왜 지금 나의 실존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고 보이지도, 느끼지도 않는 존재에서 실존을 찾는가? 이러한 선택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영원한 종속의 쇠사슬로 옭아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실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부정이자 인간성에 대한 모욕이다.


셋째, 반항만이 부조리에 대항하는 삶이라고 카뮈는 단언한다. 그렇다면 반항이란 무엇인가? 반항이란, 부조리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반항이란, 바꿀 수 없는 부조리를 바꾸려고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을 말한다. 반항은 부조리란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검투사의 해방은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인식하면서 시작된다는 스파르타쿠스의 선언과 함께 반항은 부조리에서부터 해방의 시작을 의미한다. 반항하는 인간은 부조리를 바꿀 수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헛된 노력이나 자기 위안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인간 실존을 찾을 수 있다. 주어진 환경에서 내 실존의 의미와 행복을 찾는 그 행위야말로 자유롭다. 인간의 의식은 자유롭고 독립적이기에 사회적 범주화에서 벗어난 개인적 실존은 반항적 움직임도 다양하다. 인간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헛된 희망으로 자기기만을 하지 않았을 때만, 독립적 실존적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반항을 통해 인간은 각자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지프는 평생 바위를 굴려야 한다는 그 부조리를 바꿀 수 없다. 또한, 바위를 굴리는 행위가 미래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자기기만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지프가 그 행위에서 실존을 찾을 때 시지프는 자유롭다. 바위를 굴리는 그 반복됨이 자기의 실존일 수도 있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에서 실존적 만족감을 찾을 수도 있다. 혹은 바위를 굴려 올리면서 느끼는 증오나 복수감이 시지프를 정의할 수 있다. 어떤 모습이 옳은가는 시지프 신화의 목적이 아니다. 각자의 모습에서 실존적 실천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반항적 태도에 대한 확신이 이 책이 이야기하는 바이다.


(5) 창조적 반항

방황하는 인간은 오직 개인적 실존으로 발현된다는 것, 여기서 카뮈는 그치지 않는다. 카뮈는 창조하는 인간이 반항하는 모습의 가장 이상적 모습이라고 말한다. 부조리에 휘둘리지 않고 반항하는 인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우리는 창조를 통해서 세상에 “우리는 인간이다”라는 당찬 결단을 보여줄 수 있다. 철학자는 자신만의 철학을 성립하고 소설가는 소설로 인해 반항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인간에게 반항의 모습을 보여주고 인간의 행동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의 창조물이지 우리에게 무관심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창조물이 창조적 반항의 힘을 가지지 않는다. 다양한 삶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더 많은 삶을 살게 해 주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는 창조물이 창조적 반항의 힘을 가질 수 있다. 다채로운 삶을 살게 해주지 않고 고정된 의미만 가지는 창조물은 인간의 범주화 적 인식만 견고하게 하고 다양한 실존적 형성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 창조적 반항이라는 개념에서 페스트와 반항하는 인간이 주장하는 연대를 통한 반항의 씨앗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창조물은 나의 실존성뿐만 아니라, 타인과 경험적 공유와 공통된 모습의 미래를 통해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에서 보여주는 수동적 반항은 이미 후에 카뮈의 철학적 기반인 능동적 반항을 내포하고 있다.


(6) 부조리 철학과 현대 사회

부조리 철학이 현대 사회에도 큰 의미를 던진다. 현대 사회는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부조리는 세상과 인간의 인식 차이에서 오는 부조리뿐만 아니라, 사회 지배층의 집단 이기심의 발현으로 형성된 부조리도 존재한다.


세상의 무관심으로 인해 만들어진 부조리는 지금이나 과거나 유사하다. 왜냐하면, 앞에 밝힌 대로 이러한 종류의 부조리는 해결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시대의 인간들은 예전보다 부조리 앞에 무기력하다. 카뮈가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하지 않기는 했지만, 부조리에 대응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종교적 믿음은 더욱더 사그라들었고,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개인의 고립은 더욱 심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은 우리의 과학적 수학적 능력으로 비롯된 세상의 발전과 발명품에 대한 찬양을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인과율의 절대적 법칙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더욱더 획일화된 성공과 바람직한 삶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강요는 실존적 의미를 찾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롭다. 자살률이 갈수록 높아지고 정신적 위태로움을 호소하는 정신병 환자의 증가가 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경제적 정치적 체제로 인해 발생하는 부조리의 마수는 더욱더 커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사회 지배층이 사회적 부조리를 감추는데 매우 능하다는 데 있다. 미셸 푸코는 “현대의 권력은 과거와 다르게 권력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형태로 작동한다”라고 말했다. “내가 가난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가 부조리해서가 아니라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이다.”라는 거대 담론은 부조리를 파악하고 반항을 통해서 자유로워지려는 인간의 노력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제적으로 소외된 개인은 재테크, 직업 교육, 비트코인 등의 헛된 희망에 의지하면서 자기기만을 하고 있다. 물론 재테크로 부자가 된 개인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을 부를 이전하는 형태로 부자가 되는 것이지, 부조리와 대항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부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자유롭지 않고 곧 다른 부조리에 희생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다시 읽혀야 할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부조리의 필연성을 파악하고, 자살이나 헛된 희망의 선택이 아니라 반항을 통한 인간 실존의 부활은 우리를 더욱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1, 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한없이 부서져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계화와 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발전이 재탄생은 이성 찬양의 부활을 이끌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세상의 부조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오히려 우리가 후진국에 혹은 우리나라의 소외된 존재에게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르틴 니뮐러는 불의에 행동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카뮈는 부조리에 반항하라고 말한다. 니뮐러는 불의 앞에 침묵한 인간을 비판했다. 우리는 이제 행동할 차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통일은 축복인가 부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