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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병현 Jan 12. 2019

상상텃밭 (2)

코딩하는공익(14)

  

상상텃밭 명함. 명함은 역시 다이니티지에 인쇄하는 게 최고다.

  적절한 타이밍에 명함이 도착했다. 각자 수 백명의 사람을 만나러 다녀야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명함은 필수다.


  다음 미션은 시장조사 미션. 단기간에 최대한 많은 고객들을 만나 보며 시장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과제다. 많은 학생창업팀들은 고객이 어떤 성향일지 상상만 해 보고 사업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이 과연 실제 고객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고객들이 열광할만한 제품을 만들고서도 운이 나쁘면 폐업할 수 있다. 뇌내 창업은 승률 낮은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고객에 대해 깊게 이해하려면 시장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아니겠는가?


  당시 상상텃밭의 비즈니스 모델은 두 개의 시장에서 경쟁해야 했었다. 우리의 스마트팜에서 길러진 채소를 판매해야 하므로 농산물 유통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했고, 또 우리의 스마트팜 자체도 판매했어야 되기에 스마트팜 시장, 더 넓게는 농기자재 시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남들보다 조사할 범위가 두 배 넓었다.


CD 미션에서 사용했던 ppt. 디자인이 구린 건 용서해 주자.

  사실 대회 수상이 목적이었으면 적당히 통계 표본 개수만 채우고 인증샷만 찍고 끝냈을 것이다. (2018 상반기 E5때 필자가 맡았던 팀은 2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수행하고는 굉장히 뿌듯해하고 있었다. 아마 비슷한 마음가짐을 가진 학생창업팀들이 적지 않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사업을 하고 싶었고,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장조사에 사활을 걸었다.


  농산물 가격을 정확하게 숙지하기 위해 매일 밤 자정이면 노은동에 있는 농산물 공판장으로 찾아갔다. E5에 서류를 제출한 직후부터 말이다. CD미션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공모전 미션을 떠나서 사업 준비에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매일 새벽에 농산물 경매가 진행된다. 주요 작물들의 경매를 다 보고 자취방에 돌아오면 새벽 3시가 넘었다. 나중에는 좀 더 욕심을 내어 새벽 5시까지 모든 품목의 경매를 다 보고 왔다. 그러고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등교했다. 수업 시간에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필자의 학점이 낮은 이유는 다 이것 때문이다. 절대 필자가 공부를 하기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흠흠.


  경매장 중도매인들과 금방 안면을 틀 수 있었고 새벽에 라면을 얻어먹고 오기도 했다. 머리 노랗게 염색한 젊은이가 매일 새벽 경매를 구경하러 와 있으니 굉장히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경매를 진행하던 농협 과장님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필자를 사무실에 초대해 많은 말씀을 해 주셨다. 발로 뛴 덕분에 단기간에 시장이 굴러가는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필자만 고생한 것이 아니다. 


악덕 CEO의 횡포를 고발하는 ppt 슬라이드

  황재민 이사는 매일 농장에 출근하며 기회가 될 때마다 농민들을 만나러 다녔다. 시골에 처음 보는 외지 젊은이가 갑자기 등장하면 사람들이 수상한 눈빛을 보내기 마련이다. 필자는 전단지 돌리려다가 파출소에 가 본 적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광음리의 젊은 희망, 남후면의 샛별이자 축산후계농인 재민 형님은 자연스럽게 어르신들께 다가갈 수 있는 첨병과도 같았다.


  현업 농업인들은 생각보다 더욱 고령이었다. 그들은 농업을 수지타산 따지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일종의 천명처럼 여기고 계셨다. 우리가 상상했던 대로 농업인에게 접근하면 안 된 다는 것을 덕분에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열심히 엉뚱한 우물을 파고 있지 않았을까.


  농장에 출퇴근하며 시장조사를 하는 것은 해상력이 높고 정확하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누군가가 기똥찬 아이디어를 냈다.  


  "석가탄신일에 동네 절에 어르신들 모여서 식사하시지 않을까? 시골에서는 그런 행사가 잔칫날일 것 같은데?"


남후면 광음리의 보현사 (블러 처리)

  광음리의 샛별, 재민 형님이 출동했다. 단 하루 만에 상당히 많은 농업인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 뵐 수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농업 하시는데 어떤 점이 힘드신가?'라는 질문만 드렸다.


설문조사 후 그렸던 제품 설계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니 맘 놓고 공개한다.

  처음 사업계획서에 써서 제출한 아이템을 피봇(pivot)했다. 우리는 육체노동이 힘든 것이 가장 주된 문제점이라 생각했는데 고객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아이템이 바뀌었으니 이에 대한 기술적 타당성을 다시 고민해야 했다. 


  농경제학과 컴퓨터공학을 복수 전공한 김수빈 이사(현 상상텃밭 대표이사)가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자문을 받고 왔다. 기술적인 문제는 크게 없을 것 같고, 땅이 남아도는 기업농이 아니라 땅 면적이 부족해서 매출 성장에 제한을 받는 개인농장을 주 타깃으로 하라는 조언까지 받아왔다.


발로 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고객들이 원하는 바도 알았고,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답변도 받았으니 구체적인 구현 방안만 고민하면 됐다. 모든 멤버들이 가까운 비닐하우스를 닥치는 대로 방문했다. 실제 비닐하우스에 적용되고 있는 장치들이 어떤 게 있는지, 그걸 IoT화해 인공지능이 제어할 수 있겠는지부터 지역마다 비닐하우스를 어떤 형태로 짓는지까지 철저하게 조사했다.


  (1) 시장조사

  (2) 피봇

  (3) 기술적 검증

  (4) 양산 방안 확정


  세 자리 수의 사람들을 만나보며 위와 같은 네 가지 단계를 한 사이클 돌렸다. 스타트업이 맨 처음 결정한 아이템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개 공동창업자가 처음 제안한 아이템은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능하면 제품을 출시하기 전 최대한 많은 고객을 만나보며 시장조사를 진행해 실제로 시장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과정이 필수다. 


  그 후 MVP를 출시하여 시장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MVP(minimal viable product)는 최소한의 기능만 탑재한 제품이다. MVP를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해 기존 사업 방향을 보강하거나, 필요하다면 완전히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한다. 계획이 수정되면 다시 시장으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시장조사와 피봇, 또는 약간의 수정을 반복해서 거치며 PMF(product-market fit)를 높여 나가야 한다. PMF는 제품과 시장 사이의 친화도를 의미한다. 더 상세한 설명은 나중에 실패하는 스타트업 매거진에 글을 써 보도록 하겠다. 


  사족이지만 E5 이후에도 끊임없이 PMF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지금 상상텃밭이 하는 일은 맨 처음에 작성된 사업계획서와는 많이 다르다. 1년 뒤에는 또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여하튼 E5-KAIST 미션 수행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피봇팅까지 한 과정을 논리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 미션에서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2차 미션 발표 후, 분당 심박수 104회 달성

  하지만 발표는 아무리 많이 해도 떨린다. 준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떨린다. 남들 앞에서 발표해 본 경험이 아무리 많아져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게 직업인 연예인들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정작 필요한 마인드 컨트롤 능력은 제자리걸음이고, 떨면서도 안 떠는 척 발표하는 능력만 늘어가고 있다.


CD 미션 결과

  1차 미션 탈락의 굴욕을 씻고 CD미션에서는 우수팀으로 선정되었다. 활동 자금으로 100만 원이 생겼다.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가 나왔다며 좋은 피드백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다. 


  몇 년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이 무렵부터 아마 팀마다 전담 멘토가 한 명씩 배정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5-KAIST에 참가 중인 멘토 4인이 각각 마음에 드는 팀 3개였나 4개를 선정하고, 선정되지 못 한 팀은 중도 탈락했다. 상상텃밭은 퓨처플레이황성재 파트너 CCO님께서 담당 멘토가 되어 주셨다.


당시 활동기록

  "멘토님 제가 사실 카이노베이터(KAINOVATOR, 카이스트 발명동아리) 회장 출신입니다."

  "으하하! 그래요? 카이스트 발명동아리 제가 시초에요!"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황성재 박사님께서는 만나뵐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혈해 주신다. 상상력이라는 능력이 범인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곳에 계신다. 


  "지금 상상텃밭의 모델은 ROI가 안 나와요. 여러분이 영업을 뛰지 않으면 매출이 안 나잖아요? 경영이란 기업이라는 조직이 작동되는 원리를 자동화 하는 과정이에요. 여러분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회사 계좌로 돈이 들어와야 비선형 ROI가 나올 수 있는 거에요."


  상상텃밭의 짧은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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