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윤동규 Jul 29. 2020

1. 회사를 나가주세요, 오늘 당장

회사는 갑작스럽게 잘렸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알 수는 없지만, 죽이 잘 맞는 회사 동료 J형이 있었다. J형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줄곧 말해왔고, 회사 입장에서는 J형의 빈자리가 치명적인 것 같았다. 나는 뭐... 김밥으로 치면 깨 같은거지만. J형은 김이나 밥이었다. 줄곧 그만두고 싶어하던 J형을 내가 잘 받쳐주며, 어찌 어찌 회사가 돌아갔다. 짧은 다큐멘터리나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회사였는데, 촬영 호흡이나 개그 코드가 참 잘 맞아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것도 J형의 퇴사를 막을 수는 없었고. 10월, J형이 퇴사하면서. 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나 보다. 동규씨도 나가주세요. 오늘 당장이요.


지금이야 부당해고니 뭐니 싸우겠지만. 당시의 나는 고분고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달치 월급을 추가로 지급하기로 했고. 나도 J형이 없는 회사에 애정을 붙이기 힘들었으니까. 오늘 당장 나가달라는건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그 이유를 듣고 나니 납득이 갔다. "내일부터 새로운 직원들이 출근하는데. 동규씨한테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되니, 마주치는 일 없이 빨리 나가주세요". 이 말이 납득이 갈 정도면 나도 참 어지간히 개판이지 않았을까. 조금 변명을 하자면. "할 줄 아는거 하나도 없으면서 대표 겸 팀장이라는 이유로 존중해주길 바란다면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마요", "내가 어제 야근을 했는데 오늘은 왜 정시 출근을 해야 하죠?"같은 이유들이었다.


회사를 잘린 다음 날은 제 시간에 일어났다. 지금 옷 갈아입고 출근하면 지각 안하겠네, 같은 씁쓸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퇴사하기 1주일 전에 닌텐도 3DS와 젤다의 전설을 샀었는데, 그 좋아하던 젤다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사에 미련이 없고. 해고가 얼마나 정당하냐, 어떤 피해를 입었는가와 별개로. 누군가에게 쓸모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건 괴롭다. 구체적인 괴로움이 떠오르기까지 예열 시간이 걸리기에, 해고 당일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 아닐까.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면 어쩌지. 앞으로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며, 퇴근 후에 끓여 먹는 라면이 인생의 전부면. 그런 삶은 조금 별로다. 하지만 별로이지 않은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일주일 뒤에 이사를 했다. 집주인이 재건축을 빌미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잘릴거면 빨리 잘릴걸. 집 보러 다니기 편하잖아. 괜히 퇴근하고 저녁 늦게 돌아다녔네. 이사는 별다른 이유 없이 이태원으로 결정했다. 있어보기도 하고. 우사단길 이라는 도로명 주소가 몹시 매력적이었다. 이사는 밤이 되어야 끝이 났고, 난생 처음 들어본 365PLUS라는 편의점에서 에드워드 권 도시락과 잘 마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샀다. 프레임 없이 달랑 도착한 싸구려 매트리스에선 비닐 냄새가 났다. 휴대폰 충전기만 겨우 꺼낸 이삿짐 박스들 틈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바깥은 할로윈 기간을 맞이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 것도 없었고, 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조금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윤동규 소속다큐멘터리 직업감독
구독자 32
매거진의 이전글 0.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로 했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