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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Jun 01. 2018

느림과 번거로움, 필름 카메라가 좋은 이유

  작년 9월, 암스테르담에 있을 때 반 충동적으로 85유로짜리 필름 카메라를 구입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필름 카메라가 유행하면서 같은 기종도 국내 가격은 좀 더 비싼 감이 생겼다는데(필름 카메라는 모두 생산이 중단되어 더 이상 공급이 없기 때문에 가격 형성이 절대적으로 수요량에 달려 있다), 유럽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M모드를 지원하는 카메라를 살 수 있었다. 그때 샀던 카메라는 이 주만에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아 50유로 정도를 더 주고 다른 기종으로 교환하긴 했지만. 하여튼 그때 샀던 카메라를 교환학생 기간 동안, 유럽 여행하면서, 한국에 와서까지 잘 쓰는 중이다. 암스테르담 시내에 있는 camera warehouse의 외관과 무척 친절하던 직원들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 카메라를 사고 나서도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찍은 사진을 현상하느라, 친구가 카메라 살 때 같이 가느라 멤버십 카드까지 만들어 두고 한 달에 두세 번씩은 꼭 들렀었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 대단한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든다.


  나도 별 관심이 없다가 유행을 따라 필름 카메라에 입문한 흔한 케이스다. 필름 사진 유행은 아마도 최근 몇 년 새 사람들이 '아날로그 감성'에 빠지기 시작한 여파인 듯하다. 전 세계적인 경향인지 한국 내에서 만의 열풍인지 궁금하다. 그러니 내 경우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한 계기의 절반은 허세(?)인 것이다.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입문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까 싶다. 딱히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멋있어 보이고 왠지 있어 보여서 시작할 수도 있지!

  감성 허세를 제외한 입문 계기의 나머지 절반은 아날로그에 대한 디지털 네이티브의 호기심이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집에 와 자랑하니 고등학생인 동생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했지만, 부모님은 "저걸 요새도 써? 유행한다고? 아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정도의 반응을 보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님껜 그냥 옛날에 쓰던 기계일 뿐이지만, 나와 동생에겐 오래된 카메라란 겪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동경을 의미했다. 우리 나이보다 오래된, 타인의 손을 여러 번 거친 골동품을 다룬다는 데서 오는 묘한 흥분도 있었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의 묘한 색감과 분위기도 나한텐 있지도 않은 809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데 한몫한다. 


  그런데 사실 필름 감성의 결과물만을 위해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애초에 감성 사진이라는 장르의 실체도 모호하다. 내가 생각하는 소위 인스타 감성샷의 특징은 낮은 채도, 노이즈, 레트로한 색감, 더 한다면 비네팅 정도인데,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후 후보정을 하는 것으로도 그 '감성' '필름' 느낌을 충분히 낼 수 있다. 오히려 그 편이 안전하다. 포토샵이나 라이트룸을 조금만 다룰 줄 안다면, 잘 나온 사진을 골라서 정성 들여 원하는 방향으로 보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라이트룸 프리셋은 인터넷 여기저기서 무료로 배포하는 것을 구할 수 있고, 특정 어플의 보정값도 여기저기서 공유되기 때문에 그것만 잘 적용해도 느낌 있는 사진이 나온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인간적인 프로세스에 대한 그리움에 있는 것 같다. 전자책 보다 종이책을 선호하는 이유, 편지만은 손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와도 같다. 아날로그 카메라의 물성은 직접 필름을 넣고 레버를 돌리고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조절하고 찰칵, 하는 과정에 있다. 처음 필름 사진을 찍기 위해선 필름 한 통을 뜯어 살짝 잡아당겨 뺀 후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넣어 고정시키고, 뚜껑을 닫고, 레버를 한 번 감아 마무리해야 한다. 내가 만들어낼 결과물이 그려질 도화지부터를 직접 준비하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한 컷을 찍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레버를 돌려 빈 필름을 렌즈 뒤에 맞추고 셔터를 누르면 조리개가 순간적으로 열린다. 빛은 그 안으로 들어가 바디 뒤편에 펼쳐져 있는 필름에 닿아 형상을 남긴다. 그 일련의 과정이 보이진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게 좋은 것이다. 다 쓴 필름을 감아 꺼낼 때 나는 희미한 화학약품 냄새도 그래서 좋다. 

  디지털카메라도 사진이 찍히는 원리는 필카와 같다. 다만 필름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으로 형상이 남는 과정이 디지털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똑같이 조리개 값을 맞추고 셔터스피드를 조절할 수 있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있지 않은 이상 셔터를 누를 때 이 네모난 상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관적으로 느끼기 힘들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 디지털 변환 과정을 다 안다 하더라도, 빛이 물리적으로 닿아 사진을 만드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주진 못할 것 같다. 아마 이 인간적인 과정에서 오는 그 느낌을 정확히 지칭할 말이 없어 다들 '감성' 정도의 단어로 표현하나 보다. 


찍은지 네 달이 지나서야 현상한 불가리아의 알렉산드로 넵스키 성당


  필름 사진은 비즉각적이라는 점도 좋다. 한 롤을 다 채우고 현상하고 인화(또는 스캔)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없으니 현상 전까진 초점은 맞았는지 흔들리진 않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친구들이랑 셀카 한 장만 찍어도 다 같이 확인하고 잘 나왔네, 못 나왔네 하는 것에 익숙한 나에겐 낯선 기다림이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너무나 투명하고 즉각적이다. 소통도 즉각적이고 정보 공유도 즉각적이다. 언론사에서도 단독, 속보 경쟁이 무의미해진 지 오래라고 한다. 매일 아침 신문을 찍어내던 시절엔 한 회사에서 단독 기사를 띄우면 다른 데는 그다음 날 조간신문에서야 그걸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가 인터넷 기사를 내니 속보가 뜨면 몇 분 내로 바로 우라까이 해 올릴 수 있다. 

  즉각적인 것은 편리하지만 피곤하다. 필름 카메라를 늘 들고 다니며 자주 현상하는 사람은 또 다르겠지만, 가끔 생각날 때 몇 컷씩 꺼내 찍고 다 채운 필름 몇 통이 모여야 미적미적 현상을 맡기는 나는 겨울에 찍은 사진을 초여름에야 보게 된다. 게으른 탓이지만 그 속도가 싫지 않다. 모든 것을 디지털로 처리하고 기계가 만들어내는 시대에 과정의 손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번거로움도 싫지 않다.  




이 게시물은 아트인사이트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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