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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Nov 07. 2021

시간을 달리는 친구


학창 시절 친구는 그 친구를 만났던 시절로 데려가는 타임머신이다. 어느 날 밤 대학 4년 내내 붙어 다녔던 단짝 친구와 전화 수다를 떨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세 시간도 넘게 통화했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 2년도 넘었고, 만난다 해도 일 년에 한 번 동아리 동기 송년회에서 보는 게 고작이다. 2년을 세 시간에 압축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가뭄이 해소된 기분이었다.      


학교를 졸업 후 친구와 나는 180도 다른 여정을 향해 노를 저었다. 빨강머리 앤과 절친 다이애나처럼. 앤과 다이애나는 자연의 품에서 교감하며 서로 못 만나는 상황을 끔찍하게 슬퍼했다. 서로 헤어지더라도 평생 잊지 않을 우정을 맹세하며 슬픔을 쫓아냈다.     


학창 시절에는 삶이 비슷비슷해서 삶이 다를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졸업 후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고, 나는 불문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친구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래도 드문드문 만났다. 일 년 만에 친구는 허니문 베이비를 출산했고, 나는 논문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다. 같은 시간에 수업을 듣고, 등하교하는 삶은 완전히 끝났다. 


환경이 달라지자 친구와 나 사이에는 접점이 점점 줄어들었고, 연락도 뜸해졌다. 사는 동네도, 사는 방식도 달라져 마음의 거리는 더 커졌다. 나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연애에 서툴렀고,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감정이 널을 뛰었다. 게다가 단짝 친구까지 잃어버린 상실감으로 가슴에는 컴컴한 동굴이 생겼고, 그 안에 혼자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우리에게는 4년 동안 함께 밥 먹고, 술 마시고, 여행 갔던 시간이 남겨졌다. 이 찬란했던 시간에 함께 있었던 기억이 우리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어주었다. 그 외에는 외적, 내적 교류가 없었다. 친구는 연년생으로 아이를 출산 후 남편이 개업하는 바람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터라 개인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나도 졸업 후 질풍노도기에 쉼표를 찍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등 개인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살았다. 서로의 소식에 둔감한 채 대체로 침묵했다. 몇 년에 한 번씩 둘 사이에 놓인 침묵의 장벽을 찢고 마주 앉곤 했다.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서로에게 알리면서 과거를 소환하며 종횡무진했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다.      


친구란 뭘까? 친구의 뜻을 국어사전에서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영어 사전에서는 '잘 알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친구와 나는 영미권식 정의에 더 가까운 관계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불쑥 만나거나 이야기해도 어색하지 않다. 긴 인생 주기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은 고작 몇 년 안 되는데 말이다. 각자의 배를 타고 다른 인생 항로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더 많은데도 어릴 때 쌓은 신뢰가 얼굴을 보면 되살아난다. 내 기억 속에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무색무취 인간이라고 기억하지만, 친구는 나를 좋게 말하면 줏대있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있게 기억한다. 


“너는 싫은 일은 꼬드겨도 안 했잖아.” 친구가 말했다. 나는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생각하며 “나 어릴 때도 그랬어?”하고 되물었다. 내 머릿속에는 고집을 부린 기억이 별로 없다. 놀랍게도 나를 잘 아는 친구에게서 내 기질의 영구성을 확인하곤 한다. 

"너는 네 이야기도 하지만, 원래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줬어." 

"어, 나 다른 사람 이야기 듣기 좋아하는 거, 어릴 때도 그랬어?"    

 

나도 모르는 나의 기질을 학창 시절 친구의 입을 통해서 들을 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사람의 기질이 변하지 않은 것이 놀랍고, 그 기질을 어린 나이에도 알아본 것도 놀랍고, 졸업한 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기질을 기억하는 것도 놀랍니다. 친구는 체험하는 걸 즐기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기질이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이 친구 덕분에 내가 하기 싫은 여러 가지 것을 경험했다. 스물두 살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던 것도 이 친구의 꼬드김 때문이었다. 지금도 친구는 긍정적이어서,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헤쳐가는 자신만의 슬기로운 방법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맞아, 이 친구의 이런 모습을 좋아했지' 상기하곤 한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정신의 결이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어릴 때도 있었던 것일까?  

    

사회생활하면서 사귄 친구들은 학창 시절 친구와는 느낌이 다르다.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서 만난 동료였다가 영혼의 결이 비슷한 걸 서로 알아본 사이가 친구로 남는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연락하는 사람을 친구로 부른다. 자기 세계가 강해진 후에 만난 친구들이라 교집합보다는 여집합이 많지만, 관계는 교집합을 보아야 이어질 수 있다. 학창 시절에 하는 경험과 직장에서 하는 경험의 종류가 달라서 표면에 드러나는 기질도 다르다. 환경에 적응하려면 없던 기질이나 잠재되어 있던 기질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걸 보고 사람이 변했다고 말한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 누구를 만났는가에 따라 나라는 총체의 합이 달라질 수 있다. 학창 시절 친구가 기억하는 나를 통해 나를 다시 본다. 친구의 기억 속에만 있을 수도 있는 나를 추억하기도 한다. 현재의 나를, 신기루처럼 멀리 있었던 친구를 통해 돌아보게 된다. 친구는 나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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